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나라의 숲에는> 류승희, 낯선 곳에서 나를 깨닫는 시간

툰가1호 | 2016-07-22 04:25

 

<나라의 숲에는> 류승희, 낯선 곳에서 나를 깨닫는 시간

 

 

 

류승희, 새만화책 펴냄
류승희, <나라의 숲에는> 새만화책 펴냄

 

 

 

친구와 14년 만에 처음으로 함께 떠나는 여행. 동남아는 흔하고 중국은 싫고 이미 가 봤으니까, 오사카와 교토로 나흘간의 여행을 떠난다. 살면서 자동분사 방향제처럼 의미 없이 흩뿌려지는 약속이 얼마나 많을까? 언제 밥 한 번 먹어요. 다음에 연락할게요. 다음에 볼 땐 말 편하게 해요. 또, 우리 같이 여행가자. 고교시절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고, 서른이 된 지금까지 각자 겹쳐지지 않는 삶을 살지만 서로의 안부 정도는 만나서 확인하는 친구들끼리의 습관적인 약속이 ‘서른’이라는 특별한 시기 덕분에 성사됐다.

 

나홀로 여행을 하던 중 만난 일본, 오사카 남자와의 재회를 남몰래 기대하는 만년 싱글 수정,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결혼을 앞두고 있는 혜진, 밥벌이의 지난함과 꿈 사이에서 늘 피로를 느끼는 미영, 비행기 한 번 타보지 못하고 청춘을 통째로 공무원시험에 바친 정희. 각자가 면한 현실이 발치에 산재했지만 나름의 기대를 안고 떠난다. 그러나 일은 늘 마음처럼 되어주지 않는다. 출발하는 공항에서부터 감지된 넷의 ‘다름’은 여행 내내 그들을 따라다니며 떠나온 즐거움과 흥분 보다는 뒤에 남겨놓고 왔어야 할, 돌아가서 다시 마주해야 할 현실과 변해가는 나의 사정들과 뒤섞여 불편함과 짜증스러움으로 번진다. 몰랐던 생활습관, ‘여자’ 넷이 모였을 때 흔히 벌어지는 사소한 것이 불러오는 불화들(동등한 관계에서 응석이나 부리고! 결정은 서로 미루고! 그러면서 결정에 불만은 달고 다니는. 등등)은 터질 듯 말 듯 넷의 기분을 들었다 놨다 한다.

 

그럼에도 모두들 여행에서, 결국 무언가를 얻는다. 낯섦 그 자체를, 여행의 새로운 의미를, 변화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현실을 견딜 에너지를. 각 인물의 상황에 어울리는 하이쿠가 네 여자의 여정을 가만히 보듬는다.

 

 

 

 

 INTERVIEW

 

오늘의 우리 만화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세속적인 질문입니다만 적지 않은 상금도 받으셨고! 여러모로 수상 전에 비해 주변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을 것 같은데요.

 

생각지도 못한 상을 받아서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출판사에서 오늘의 우리 만화상에 출품한 것도 나중에 알았는데, 아무래도 상을 받으니 좋네요. 다른 좋은 작품들도 많았는데 제가 받은 건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가족들과 주변의 지인들이 많이 축하해주니 좀 쑥스럽기도 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일상은 딱히 변한 게 없어요. 늘 하던 것을 하고 삽니다. 지금 임신 6개월이라 상 받은 순간 뱃속의 아기 덕분이란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는데, 상금도 아마 아기에게 들어가지 않을까 싶네요.

 

 

 

 

‘딱히 변한 게 없는’ 일상이 궁금합니다.

 

가족이야기를 다룬 단편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후에 옴니버스 단편집으로 엮을 계획이거든요. 또 <우주사우나>라는 앱 만화 잡지에 단편을 틈틈이 발표하고 있습니다. 작가들이 모여서 만든 잡진데, 아직까지는 아이패드전용이라 많은 분들이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임신 중이라 그런지 일상도 작업과 아기를 위한 태교가 주를 이루네요. 평소에 바느질을 좋아하는 편이라 아기 옷도 만들고, 아기한테 시도 들려주고, 요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만화를 그리지 않을 때는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고양이랑 놀기도 합니다.

 

 

 

 

<나라의 숲에는>은 류 작가님의 첫 책인 만큼 아직 많은 독자들이 잘 알고 있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책의 저자소개보다 조금 더 자세한 본인의 소개를 들을 수 있을까요.

 

세 자매 중에 둘째인데 만화를 좋아해서 늘 순정만화 잡지를 사 보던 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만화를 접하게 됐어요. 만화를 그리겠다는 생각은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고, 방법을 찾던 중 한겨레 출판만화학교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만화를 시작했고, 우연한 기회에 ‘새만화책’이라는 출판사와 연이 닿아 4년 정도 만화를 그린 후에야 <나라의 숲에는>이라는 첫 책이 나왔습니다.

 

그림도 제대로 배우지 않은 제가 지금까지 만화를 그리고 있는 건 가끔 운이 좋아서였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많은 사람들과 인연이 없었다면 아마 만화를 그리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거든요. 남편도 만화를 그리면서 만나기도 했고요. 지금도 만화를 그리고 있지만 앞으로도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여건이 허락되고 꾸준히 만화를 그리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중에서. 인물과 풍경, 하이쿠가 잘 어우러진다.
<나라의 숲에는> 중에서. 인물과 풍경, 하이쿠가 잘 어우러진다.

