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의 각도] 홍자 작가 인터뷰
화제의 작가를 만나다
vol. 75
[연필의 각도]
홍자 작가 | 레진코믹스
‘연필의 각도’를 그린 홍자 작가의 작품을 읽다 보면
수채화로 얼룩진 옛날 일기장을 들춰보는 기분이 든다.
다양하고 입체적인 감정과 관계를 고스란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적은 고백과 반성들.
무슨 이야기인지 아리송하다면 홍자 작가의 인터뷰를 읽어 보시라.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고 다듬은 그의 문장에서
그 누구도 상처 주지 않겠다는 작가의 세심함을 엿볼 수 있었다.
몸풀기 토크
▲ 홍자 작가님 작업 사진
Q. 안녕하세요, 작가님.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레진코믹스에서 금요일마다 <연필의 각도>라는 만화를 연재 중인 홍자라고 합니다.
Q. 인터뷰는 처음이라고 하셨는데, 소감이 어떠세요?
인터뷰는 경력이 많거나 유명한 작가들만 하는 거라는 인식이 있어서 처음 인터뷰 제안이 들어왔을 땐 '엥, 저요?' 싶었습니다. 인터뷰라는 좋은 기회를 제안해 주신 웹툰 가이드 측에 다시 한번 감사 인사드립니다.
Q. 베도에서 시작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웹툰 작가로 데뷔하기까지의 과정을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무척 평범합니다. 원래 꿈이 만화가였고 '몇 살 안엔 데뷔해야지~' 하는 막연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나이에 가까워질 즈음 적당히 돈을 모은 뒤 바로 작품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연필의 각도
Q. 고등학생 해인이가 대학생 보조 교사 한영이를 짝사랑하는 풋풋함이 너무 사랑스러워요. 어떤 계기로 이런 컨셉을 기획하게 되셨나요?
사실 저는 해인이가 한영이에게 갖는 감정이 짝사랑이라고 확정 지어 그리진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나이 차이 때문에 두 인물의 관계가 로맨스로만 해석되면 읽기에 불쾌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의도적으로 짝사랑인 듯 어른에 대한 동경인 듯 연출하고 있어요. 때문에 독자의 경험에 따라 해인이가 바라보는 한영이는 학창 시절에 남몰래 좋아한 선생님으로도, 동경하고 친해지고 싶은 젊은 선생님으로도 보일 수 있겠습니다.
지금의 컨셉이 나오기 전 <연필의 각도>는 원래 해인이가 단독 주연인 성장물이었으나, 여러 이유로 주변 인물을 하나 둘 늘리다 보니 약간의 로맨스 요소와 함께 한영이와 은현이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초기 설정 중 해인이가 보조 강사, 반대로 한영이가 학생인 버전도 있었습니다만 스무 살을 앞둔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어 지금의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주인공들이 입시 지옥에 빠져 조금 미안합니다.
이외에도 주인공이 임은여인 버전의 <연필의 각도>도 있었는데 이대로 연재를 했다면 만화가 무척 시끄러웠을 것 같군요.
Q. 작업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는다면 어떤 장면인가요?
몇 주 전만 해도 기억에 남는 씬들이 많았는데 104화를 작업하면서 다 잊어버렸습니다. 104화만큼 강렬한 기억을 선사할 회 차는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한 인물의 에피소드를 마무리하는 중요한 내용이었고, 평소보다 분량도 많았는데 작업 도중 완성한 파일을 두 차례나 날렸기 때문이죠. 상희와 승하의 변화가 돋보이는 편이었던 만큼 원고 편집에 신경을 더 썼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 두 친구에게 많이 미안합니다. 104화를 읽고 어딘가 촉촉한 기분이 드신다면 그건 제 땀과 눈물이 스며든 탓입니다.
이외에도 홍승하의 과거 에피소드, 65화에서 은여가 미술실을 떠나는 장면, 늘 감정을 억누르고 지내온 해인이가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던 63화, 그리고 1화의 버스 씬이 기억에 남습니다.
Q. 저는 해인이한테 가장 애착이 갔어요. 소심하고 생각 많은 게 꼭 저를 보는 것 같았거든요. 작가님께서는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이 가는 인물이 있으신요?
