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영원한 빛>
다음 웹툰에 연재 중인 이상록 작가의 <영원한 빛> 썸네일 이미지
“좀 추상적으로 뭉뚱그려서 말하자면, 밝은 빛입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히 내리쬐는 빛.”
(출처: 시각문학 0호, 이상록 작가 인터뷰 중에서 - http://graphiclogue.com/?p=3061)
일단 읽어보면 나를 비춰줄 웹툰, <영원한 빛>
다음웹툰에서 연재 중인 이상록작가의 <영원한 빛>은 작화와 이야기의 흐름이 여느 웹툰과 다르다. 많은 작화의 개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스토리 초반의 모호함과 장르의 혼합은 독자들이 쉽게 <영원한 빛>을 읽기에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진입장벽이 높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단 높은 진입장벽을 뚫고 계속 정진하다보면 이 웹툰만의 매력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워진다. 제목인 ‘영원한 빛’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은 채 이야기의 흐름에서 추적해나가야 해서 더욱 그렇다.
박종희의 그때는 몰랐던 삶
<영원한 빛> 시즌 1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박종희의 삶에 포커싱하고 있다. 박종희는 현실을 살고 있지만 가치관과 행동은 현실과 동떨어져 무기력한 모습이며 허세 가득한 백수이다. 형편없어 보이는 박종희에게 과분하게 느껴지는 주변인물들은 박종희의 곁에서 그를 보호하고 있으며, 이는 어둠과 빛의 대조처럼 다가온다. 박종희에게 유일한 빛으로 존재하는 주변인물들은 가장 큰 빛이었던 어머니의 죽음으로 멀어져가고 박종희는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박종희는 몰랐다. 어머니의 병, 어머니의 사랑, 친구의 위안, 보살핌들이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을.
기형적인 유토피아에 환생한 박종희, 2214년의 죠니
박종희는 스스로 택한 죽음으로 인해 수많은 생물로 환생을 거듭하면서도 전생을 기억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 무려 200여 년에 걸친 윤회를 거치며 스웨덴의 한 마을에 꼬마로 살아가는 23세기의 박종희, 죠니는 기형적일 정도의 평화로 유지되는 유토피아가 이상하다. 과학기술은 진보한 듯 보이나 생활은 200년 전보다 나아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죠니가 살고 있는 2214년이 불완전한 유토피아는 네피림이란 존재에 의해 가해진 불분명한 기준의 악의 처단으로 만들어진 평화이다.
다음웹툰 이상록작가의 <영원한 빛> 2부 14화 중에서
- 미지의 존재인 네피림은 2214년의 통합정부 의원 페터에게 인간이 궁금해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주의 순환을 말하는 네피림
그러나 네피림은 불분명한 기준이 아니라 인간이 세운 질서가 아니었을 뿐, 대우주의 법칙과 질서에 따라 지구의 자멸을 막은 것이라 설명한다. 인간의 문명이 ‘인류 전체적인 인성의 혁신 없이 기술, 자본만 극단적을 커져버렸’기에 우주의 질서를 역행하는 일이 생겨버린 탓으로 이 질서를 회복하고자 네피림들이 강림했다는 것이다. 네피림들의 말로 박종희를 이해해본다면, 박종희는 전 인류가 인성의 혁신 없이 기술의 발전만 도모했기에 생겨날 수밖에 없는 인간군상의 한 단면이다.
우주의 질서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인간이 이룩한 문명은 자연과 대립하여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인간만의 질서라 할 수 있다. 이 논리로 인간 문명을 바라보면 인간은 자연과의 공존보다는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자만이 만들어낸 결과로 수많은 폭력을 자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원한 빛>에서는 네피림들이 인간 세계의 평화를 강제했다. 그들은 곧 존재를 감추고 사라질 것이며, 인간들이 스스로 우주의 질서에 맞는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전한다. 과연 인간은 네피림의 말대로 우주의 질서를 이룰 수 있을까? 그들이 말하는 우주의 질서는 무엇일까? 우주의 질서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필요한 그 무엇이 ‘누구에게나 공평히 내리쬐는 빛’ 아닐까?
홍난지(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