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웹툰 원작 로망 포르노를 소망하다
어느 쪽이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BL알못’에 가까운 사람이다. 십대시절 <바나나피쉬>나 <브론즈> <그라비테이션> 같은 작품을 탐독하며 무궁무진하게 상상력을 발휘해 연습장에 끄적끄적 ‘야오이’ 소설을 써봤지만 금방 흥미를 잃었고, 성인이 된 이후 긴 공백이 있다가 나카무라 아스미코의 극히 탐미적인 작화에 이끌려 <동급생> <졸업생> 시리즈나 <J의 모든 것>을 읽었다(나카무라 아스미코의 작품은 후죠시의 영역 밖에서도 널리 읽히고 있다). 만화연구가인 시바우치님이 ‘타가메 겐고로’의 작품세계에 관해 쓴 글에 충격 받고 BL의 드넓은 지평에 대해 감탄했을 뿐이니까. 그럼에도, 가끔은 아니 실은 종종 남성들의 성적 환상과 로망과 욕망(까지도)을 충족시켜주는 에로영화처럼 보이즈 러브를 좋아하는 여성들의 취향에 맞는 영상 콘텐츠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름도 붙여봤다. ‘BL 로망 포르노’ 라고.
나카무라 아스미코의 <동급생>
사실 이 제멋대로인 이름은 표절이다. ‘로망 포르노’라는 널리 알려진 명칭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 일본의 닛카츠 영화사가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생산한 에로영화를 가리키는 말인데, 메이저 영화를 만들다 영광의 시절은 저물고, 파산 직전에 몰린 닛카츠가 선택한 돌파구다. 저예산 대량생산 방식으로 로망 포르노를 만들며 회사는 기사회생했고, 많은 영화감독들의 입봉에 기여했다. 정해진 예산, 정해진 러닝타임 안에 정해진 횟수(?)나 시간(?) 만큼의 정사 신만 나오면 기타 연출이나 시나리오는 전적으로 감독에게 맡겼는데, 그 덕에 갓 영화판에 들어온 감독들이 온갖 영화적 기법과 이야기를 실험할 수 있는 장이 열렸다. ‘포르노’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AV같은 적나라한 노출과 성행위가 나오는 건 아니었다고. 오히려 ‘로망’이란 단어에 초점을 맞추는 게 나을 것 같다. 규정 안에서 마음껏 실험정신을 발휘해 만들었던 로망 포르노는 알다시피 남성을 고객층으로 만들었지만 ‘BL 로망 포르노’는 보다 다양한 관객층을 확보할 수 있는 장르가 될 것이라 망상을 펼쳐본다.
LGBT에 대한 지지를 보내는 해시태그로 많이 쓰이는 ‘#LoveWins’를 떠올려보자. 그래,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간섭받지 않고 생활로서 향유할 권리가 우리 모두에게는, 있다. BL 로망 포르노 또한 어떤 주제든 윤리적, 법적 위반 사항이 아닌 이상 존재함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환상과 로망과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거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박지연 <모멘텀>, 이해민 <구룡특급>, 영하/박담 < Fools >, 김사장 <스탠바이베어>
그럼, 어떤 작품들을 가장 먼저 스크린에서 만나보면 좋을까. (BL알못의 순수한 관점에서) 박지연 작가가 레진코믹스에서 연재 중인 <모멘텀>은 배우 캐스팅이 쉽지 않겠지만 일단 성사가 된다면 마치 톰 포드의 <싱글맨>처럼 강박적이리만큼 단정하고 서늘한, 비애감 있는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 코미카에서 인기리에 연재 중인 < Fools >는 아주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설레고 실망하며 파닥거리는 첫사랑의 심리묘사를 잘 드러낸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이해민 작가의 <구룡특급>은 절제의 미가 돋보이는 원작의 틀을 부수고 오히려 수위를 높게 만들어 홍콩의 습도와 야경에 어울리는 로망 포르노로 단장하면 좋을 것 같다. 까툰에서 김사장이 연재 중인 <스탠바이베어>의 아기자기한 로맨스 또한 영상으로 꼭 만나보고 싶은 작품.
많은 웹툰 플랫폼을 산티아고의 순례자 마냥 묵묵히(코인을 바치며) 걸으며, 오늘도 BL 로망 포르노 출시에 대한 소망을 상상으로나마 풀어본다. 언젠가 한 후배가 “영화 <매직마이크>는 3D가 아닌 10D(!!) 쯤으로 보고 싶어요!”라고 외쳤다. 그것은 소망과 선언이 담긴 메시지였다. 다채로운 문화콘텐츠 산업의 부흥으로 모두가 ‘취존’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그러니 나도 BL 로망 포르노를 꾹꾹 눌러쓰며 “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전 우주가 나서서 다 같이 도와준다.”는 나랏님의 희망적인 발언을 되새겨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