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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가 탈출한 세 가지 장소 - 그래픽노블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조경숙
| 2019-04-23 16:04
스무 살 즈음 나는 하루 다섯 시간 도서관 인문/사회과학실에서 반납한 책을 도로 제자리에 꽂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철학, 정치학, 사회학 등 숱한 책들을 제자리에 꽂아 넣으면서 '아 이 책은 언젠가 한번 읽어봐야지'하고 다짐했지만, 한바탕 책 꽂기가 끝나면 또 수십 권을 실은 책 수레가 도착했기 때문에 그 책들의 제목은 내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워졌다. 그러기를 반복하다가, 하루는 정말 읽고 싶다고 여겨진 책을 아예 제자리에 꽂지도 않고 빼놓았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히이만》이었다. 한나 아렌트와 그의 '악의 평범성' 자체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 읽은 적은 없었기에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아르바이트하는 수개월 동안 짬짬이 읽었지만(누군가 그 책을 찾을까 봐 책장 앞에서 읽었지만, 놀랍게도 아무도 그 책을 찾지 않았다.) 기껏해야 절반 정도 읽었을 뿐이었고, 결국 나는 그 책을 완독하지 못한 채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말았다.
그 이후로도 한나 아렌트를 읽고 싶다는 열망은 변함없었지만 그의 저작을 직접 읽기엔 엄두가 나지 않아 주로 주석서를 읽었다. 주석서를 통해 한나 아렌트의 사유를 아주 콩알만큼, 콩알의 반절 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의외의 질문이 들었다. 한나 아렌트는 어떤 계기로, 이렇게 다양한 경계를 넘나들며 지식을 쌓아냈을까? 이 해답은 의외로 만화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얼마 전 발표된 신간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주》에서였다.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표지 사진(출처: 더숲 출판사)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는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말년까지의 생애와 철학을 다룬 그래픽노블이다. 한나 아렌트라고 하면 대부분 하이데거의 연인이거나, 악의 평범성에 대해 떠올리는데 이 책은 아렌트에 관해 가십이 될 만한 부분을 과잉 표현하지 않고 적절한 수준으로 신중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책은 전반적으로 한나 아렌트의 삶과 철학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사려 깊게 배치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아렌트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철학을 쌓아가는지를 따라갈 수 있다.
알려지다시피 한나 아렌트는 제2차세계대전을 직접 경험한 유태인일 뿐만 아니라 수용소에 감금되기도 했다. 그 격동의 시대 속에서도 끈질지게 사유한 끝에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세상에 내놓았다. 만화는 수용소 안에서 어떤 생활이 이어졌는지 자세히 그리지 않지만, 아렌트는 그 안에서도 같이 수용된 사람들을 향해 인간의 존엄을 잃어선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기존의 이론들은 묵묵부답이었기에 나는 나의 덤불 속으로 돌아갔다. 벤야민이 어떻게 작은 세부사항을 붙들며 ‘진주를 캐려고 뛰어들었는지’ 떠올리며 심연의 근원을 추적하려 애썼다. 이런 잿더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철저히 집중해서 나치 독일뿐 아니라 스탈린의 러시아에서 어떤 지옥이 펼쳐졌는지 보여주는 로드맵과 경기 전략을 제시해야 했다.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니만큼 당연히도 이를 묘사할 단어는 없었다. 내가 단어를 만들어내야 했다. 지구상에서 새롭게 발생한 이 힘의 이름은…전체주의였다. (책 173쪽)
익히 알려진 것처럼 한나 아렌트는 두 번의 탈출을 감행했다. 한 번은 독일에서의 탈출, 다른 한번은 파리에서의 탈출이다.(이 가운데에는 수용소에서의 탈출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세 번의 탈출'을 다룬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나 아렌트는 어디에서 탈출했다는 것일까?
이 책의 초반에서 아렌트는 '세상을 이해할 단 하나의 진리'가 있다고 믿으며 철학에 입문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전체주의 연구에 이어 출간한 《인간의 조건》에서 한나 아렌트는 세상이 단일한 진리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의 조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다원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세 번째 탈출이 이루어지는 곳은 바로 여기, '단 하나의 진리를 찾겠다는 욕망'이다. 이 만화는 두 번째 탈출까지 이어지는 아렌트의 삶과 대화들을 통해 이윽고 아렌트가 '세 번째 탈출'에 이르는 과정을 독자에게 훌륭하게 이해시킨다. 여기에 더해 마지막 에필로그는 화룡점정을 찍는다.
즉, 세상에서 우리를 이끌어 줄 유일한 진리나 이해를 위한 묘책 같은 건 없다. 영광스럽고 결코 끝나지 않는 난장판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위한 끝없는 난장판 말이다.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93쪽
사실 이 책의 장점은 이 외에도 굉장히 많다. 한나 아렌트의 머리카락을 그가 줄곧 피워대던 담배 연기와 비슷한 선으로 그린 것이나, 발터 벤야민과 한나 아렌트의 대화를 주요하게 포착한 것 역시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장면은, 발터 벤야민이 한나 아렌트에게 건넨 〈역사철학테제〉 원고를 블뤼허와 하루종일 읽고 또 읽었다는 대목이었다.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 는 아렌트에게도 잘 읽히지 않는 글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