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마블- 원펀우먼의 탄생
다양한 인물과 배경과 서사를 다룬 영화가 더 많이 나오길 바라지만, 그런 영화라도 재미없으면 선뜻 지지하기 어렵다. 캡틴마블은 히어로물의 지평을 넓히면서도 ‘재미’가 있다. 물론 재미라는 건 상대적이다. 아래는 내가 왜 <캡틴마블>을 재밌게 보았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스포일러를 포함할 수밖에 없으므로, 아직 영화를 안 본 사람이나 볼 생각이 없는 사람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다음부터는 보지 않는 편이 좋겠다.
▲<캡틴마블>의 스크럴 종족
나는 <캡틴마블>에 반전이 있다는 걸 모르고 봤다. 주인공이 속한 집단이 스크럴 종족을 악당들이라 말하니 그런가보다, 하고 의심 없이 봤다. 종족의 생김새가 ‘악당스럽게’ 그려지기도 했다. 중후반부 밝혀진 사실은 그들이 억울하게 박해받는 집단이었다는 것. 편견에 기대 쉽게 판단하는 행태에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의도를 가지고 구성된 플롯으로 보인다. 투박하게 던지기는 해도, 현대사회에 필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창작자의 의도가 전달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반전에 대한 정보 없이 보면 좋겠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조금씩 정보를 모아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은 꽤 흡인력 있었다. 그 과정을 함께하는 닉 퓨리는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주인공에 관한 핵심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 직장동료이자 친구였다는 점도 좋았다. 가족의 비밀 같은 거 다루며 즙을 짜내려 했으면 식상하다고 느꼈을 것 같다. <캡틴마블>에는 로맨스도 없다. <캡틴마블>은 새로운 동료와 싹트는 동지애, 사회적 압력을 함께 버틴 옛 동료들과의 우정·연대만으로도 장편영화를 흥미롭게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영화 <캡틴마블> 포스터
경쟁사의 여성히어로 영화라는 점에서 비교되는 <원더우먼> 보다 <캡틴마블>이 진전됐다고 느껴지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원더우먼>에서 (크리스 파인은 물론 잘생겨서 보기 좋았지만, 그가 분한 스티브도 매력 있는 캐릭터였지만) 중후반부에 사랑 타령하는 통에 이야기가 늘어진다. 게다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둘의 관계를 너무 중요하고 절절하게 그리니 영화가 구식으로 보였다. 개인적으로 <캡틴마블>의 산뜻함이 2019년에 좀 더 어울리는 정서라고 생각한다.
슈트도 원더우먼 보다 캡틴마블의 것이 더 합리적이다. 히어로의 슈트는 신체를 보호해주고 능력을 배가시켜야 하지 않을까? 원더우먼의 경우 맨살이 50% 이상 드러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쳐맞거나 바닥에 쓸릴 때 드러난 맨살에 타격이 클 텐데 아무리 메타휴먼이라지만 쓰리고 아프지 않을까? 누구 좋으라고 입는 건지? 보는 사람 좋으라고? 캡틴마블의 슈트는 전신을 보호할 수 있게 디자인 됐고 우주에서 버틸 수 있게끔 하는 헬멧이 내장됐으며 그밖에도 통신기능, 번역기능 등 다양한 기능을 갖췄다. 기능을 강조한 의상을 입힌 것은 여성 히어로가 관습적으로 ‘눈요기’ 거리 되는 일을 방지하고자 한 의도일 것이다. 싸우는 여성을 그리는 국내 작품들도 염두에 두면 좋은 지점이라 생각한다.
지루한 부분도 있긴 했다. 지하철안팎에서의 액션씬이 그러했다. 할머니로 분한 스크럴과 싸울 때까지는 흥미로웠다. 그 뒤부터는 불필요하게 길고 반복적이라 느꼈다. 감동을 유발하기 위해 연출한 의도가 분명하게 느껴진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주인공을 그린 씬도 아쉬웠다. 연출도 좀 뻔했지만, 예고편에서 미리 그 장면을 보여준 탓이 크다. 성장과정에서 연거푸 넘어진 주인공의 모습을 볼 때 예고편에서 본 그 다음 장면이 미리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해당 장면이 정말 예상대로 나오자 감동 보다는 실소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예비 관객의 흥미를 불어 일으키면서도 본편 감상의 감동을 해치지 않는 예고편이면 더 좋았겠다는 영화 외적 아쉬움을 품게 된다.
▲애니메이션 <원펀맨>
아무튼, 다시 일어난 주인공은 스스로가 누군지 알게 된다. 세상이 한계라고 자기 앞에 그어놓은 선을 넘어온 의지 있고 강인한 여성이었고, 직업윤리 투철한 전문직업인이었다. 그녀는 다시금 한계를 넘고 강해져 원펀맨...아니 우먼이 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최강자를 넘볼 만큼 강대한 히어로로 재탄생하는 순간은 가히 클라이맥스다. 하지만 너무 강해지니 그 뒤의 싸움들이 영 긴장감 없어져버렸다는 것이 함정.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더 긴박감 넘치고, 캐릭터의 특성이 두드러지는 액션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아쉬움을 달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