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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독서중독자들>, 활자와 취향과 허세로 세운 나만의 왕국‘들’

한국콘텐츠진흥원  |  2020-01-06 16:50:00
 | 2020-01-06 16: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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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독서중독자들>, 활자와 취향과 허세로 세운 나만의 왕국‘들’ 


글 이다혜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이력서의 취미란에 당신은 무엇이라고 쓰는 사람인가? 소개팅할 때도 마찬가지다. 취미는 무엇인가요? 독서와 음악 감상은 아주 오랫동안 취미의 대명사처럼 쓰였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진짜 취미가 무엇이든 그것을 노출하기가 쉽지 않거나 굳이 상대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경우가 많다. ‘좋아서 하는 일’인 취미의 영역은 불필요하거나 과잉된 삶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으니, 일자리를 구하거나 애인(혹은 결혼 상대)을 찾을 때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굳이 일찍부터 알리고 싶지 않아 하는 경우가 많다.


‘덕질’, BL 읽기, 바이크 타기, 피겨 수집 등은 나중에 알려도 늦지 않다. 혹은 직장 사람들한테는 영원히 일반인처럼 보이는 게 속 편하다. 독서는, 가장 무난한 대답이 된다. 또한 그런 이유로 언젠가부터 ‘취미 없음’의 대명사격인 대답이 ‘취미는 독서’였다. 영혼 없는 대답이기도 하고. 이런 무난함이 통용되던 것은 20세기까지였던 듯하다. ‘색깔 없음’이 취직에도 연애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영상 콘텐츠가 스마트폰으로 들어온 2010년대, 이제 독서는 어떤 것이 되어있는가? <책과 세계>(강유원) 프롤로그의 첫 문장.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익명의 독서중독자들>은 독서 모임으로부터 시작한다. 한 남자가 모임에 처음 참석해 ‘노마드’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자기개발서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경악에 빠진 좌중의 표정, 그리고 뒤이은 컷. 역시 처음 참석하는 다음 남자는 앞 사람이 그 말 한마디로 모임에서 추방당하자 바짝 긴

장한다. “저는 그리스 비극을 즐겨 읽습니다” 반응을 알 수 없는 분위기에 몇 마디 더 보탠다. “사실경찰입니다. 잠입 수사를 맡는 바람에 지금은 범죄 조직의 간부로 살고 있지만요” 자신이 경찰인지 조폭인지 분명히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그는 별명을 정해달라는 말에 ‘경찰’을 선택한다. 모두

가 “안녕, 경찰”이라고 인사하자 그는 오랜만에 듣는 ‘경찰’이라는 호칭에 감격한다. 그런 심리 상태를 눈치챈 옆 사람이 묻는다. “당신, 이런 모임보다는 전문의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는 쪽이 적절한 것 같지 않아?”

 

여기 첫 번째 농담 같은 한 방이 있다. 할 게 많아도 너무 많은 시대, 굳이 시간을 들여 책을 읽고, 그것을 좋아하며, 모임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책에는 댓글 창이 없고 내가 무엇을 물어도 응답을 들을 수가 없다. 독서는 문장과의 대화이자 자기 자신과의 대화다. 책을 읽는 사람이 점점 적어진다면 책을 읽은 감상을 말할 곳도 없다. 독서를 좋아한다는 말은 곧 일정 정도 외로움을 감내한다는 뜻이 되어버렸다. 자청해서. 자기개발서 중독자는 왜 쫓겨나는가? 독서중독자의 세계에서 베스트셀러, 그중에서도 자기개발서는 그런 외로움의 정서와 아주 먼, 북적이는 광장의 정서

와 맞닿아있다. 북적이는 곳에서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그런 책은 기능적인 용도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독서를 좋아하는 이들의 냉소적인 판단이다. 독서광들의 이런 자신하는 태도에 숨어있는 허세가 <익명의 독서중독자들>을 읽는 재미다.


<익명의 독서중독자들>이 연재 초기 SNS에서 화제가 되었던 이유는 3화에 있다. 저자 소개 문구가 도마 위에 오른다. 사생활부터 서술형으로 쓴 책을 가차 없이 무시한 이들은 군더더기 없이 책과 관련된 필수 요소만을 간략히 정리한 책에 ‘심쿵’이라는 말을 붙여 상찬한다. 원칙은 몇 개 더

있다. 저자 소개보다 역자 소개가 긴 책은 재고의 여지 없이 무시한다. 저자명보다 출판사명이 크게 인쇄된 책들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목차를 봤는데도 전체 구성이나 전개 방식을 가늠하기 어렵다면 그것 역시 기본이 안 됐다는 말을 듣는다. 목차의 제목을 그럴듯하게 요리했을 가능

성도 있으니 책 제목과 목차는 원서와 대조해보면 좋다. 책에서 인용할 때는 정확히 인용해야 한다. 소설파와 비소설파는 잘 섞이지 않는다.