도전 만화 시절엔 박상희 캐릭터한테 정을 꽤 많이 줬었는데 정식 연재 후 모든 인물을 매주 그리다 보니 그 누구도 좋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반은… 농담이구요, 작업하는 입장에선 원미연과 임은여 캐릭터가 그리기 즐거워 좋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는 임은여한테 마음이 갑니다.
특히 은여는 제가 미안한 게 많습니다. 해인이와 은여가 싸운 에피소드에서 해인이는 상희나 한영이에게 위로를 받는 방식으로 갈등을 헤쳐 나간 반면, 은여는 반 친구들에게 태도를 지적 받는 방식으로 갈등을 헤쳐 나간 것 같아서요. 밸런스가 맞는 중립적인 전개를 했어야 했는데 연재할 당시에도 아차, 싶더니 계속해서 생각이 납니다.
Q. 한영이는 스킨십에 둔감한 편인가요? 해인이 손에 묻은 물감을 닦아주는 장면은 스킨십이 진했거든요. (다리를 완전히 포갰던데요…>//<)
2화의 한 장면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저는 제 만화 정주행을 잘 안 하는 편인데 이 질문을 보고 놀라서 2화를 보고 왔습니다. 문제의(?) 그 장면은 한영이가 정말로 미안하고 놀란 마음에 해인이의 손을 멋대로 가져간 것입니다. 한영이는 오히려 성격상 스킨십에 둔하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것 같습니다. 자칫하다간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Q. 은현이가 해인이에게 “알아서 뭐하시개” 라고 문자하는 장면에서 피식했어요. 은현이는 맞춤법을 잘 모른다는 설정인가요?
이 부분도 슬픈 오해입니다. 문자 말투에서도 캐릭터의 성격이 잘 보였으면 해서 개그 씬으로 넣은 장면이었습니다. 해인이에게 서운한 티를 내고 싶지만 그렇다고 대화 분위기가 진지해지는 건 싫은,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의도적인 오타일 겁니다. 만약 은현이가 맞춤법을 잘 모르는 친구였다면 은여가 옳다구나, 하고 놀리고 다녔을 것 같군요.
Q. 캐릭터 설정하실 때 특별히 영감을 받았던 인물이나 사건이 있나요? 있다면 살짝 귀띔해주세요.
주연 중엔 없고요, 해인이와 은여의 반 친구로 나오는 '김소예’ 라는 캐릭터만 제 친구를 조금 참고했습니다. 소예의 모델이 되는 분은 실제로도 친구끼리 싸우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상황을 중재하는 성격입니다.
Q. 전체 스토리 구상은 미리 해 놓으시나요? 즉흥적으로 수정하신 부분도 있었나요?
이야기의 큰 사건과 설정만 미리 정해두고 그 사이를 이어 나가는 부분은 그때그때 분위기에 따라 전개해 그리고 있습니다. 해인이의 친구 중 원미연이라는 인물도 원래는 예정에 없었는데 어느 날 등장하더니 지금까지 쭉 출연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작품부터는 이런 식의 분위기를 타 전개하는 방식으론 작업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Q. 소재가 고갈되거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땐 어떻게 돌파구를 찾으시나요?
콘티 단계에서 자주 겪는 일인데 이럴 땐 무조건 밖으로 나갑니다. 카페든 어디든 들어가 집과 다른 환경 속에서 다시 한번 스토리를 짜곤 합니다만, ‘마감 기간’이 있으면 어떻게든 결과물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제 마음에 드느냐, 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Q. 감정 묘사를 하는 센스가 탁월하다고 생각했어요. 대사도 그렇지만, 어색할 때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장면을 따로 추가하시는 그런 센스요. 감정 묘사에 특별히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신가요?
많이 신경을 쓴다기보단 개인적인 규칙이나 틀을 정해두고 그에 맞춰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성별/나이에 이런 성격을 가진 인물이 이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낄지,
다른 인물과 같은 감정을 느껴도 이 캐릭터라면 어떻게 표현할지,
인물의 감정이 앞뒤가 맞아 논리적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이 세 개는 꼭 체크하며 작업하려고 노력합니다.
