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고백서사의 만화 <만화 9급 공무원>이 던지는 질문
by 박인하
2018-04-05 17:56:00
초기화

2018년 04월 05일 작성된 글입니다.



때론 익명으로 네트를 부유하던 ‘공무원 만화’가 sepia 작가의 <만화 9급 공무원>이란 책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이 만화의 원본은 디씨인사이드 카툰연재갤러리이지만,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과 블로그, 심지어 개인방송으로 더빙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들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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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웹툰들이 ‘자기고백서사’를 갖고 있다. 웹툰이 포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기 이전으로 돌아가보자.

시대는 대략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걸쳐있다. IMF 이후 초고속통신망이 보급되고 IT벤처붐 속에 디지털 만화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N4, 코믹스투데이, 코믹플러스 등 디지털 만화 서비스가 등장했다. 기존 출판만화를 스캔해 서비스하는 만화방 서비스와 신작 만화를 연재하는 웹진 서비스를 병행했다. (후에는 만화방 서비스만 남았다.)

한편 같은 시기 <스노우캣>(권윤주)처럼 개인 홈페이지나 게시판 등에 자유롭게 연재되는 만화나 <광수생각>(박광수)이나 <아색기가>(양영순)처럼 종이신문에 연재되었다 디지털화된 만화가 인터넷에 활발하게 공유되었다. <스노우캣>, <광수생각>을 비롯해 <마린블루스>(정철연), <파페포포메모리즈>(심승현) 등 초기 웹툰은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 개인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들은 페이지와 칸이라는 가장 엄격한 만화의 형식 대신 윌 아이스너가 정의한 '연속예술(Sequential Art')의 기본만 활용했다. 출판만화의 엄격한 제약이 사라지고, 정규 매체가 아닌 홈페이지나 게시판 등에서 아주 간편하게 공유되며 웹툰의 ‘개인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인터넷 사용자들은 ‘매체’라는 매개 없이 웹에서 작품과 직접 대면했다. 독자들은 작가 개인의 이야기를 꾸며낸 가상의 서사가 아니라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감추어 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는 말”(네이버 사전)인 ‘고백’으로 받아들였다.

자기고백서사는 이후 ‘일상툰’, ‘생활툰’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포털 웹툰 코너에 자리 잡았다. 특히 네이버 웹툰은 심윤수 작가의 <골방환상곡>(2005), 서나래 작가의 <낢이 사는 이야기>(2007)처럼 초창기 일상툰으로 포털 사용자들에게 다가갔다. 일상툰을 그리는 작가들은 웹툰이 진짜 내 이야기라는 걸 드러내기 위해 작가를 상징하는 되도록이면 간락한 캐릭터를 만들고, 속마음을 털어놓는 나레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독자들은 일상툰에서 자기 이야기를 찾아냈고,  공감했으며, 댓글을 달고, 링크를 공유했다.

초창기 웹툰 정착에 기여한 일상툰의 자기고백서사는 서사만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웹툰은 (1)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2)친근한 주인공이 (3)나레이션을 통해 속 마음을 드러내는 스토리텔링기법을 주로 활용하게 되었다. 


자기고백서사는 일상툰과 서사웹툰을 거쳐 인터넷 커뮤니티 특유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소통방식과 만난다. ‘짤방’이라 불리는 이미지는 원본을 재맥락화(recontextualization, 원본 이미지의 맥락과 다른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다른 방식으로 활용)한다. 짤방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몇 개의 아주 간략한 이미지를 활용해 이야기하는 방식이 등장했다. 그림의 완성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화제가 된 작품은 엉덩국 작가의 만화다. 그림판에 마우스로 그린 정도의 그림에 일반적인 서사를 전복시킨 만화로 화제가 되었다. (정규 플랫폼에 연재되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일반화된 이미지를 활용한 소통은 만화에서 그림에 대한 부담을 지워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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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동안 만화는 그림으로 받아들여졌다. 만화의 완성도도 잘 그린 그림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스콧 맥클라우드는 <만화의 이해>에서 탁월한 소설가와 화가가 만나 좋은 만화를 창작할 수 없다고 단언하지만, 많은 만화 독자들에게 잘 그린 그림은 포기하기 어려운 만화의 기본 요소였다. 



Scott McCloud’s, “The Big Triangle”


스콧 맥클라우드는 만화의 재료가 되는 빅 트라이앵글에 사실적인 작화에서 상징적인 작화까지 폭넓은 사례를 배치했다. 사람의 얼굴을 예시로 가장 왼쪽에는 사실적인 사람의 이미지를 놓고, 가장 오른쪽에는 스마일 마크를 놓았다. 그 바로 옆에 있는 만화, 즉 만화 중에서는 가장 오른쪽에 있는 만화의 사례로 매트 피젤(Matt Feazell)의 <시니컬맨(Cynicalman)>이 소개되었다. 



75번 : Matt Feazell's Cynicalman


일반적인 북미 만화 스타일로 만화출판사와 작업을 해 만화책을 내기도 한 매트 피젤은 자가 출판을 통해 <시니컬맨>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다. 매트 피젤은 의도적으로 동그라미와 작대기로 구성된 스틱 피규어(stick figure)를 활용해 만화를 만든다.