나는 일반인처럼 보이지만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다!

 책 덕질이라고 다른 덕질과 다르지 않다. 책 고르는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것 같은 초반에서 벗어나면 그 사실이 분명해진다. 덕질을 시작하면 일종의 ‘정파’와 ‘사파’ 나누기에 몰입하는데, 그에 따른 경계 분명히 하기와 족보 꿰기는 기본적인 일이다. 주로 ‘내가 파는 것’이 ‘정파’가 되는데 소설만 읽거나 비소설만 읽는 식, 혹은 해당 문파의 원류 찾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자신의 정체성에 해당하는 덕질의 대상을 좁히고 한정 짓기에 해당하는 행위는 베스트셀러 배척이다. 지적 배경이나 취향이 다른 다수의 사람이 동시에 즐기고 공감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들도 알고 있을

게 분명한 해당 분야의 가장 유명한 것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편이 좋다. 마들렌과 홍차를 대접받는 독서중독자라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떠올릴 텐데 이 자리의 모두가 똑같으니 섣불리 말을 꺼내서는 안 된다. 특히 당신이 그것을 완독하지 않았다면 주변의 고수를 주의하라. 자신

을 내세울 수 있는 적당히 마니악 하면서도 어느 정도 알려진 정보를 가까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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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받은 책을 산 뒤 자랑하는 주인공에게 “그 책 없는 사람도 있나?”라며 책을 꺼내 드는 독서중독자들 
<익명의 독서중독자들> (글 이창현, 그림 유희. 다음웹툰 연재)



9화의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꼽기’를 예로 들어보자.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이라고 답한다면 당신은 추방된다. 자기개발서 중독자와 같은 취급을 받으리라. 도서관이라는 본래의 기능에 충실한 공간이어야 한다. 실용적인 도서관으로서의 공간보다는 ‘정보’의 차원에서 내세울 수 있는 곳. 독서중독자들의 답변은 이렇다.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피셔 폰 에를라흐가 설계한 바로크 건축의 걸작으로 합스부르크가의 영화를 상징하는 호화로운 중앙홀을 갖고 있다), 오스트리아 멜크 수도원 도서관(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의 아드소를 멜크수도원의 베네딕트회 수련사로 설정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오스트리아의 아드몬트 수도원 도서관(후기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공간으로, 순백의 벽을 금으로 장식한 로코코 풍 서가는 비할 데가 없다). 물론 거기에 가보고 하는 말은 아니다! 현실과 괴리되어 있는 자기 자신에 도취되기야말로 ‘덕심’의 기본이다. 나는 일반인처럼 보이지만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다!


<익명의 독서중독자들>은 취미로서의 독서를 논할 듯한 인상으로 시작해, 책 덕후 혹은 활자중독자들의 패턴을 알려주고 여러 독서법(완독에 집착하지 말 것, 한 번에 여러 권을 동시에 읽을 것 등)을 알려주다가, 갑자기 배신에 배신이 꼬리를 무는 액션 스릴러로 이어간다.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생활인으로 나서면 능률적인 사회인으로 대변신한다. 덕질을 할 때의 순수함(?), 열정(?), 세상에의 무관심(?)은 그들의 전부인 동시에 일부일 뿐이다. 마치 무술 고수임을 감추고 살아가던 영화 <쿵푸 허슬>의 마을 사람들처럼. <익명의 독서중독자들>의 작가가 실제 독서중독자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랬다면 주인공들은 책으로 진검승부 보는 데 집착했겠지. 독서에 중독된 사람들이 저마다 몸 자랑을 하기 위해 웃통을 벗는 대목에서 느낀 ‘파스스…’ 함을 떠올려보면 더욱더 그렇다. 덕질이 그렇다. ‘알고 보면 대단한 사람’이고 싶지만, 알고 보면 별것 없기 때문에 어딘가에 빠져 지낸다. 추구 가능한 이상향에 매달리며 이 세계를 모르는 자들과 나를 분리하고,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들과 어울리면서도 미세한 차이를 발견해 ‘나의 세계’를 건축한다. ‘일상의 나’와 ‘덕질하는 나’ 사이에 괴리가 있음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밖에서 보면 (어쩌면) 한심하지만 그것이 나다. 정신과 의사와 만나 해결할 일을, 안온한 취미의 정원에서 쾌락과 분쟁의 형태로 처리하기도 한다. 남들은 몰라주는, 그래서 좋은 세계.



이다혜 | 작가, 북칼럼리스트. 책과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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