TOP
TOP

과거는 다시 오지 않을 머나먼 미래가 되어 - 만화 《올해의 미숙》

조경숙  |  2019-05-17 13:34:15
 | 2019-05-17 13:34:15
초기화
피해자를 피해자의 자리에만 남기지 않는 작업은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 전후로, 여러 문화 콘텐츠에서 이어지고 있다. 만화에서는 성폭력 피해자를 입체적으로 그려낸 <아 지갑 놓고 나왔다>(미역의효능 작)와 가정폭력을 다룬 웹툰 <단지>가 있었고, 최근에는 친족성폭력을 다루는 웹툰 <27-10>, 아동학대를 다룬 웹툰 <땅 보고 걷는 아이> 등의 새로운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창비에서 출간한 만화  《올해의 미숙》도 그러한 작업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20190218_060652.jpg
《올해의 미숙》 표지 사진 (사진 출처:창비 출판사)
 
《올해의 미숙》의 주인공은 '미숙'으로, 위로 언니가 한 명 있다. 미숙의 이야기는 언니 '정숙'과 함께 병원에서 우울증 진단 검사를 받고 나서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우울증 검사를 마친 뒤 정숙은 엄마와 함께 사는 집으로, 미숙은 자신만의 집으로 돌아간다. 둘 다 이십 대 정도 되었을까, 미숙은 스스로 돈을 벌고 자신만의 공간을 꾸리고, 무탈한 연애를 이어가고 있는 평범한 성년의 삶을 산다. 그러나  미숙이 쌓아 올린 이 평범하고 안전한 일상은 처음부터 당연히 있었던 게 아니다. 

청소년 시기, 미숙은 집에서 폭력의 최하위였다. 아버지는 수시로 어머니를 때렸고, 그런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울분으로 언니는 미숙을 때렸다. 학교에서도 따돌림당하고, 집에서도 있을 곳이 없던 미숙은 우연히 만난 친구 재이에게서 깊은 유대감과 위안을 얻는다. 이 만화에서 재이와 미숙이 보내는 시간이 그려지는 방식은 매우 인상적이다. 재이와 미숙이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비디오를 보고, 여행을 가고, 서로 숙소에 누워 서로를 바라본다. 같은 시기 미숙은 집에서 언니에게 맞고 괴롭힘당했지만 재이와 시간을 보내는 이 시기에, 그런 장면은 한 컷도 그려지지 않는다. 정숙이 미숙을 때린 건, 대사로만 처리되거나 맞았으리라 짐작되는 흔적들만 비유적으로 그려진다. 

미숙은 이 만화에서 '진도'와도 유사하다. 진도는 아버지가 토종 진돗개라며 데려와 지극정성으로 돌보던 강아지인데, 진도가 진돗개가 아님이 밝혀지자 진도는 곧 아버지의 관심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진도는 늘 쇠사슬에 묶인 채로 정해진 곳만 돌아다니며 똥을 싸고, 자신의 똥을 먹었다. 미숙이 재이와 여행을 다녀온 이후 집 대문을 들어서서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이 여기저기 널린 개똥이었다. 아무도 진도의 똥을 치워주지 않았던 것이다. 

여행을 다녀온 직후, 미숙은 재이에게서 갑작스러운 배신을 맞는다. 재이와 틀어지고나서 미숙은 곧바로 자퇴하여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검정고시에 합격하자마자 작은 컨테이너를 둔 사무실로 둔 회사에 경리로 취직한다. 취직을 기점으로 독립한 미숙은, 제일 먼저 진도의 목줄을 풀어 진도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 '진도'를 '절미'로 바꾸어 불렀다.

미숙은 중학교 시절 반 아이들에게 "야 미숙아"로 불렸다. "야"도 아닌 "미숙아"도 아닌 "야 미숙아"는 미숙에게 오랫동안 '명찰'처럼 따라붙었다. 그런 미숙이 진도의 이름을 절미로 바꾼 데에는, "야 미숙아"라는 명찰을 뗌과 동시에 이제 자신의 삶도 폭력의 방식이 아닌 자기만의 방식으로 부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맞는 나를 좌시하지 않고, 폭력의 (쇠)사슬을 끊어 낸 미숙의 일상은 이전과 완전히 다르다.

미숙은 이같은 자신의 서사를 담담하게 회상하면서, 작품 말미에 무심한 듯 말한다.  "절미는 이제 똥을 먹지 않는다. 그동안의 일이 마치 먼 미래의 일 같다." 지금 미숙이 살아가는 일상 속에 폭력으로 얼룩진 과거는 한 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대사는 그런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이 일상이 가능해진 게 아니며, 이에 더해 미숙이 더는 과거에 묶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이 과거는 다시 오지 않을 머나먼 미래의 것으로 던져진다. 

미숙은 이제 지금의 시간을 사는 '올해의 미숙'이다. 그에게 과거는 아주 작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이제 진도는 절미가 아니고, 미숙도 '야 미숙아'가 아니다.
조경숙
댓글 0
닉네임 * 비회원 덧글은 삭제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