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과 살인마가 당황스러운 만화 <사컷: 죽음의 소리>
공포란 내일 밤 12시에 나타나기로 예정된 귀신 알바가 아니다. 오늘 저녁 귀갓길을 막아선 모르는 아저씨 같은 것이다. 공포는 준비된 사람의 몫이 아니다. 예측할 수 없는 일과 정보의 부재가 손을 잡을 때, 공포는 다가온다.
두려움을 주겠다고 야심차게 선포한 다음 웹툰 <사컷 죽음의 소리>는 이런 면에서 본다면 기획부터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공포 만화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거나 긴장감이 최고조로 올랐을 때 가장 소름 돋는 연출로 비명을 유도해야 하지만, 4컷 만화기 때문에 예측할 수 있는 순간에, 긴장감이 생길 새도 없이 무서운 그림을 보여주며 웃음을 유도한다. 물론 짧은 순간 치고 빠지기에 가볍게 볼 수 있는 웹툰과 어울린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매 3컷 다음엔 귀신이 나온다고 알려주는 공포물이 가지는 한계는 빤한 것이다. 1분 전에 시계를 확인했다면 알람에 놀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공포는 사하라 사막에서 발레복 아저씨가 나타나서 죽어! 라고 외치면 생기는 게 아니다. 독자가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해야 비로소 두려움이 생겨난다. B급 호러 무비에서 배경 설명을 하는 이유는 찍다가 촬영비가 남아서가 아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저 살인마가 왜 사람을 죽이는지 모르면 정말로 집중이 안 되기 때문이다. 시즌 1이 끝난 <4컷 죽음의 소리>가 무섭지 않다는 평을 받는 이유는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매 화마다 교회 전도사처럼 나타나는 스토커와 살인마, 귀신은 그 비주얼 탓에 놀랄 수는 있겠지만, 어째서 그 캐릭터가 나타나는지 이해시키는 데에 4컷은 비좁다. 더 무서울 수 있는 장면들이 단발적인 감정만 터뜨리기에 놀라면서도 아쉽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충분히 무서울만한 작화와 연출력을 가졌지만 네 컷이라는 형태를 선택한 것이 무리였을까. 무리하게 내용을 압축하다보니 억지가 생기고, 뜬금없는 전개가 튀어나오곤 해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어떤 작가들은 귀신 얼굴을 냅다 던지는 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공포는 무서워서 놀라는 것이지 놀라서 무서운 게 아니다. 병아리 시체를 던져 놓는다고, 갑자기 돼지 껍데기가 여자 피부로 변한다고 해서 무서운 게 아닌 것이다. 작가들은 병아리 시체를 던지기 전에 저기 있는 검은 점이 시체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먼저 안겨줄 필요가 있다.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살인마 보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골목길과 질질 끄는 발소리에 더 집중하자. 깜빡이는 조명과 어디선가 들리는 바람소리, 그리고 주인공의 식은땀과 긴장감에 더 집중하자. 4컷으로 보여주기는 모자라다. 긴장할 새도 없이 충격을 주는 작품의 결과는 그야말로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