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둥이 이야기> 윤필, 어른을 위한 고독한 동화
<검둥이 이야기> 윤필, 어른을 위한 고독한 동화
할아버지와 풍산개 흑태는 B612 행성에 사는 것만 같다. 어린왕자가 살던 아주 작은 별, 장미와 어린왕자 단 둘만이 살던 곳 말이다. B612 행성에서 어린왕자와 장미가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였듯, 백령도에 사는 할아버지와 흑태도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버팀목이다. <검둥이 이야기>는 소중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 빚어내는 고독을 어른의 동화로 버무려낸다.
강아지 흑태는 북녘이 고향인 할아버지와 단 둘이 고구마 농사를 지으며 북한에 가장 가까운 섬, 백령도에 산다. 바다 건너를 보며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던 할아버지는 결국 북에 남겨두고 온 어머니를 만나지 못한 채 숨을 거둔다. 자신을 밀렵꾼에게 판 돈으로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흑태는 할아버지의 유일한 가족을 찾는 여정에 나선다. 흑태는 밀렵꾼에게 ‘블랙’이란 이름을 얻어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개가 되기도 하고, 투견장으로 흘러들어가서는 ‘흑풍’이란 이름으로 도박판을 뒤흔드는 투견이 되기도 한다. 돈을 향한 인간의 추악한 탐욕을 맛 본 흑태는 모든 것을 뿌리치고 헐레벌떡 도시로 도망쳐 나온다. 그곳에서 만난 것이 일용직 노동자인 개 흰둥이와 할머니와 함께 사는 소녀 미래였다. 미래가 다시 붙여준 이름이 바로 ‘검둥이’다.
<검둥이 이야기>가 그리는 동화는 아름답지 않다. 우주에서 온 왕자가 미지의 행성을 하나씩 디뎌 가듯 낭만적인 여정이 아니다. 자신을 팔아 받은 돈으로 한걸음 내딛고, 다른 생명을 죽여 얻은 삶으로 다음 발걸음을 뗀다. 한없이 무겁고 비린 여정이다. 이 모든 것에 함께하는 것이 돈이다. 하지만 <검둥이 이야기>는 쉬이 ‘나쁜 것은 돈이다’라는 암시를 건네지 않는다. 오히려 말한다, ‘돈은 나쁘지 않다’고.
검둥이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것은 가난도, 죽음도, 좌절도 아닌 사람이었다. 화도 내지 않는, 눈물도 흘리지 않는 돈을 쥐고 있는 건 언제나 사람의 손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약속이었던 장례식을 치른 것과 병에 걸린 흰둥이를 살릴 수 있었던 것도 돈의 힘이었고, 검둥이가 야생동물을 닥치는 대로 잡거나 투견장에서 잔혹한 싸움을 이어나가야 했던 것도 돈 때문이었다. 돈으로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것도, 누군가의 삶을 부수는 것도 모두 할 수 있었다. 윤필 작가는 백령도를 나온 검둥이의 여로를 통해 담담하고 고요하게, 당연할지도 모르는 돈의 의미를 더듬어간다.
다른 별에서 지구로 온 어린왕자와 인간이 아닌 동물 검둥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다. 복잡하고 커다란 세상의 부조리를 알아채는 데 이만한 적임자도 없다. 생 텍쥐페리가 구현한 부서질 듯 가녀린 동심의 아름다움과 윤필 작가가 그린 현실의 묵직함은 세상을 관찰하는 거리감이라는 점에서 맞닿아있다. 당연할지도 모르는 삶의 흐름이 감춘 틈새를 깨닫는 것이, 소중한 사람을 위해 떠난 검둥이를 위해 우리가 그릴 수 있는 동화의 시작점일 것이다.
INTERVIEW
<검둥이 이야기>의 ‘2013 오늘의 우리 만화상’ 선정을 축하드립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많이 부족한 작가와 작품에 과분한 상을 주신 것 같아서 부끄럽습니다. 앞으로 더 잘 하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작업에 임하겠습니다.
블로그나 ‘루리웹’ ‘디시인사이드’ ‘디스이즈게임닷컴’에 그림을 올린 게 계기가 되어 데뷔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데뷔작 <흰둥이>를 ‘Daum 만화 속 세상’에서 연재하게 됐나요?