아예 그림을 안 그리는 작가도 있다. 데이비드 레스(David Rees)는 무료로 제공되는 클립아트로 만화를 ‘편집’한다. 자신의 프로젝트 사이트에 연재 중인 <겟 유어 워 온(get your war on)>은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다.



Matt Feazell's Cynicalman(출처 : http://www.cynicalman.com/)


만화는 스토리, 그림, 연출의 영역이 존재하는데, 작가의 선택에 의해 스토리, 그림, 연출의 비중이 조합된다. 스토리에 방점을 찍는 작가가 있고, 그림에 방점을 찍는 작가도 있으며, 연출에 방점을 찍기도 한다. 매트 피젤이나 데이비드 레스처럼 의도적으로 그림의 완성도를 흔들기도 한다. 서구의 ‘못 그린’ 만화들은 의도성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한국의 ‘못 그린’ 만화는 인터넷 소통의 방식으로 등장했다. 


의도적이건, 아니건 인터넷 게시판에 발표, 공유된 못 그린 만화도 작가와 독자들에게는 웹툰의 하나였다. 작가와 독자는 웹툰에서 자기고백서사를 보기 원했다.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은 빠른 속도로 당대의 이슈를 만화로 만들었다. 선화로 간단하게 그린 이미지를 반복사용해도 이의를 제기하는 독자들은 없었다. 게시판에 글로 올린 사연을 읽듯 독자들은 선화로 간단하게 그린 웹툰을 소비했다.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되는 시각정보가 많은 쪽 보다는 아주 간단하게 반복되는 선화는 상대적으로 서사에 집중하게 만들어준다. 여기에 자기고백이 더해지면 서사는 이성을 건너 뛰고 감정에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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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익명으로 네트를 부유하던 ‘공무원 만화’가 sepia 작가의 <만화 9급 공무원>이란 책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이 만화의 원본은 디씨인사이드 카툰연재갤러리이지만,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과 블로그, 심지어 개인방송으로 더빙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들과 만났다. 


총 7화로 구성된 <만화 9급 공무원>은 익명의 주인공이 지방대를 나와 3년 째 취업준비생으로 있다가 스물아홉에 9급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한다는 이야기다. 주인공의 이름은 익명으로 처리되었지만 독자들은 <9급 공무원>을 허구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아니어서 다행인 누군가의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만화 9급 공무원


9급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노량진에 들어간 주인공. 주인공의 동선을 따라 노량진 속 공시생들의 일상을, 그리고 그 안에서 주인공이 낭비한 시간을 빠르게 따라가던 독자는 마침내 주인공이 착취한 모성에 도달한다. 이 지점에서 다큐멘터리인 줄 알았던 만화는 픽션이 된다. 다큐멘터리인줄 알았던 만화는 신파로 나간다. 


“~했더라면”의 자학과 멈추지 않는 눈물의 후회에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감정 상태가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고통과 슬픔이 극대화되고, 주인공은 모든 문제를 자기 탓으로 돌린다. '자기 탓'은 대중문화에서 사랑받는 신파의 정서로 통곡이나 분노 같은 감정해소로 마무리된다. 


한국만화는 1983년 이현세 작가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통해 자학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캐릭터들의 등장으로 이전 만화의 신파성을 극복했다. 일상툰으로 대표되는 웹툰의 자기고백서사도 다양한 감정의 공감을 기반으로 하지 고통과 슬픔이 극대화되어 마침내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리는 신파의 감정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런데 2016년 커뮤니티 게시판과 블로그에 연재된 <만화 9급 공무원>은 모든 불행을 자기 탓으로 돌린다.

 

허구의 신파라면 통곡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의 해소로 끝날 터이지만, <만화 9급 공무원>은 작가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자기고백서사의 만화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이런 인간 쓰레기가 문제야, 라고 게시판을 나가거나 책을 덮어도 주인공의 문제는 뫼비우스 띠처럼 돌아 내 이야기로 다가온다.

자기고백의 괴로움은 독자에게 양갈래 길을 선택하게 한다.신파의 카타르시스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문제와 마주하고 질문을 던질 것인가. 후자의 질문은 이렇다. "청년 세대가 처한 절망스러운 현실은 과연 정당한 건가?" (박인하 / 만화평론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교수) 



만화 9급 공무원



만화 9급 공무원



만화 9급 공무원


*단행본 <만화 9급 공무원>에 해설로 작성한 비평입니다. 책에 실린 글과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기획자, 스토리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1995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만화평론으로 당선되며 만화평론가로 활동했다.
90년대 sicaf 큐레이터, 기획팀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청강만화역사박물관, bicof, 2003 2013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 한국만화특별전 및 광저우만화페스티벌, 프랑크푸르트 북페어 등의 행사에도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신문, 잡지, 방송 등 다양한 매체에 만화평론을 기고했으며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사)한국만화가협회 등과 함께 만화와 관련된 연구를 시행했다. 주요저서로 『만화를 위한 책』, 『누가 캔디를 모함했나』, 『골방에서 만난 천국』, 『펜끝기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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