Q. 섣부른 추측과 편견, 타인에 대한 평가가 무례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해주는 장면들이 인상 깊었는데요, 그런 장면을 구상하시게 된 계기나 이유가 궁금해요.
상대방을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것, 보이는 모습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 그러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점점 왜곡되는 것. 분명 조심해야 하는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에서 쉽게 실수하는 부분이지요. 저도 그렇고요. 그래서 다른 주제보다도 공감을 많이 얻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주인공들의 전공이 하필 미술인 것도 이 주제와 일맥상통하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림은 대상을 제대로 관찰하고 왜곡 없이 묘사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Q. 나래이션이 굉장히 시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봄보다 4월이 먼저 왔네” 같은 표현이요. 이런 대사나 표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일기를 쓰신다거나, 문학을 즐겨 읽으신다거나 하는 팁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제가 학생 때 국어 지문을 자주 필사했었는데, 의외로 이게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까지도 도움되고 있습니다. 잘 정리된 문장을 눈으로 읽고 끝내는 것과 손으로 직접 옮겨 적는 건 많은 차이가 있더군요. 필사는 요즘에도 책을 읽을 때마다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독서는 많이는 아니지만 꾸준히 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일기는 써 본 적이 거의 없는데 한번 도전해 볼까 합니다.
마무리 토크
Q. 레진 코믹스에는 댓글 기능이 없어서 독자 반응을 바로 확인하기가 어렵잖아요. 주로 어떤 경로를 통해 독자 반응을 확인하시나요? 기억에 남는 코멘트가 있으신가요?
제가 구글링 같은 걸 잘 못해서 독자 반응은 주로 개인 블로그에 달리는 댓글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연재 초중반까진 꼬박꼬박 답글을 달아 드렸는데 요즘은 자주 못 달아 드려 죄송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늘 감상과 피드백, 조언을 남겨 주시는 분들께 감사한다는 말씀 슬쩍 드려 봅니다.
코멘트 중에서도 특정 캐릭터의 서사와 본인의 경험을 연관 지어 남긴 감상들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사람 냄새가 나는 만화를 그리고 싶었기 때문에 이렇게 현실 속 사람이 만화 속 인물을 자신, 혹은 지인처럼 여기며 이입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아, 내가 아주 못하고 있진 않구나' 싶습니다.
최근엔 상희와 승하의 이야기가 주가 되다 보니 두 친구와 비슷한 일을 겪은 분들의 감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내가 감히 이런 댓글을 받아도 되나, 부터 좀 더 만화 속 인물에게 책임감을 가져야겠다, 라는 다짐까지 많은 생각이 들더군요.
Q. 2017년부터 연재 시작하셔서 현재 기준으로 109화(무료회차 101화)까지 공개되었습니다. 완결까지는 어느정도 진행된 상태인가요?
대략 전체 이야기의 60~70% 정도는 진행됐습니다만, 연출 방법에 따라 남은 에피소드의 분량이 예상보다 길어질 수도, 역으로 짧아질 수도 있습니다. 종종 완결까지 몇 화가 남았는지/완결이 언제인지 질문을 받곤 하는데 저도 그 부분이 궁금합니다. 연초에 신년 목표로 ‘올해 안에 완결 내기’를 정해 두었는데 없던 일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Q. 차기작 계획을 묻기에 이른 감이 있으나, 그래도 대략적인 계획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혹은 언젠가 도전해보고 싶으신 장르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저는 만화를 그리는 동안 괴로웠던 것만큼 많이 행복했기 때문에 차기작은 최대한 빨리 시작하고 싶습니다. 당장의 차기작은 높은 확률로 캠퍼스 성장 드라마가 될 것 같습니다. 분위기는 지금보다 밝을 예정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길 고양이를 챙겨주는 주민과, 그런 주민과 고양이가 싫은 사람들의 대립을 스릴러 장르로 그려보고 싶습니다.
Q. 독자분들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마디 부탁드려요!
제 만화와 오랫동안 함께 해주신 분, 잠시 머물다 떠나신 분과 이따금 방문해주시는 분도, 또 마음 깊이 즐겨주시는 분이나 가볍게 즐겨 주시는 분 모두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라고, 매일이 즐거우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