말씀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작품이 조금씩 알려졌어요. 그리고 주호민 작가(대표작 <신과 함께> <무한동력> <셋이서 쑥> 등)와 허지웅 평론가가 만화를 보고 블로그에 <야옹이와 흰둥이>를 추천해주셨습니다. 그 글을 통해 송래현 작가(대표작 <12월> <리턴> <스윗로드> 등)가 제 작품을 접했고 작가님의 당시 담당자이자 현재 Daum 만화 속 세상 편집장인 박정서 편집장에게 추천해주셔서 연재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흰둥이>를 연재한 이후로 <야옹이와 흰둥이> <거북아 거북아>(북미용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야기 내용에 따른 선택일 뿐,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11월부터 Daum 만화 속 세상에 연재를 시작한 <일진의 크기>(글 윤필, 그림 주명)나 출판사 창비와 진행 중인 작품은 사람이 주인공이기도 하고요.(웃음)
개인적으로 그림책을 좋아합니다. 그림책도 동물이 주인공인 경우가 상당히 많잖아요. 사람이 주인공일 때는 남녀노소, 개인에 따른 감정이입의 기복이 심하지만, 동물이 주인공이면 편견 없이 상황에 따라 감정이입하기에 좀 더 용이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동물을 주인공으로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작품을 보면 ‘걷’거나 ‘산책’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평소에 걸으면서 작품 구상을 하거나 사색하시나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도 즐겁지만, 아무래도 작품구상은 혼자 있는 시간에 잘 돼요. 특히 걷거나 운전 중일 때, 혹은 대중교통으로 이동 중일 때에 잘 되는 것 같아요.
이제 <검둥이 이야기>를 짚어보겠습니다. 검둥이는 주인에 따라 ‘흑태’ ‘블랙’ ‘흑풍’ ‘검둥이’라는 여러 이름을 갖습니다. 주인이 검둥이를 부르는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나요?
상대방을 부르는 이름과 별명에는 그 대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잘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검은 털을 가진 개이기에 ‘검다’라는 특징을 나타내면서도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성향을 조금이라도 묻어나게 하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 만난 흰둥이의 주인인 미래가 ‘검둥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생각합니다.
제목이 <‘검둥이’ 이야기>인 이유도 있을 겁니다. <흰둥이>의 사이드 스토리로 <검둥이 이야기>를 기획해 두 등장동물(?)을 만나게 한 것은 ‘흰둥이白’와 ‘검둥이黑’의 대비되는 삶을 강조하기 위함인가요? 흰둥이는 대사와 심리묘사가 전혀 없는 것에 비해 검둥이의 심리는 아주 세세하게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나요?
처음 시작은 <흰둥이> 세계관의 확장을 위해서 <검둥이 이야기>를 기획했습니다. 대비되는, 혹은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야기 진행 방식을 다르게 표현하기도 했고요. 앞으로 또 다른 형태의 캐릭터와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검둥이 이야기>의 후기에도 밝히셨듯이 이번 작품은 ‘돈’이 큰 주제입니다. 특별히 ‘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이유와 의도는 무엇인가요? 그래서 작중에서 신경 쓴 장면이나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보통 ‘돈이 원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개인적으로 돈이 좋거나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과 악, 그 이외의 다른 행위들을 할 때 돈은 행동에 힘을 실어주는 여러 조건중 하나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돈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과 행동이겠죠. 그래서 검둥이의 고통이 절정으로 치달은 투견 장면을 가장 신경 써서 그렸습니다. 손에 돈을 쥐고 검둥이의 상대인 ‘장사’를 죽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작품의 후기에서 ‘인간답고 행복한 곳이 되기 위한 열쇠는 여러분 모두가 갖고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어떤 일을 하라’고 말하는 인물보다 아무 말 없이 묵묵히 행동하는 흰둥이나 검둥이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인가요?
수많은 미사여구보다 올바른 행동 하나가 더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윤필 작가님은 항상 사회적 약자를 향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해 최북단이자 북한과 가장 가까운 섬 백령도와 이산가족(2012년 8월 북한의 이산가족상봉 거부), 불법 투견(2012년 12월 불법투견 적발) 등은 <검둥이 이야기> 연재 당시(2012년 11월~2013년 4월)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의도적으로 사회적 이슈를 작품에 반영하는 것인가요? 최근에 접한 뉴스 중 언젠가 작품에 등장 시키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가급적 당시 이슈보다는 보편적인 주제나 사안을 다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미리 생각해뒀던 문제들이 작품시기에 맞춰 공론화 되는 경우가 자주 있는 것 같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작품에 다뤘던 문제들이 멀지않은 시간에 원만히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설령 작품에 공감을 못하게 되더라도 말이죠. 다음 작품에는 아파트 노동자(건물 관리인)의 이야기를 다뤄보고 싶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따뜻한 시선과 위로 때문인지 윤필 작가님 작품의 댓글에는 ‘감사하다’는 말이 참 많습니다. 반대로 윤필 작가님이 가장 감사했던 댓글이나 독자가 있나요?
요즘처럼 바쁜 시대에 시간을 내서 작품 감상 댓글과 격려 메일을 보내주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를 받아서 가장 감사했던 댓글이나 독자를 말씀드리기가 쉽지가 않네요.
앞으로의 작품 계획은 어떤가요? 혹은 앞으로 어떤 작품을 그리고 싶으세요?
어릴 때부터 명랑만화를 좋아해서 명랑만화를 그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역사물도 도전해보고 싶네요.
마지막으로, 독자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미약하지만 독자님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위로와 힘이 되는 작품을 만들도록 고군분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출처: 에이코믹스 http://acomics.webtoonguide.com/archives/669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