 

 

 

최근 ‘나이 꽉 찬 여자’들을 위한 만화가 유독 자주 보입니다. 굳이 장르를 나누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나라의 숲에서>는 분명 순정만화와 소년만화, 성인극화 어느 쪽도 아니긴 하죠. ‘서른 살’을 맞은 십 년 지기 ‘여자친구’ 넷의 ‘여행’ 이야기. 왜 이런 이야기를 기획하게 되었습니까?

 

29살에 친구들과 함께 일본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 후 여행에 관한 짧은 만화를 그려서 편집자에게 보여줬는데, 장편으로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나라의 숲에는>는 이렇게 시작하게 됐어요.

 

대체로 주변에서 작업의 모티브를 얻는 편이예요. 이전에 했던 작업들도 그렇고요. 제가 알고, 궁금한 이야기를 하는 게 가장 자연스럽다고 느꼈거든요. 실제 친구들과의 여행이 매끄러웠다면 아마 이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았을 거예요. 여행이 생각과는 다르게 삐거덕거리고 안 좋은 기억들이 많아서,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여행에 다녀온 이후 계속 생각했어요. 친구들이 문제가 아니라 변화를, 전과 다름을 받아들이려하지 않는 내 마음의 문제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책에도 나오지만 서른이 특별한 건 ‘서른이란 특별한 때’를 바라는 각자의 바람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변화’에 마주 선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실제 여행 경험에 살을 붙여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각각의 캐릭터가 다른 상황, 고민에 처해있고, 친구들 사이의 관계에서 미묘하게 균열이 일어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변화를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표현하고자 했어요. 제가 겪은 서른이란 변화에 대한 궁금함이 이 만화를 그리게 했고, 저 자신에게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게 하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네 명의 친구는 여행하는 각 도시들 하나씩을 맡아 주인공이 되며 자연스럽게 시점의 전환이 이루어지는데요, 그러면서 그들의 뒷이야기나 지난한 생활, 여행관이 비춰집니다. 여행은 보통 일상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잊어버리고 즐기기 위해 떠난다고 생각하죠.

 

제가 여행을 많이 한 건 아니지만, 여행을 하면서 항상 느꼈던 건 여행이 무언가를 잊게 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계속 떠올리게 한다는 거였어요. 신발 밑창 틈에 들러붙은 껌처럼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이 계속 저를 쫒아 다니며 여행을 방해하더라고요. 그러다 거리 한복판에서, 우연히 들어간 카페나 공원에서 지금 내가 낯선 공간에 있다는 감각이 몸으로 느껴질 때 정말 ‘떠나왔다’는 걸 실감하곤 합니다. 제게 여행은 낯설음을 느끼기 위함이라고 생각해요. 만화에서도 그걸 표현하고 싶었고요.

 

 

 

 

어쨌든 ‘절친’ 넷이 여행을 왔는데, 거슬리는 부분이 한 두 개가 아니죠.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는데도 배려하거나 참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모습을 여과 없이 불편하게 그린 까닭이 있다면.

 

제 나름대로는 여과해서 그린 거라고 생각했어요! 여자친구들끼리 여행을 하면 더한 일들도 많이 일어나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동행과의 트러블이 여행 하는 동안에는 괴로울 수도 있지만, 그 부딪힘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겉으로 드러나든, 아니든 관계라는 것은 수시로 변하기 마련이잖아요. 일상에서도 분명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듯 여행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그런 삐걱거림을 잘 드러내주는 것 같아요.

 

 

 

 

아마도 네 인물 모두에게 작가 본인의 모습이 조금씩은 녹아있을 거라 짐작을 해봅니다만, 네 사람 다 다른 여행관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 중 나와 가장 비슷한 인물이 있다면?

 

만화를 기획할 때 각각의 캐릭터의 성격을 확실히 하고 싶었지만, 진행 하다 보니 다 제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네요. 만화가 지망생인 미영이라는 캐릭터가 저의 많은 부분을 담은 캐릭터입니다. 미영이가 생각하는 여행관이 저의 여행관이기도 하고요.

혼자 여행을 가고 싶었지만 아직까지 해외같이 먼 곳에 혼자 간 적은 없어요. 평소에는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해요. 여행도 여건 때문에 몇 번 못해봤는데요, 보통은 친구 두․세 명, 가족들, 지금은 남편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마음이 맞다 해도 여행을 가면 문제는 생기기 마련이더라고요.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류승희 작가는 1982년 생으로, 우리나이로 아직 서른둘입니다. 아쉽게도 충분히 젊습니다. - 편집자 주)그런지 일정 빠듯하게 짠 여행보다는 느긋하게 걷는 쪽을 좋아합니다. 여행지에서는 되도록 걷는 걸 선호하는 편이에요. 꼭 한 번쯤 혼자 여행을 가보는 게 꿈입니다.

 

 

 

 

모태솔로(?) 수정은 홀가분하게 여행을 떠나기 위해 회사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미영은 늘 돈에 쪼들리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애쓰는 그림쟁이죠. 혜진은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결혼 준비에 힘을 쏟고 정희는 공무원 시험에 수 년 째 매달리고 있고요. 사실감 있는 캐릭터, 참고한 사람은 있는지. 본의 아니게 희생(?) 당한 지인이 있을 것 같은데요.

 

위에도 말씀드렸듯이 ‘미영’이는 저를 바탕으로 만든 캐릭터입니다. 다른 인물들도 제 주변의 친구들을 바탕으로 만들었어요. 공무원 준비하는 친구, 결혼하는 친구, 연애 못하는 친구, 서른 전후의 나이라면 누구에게나 한 명쯤 있을 법한 친구들이잖아요. 다만 모든 캐릭터가 어떤 ‘변화’ 앞에서 고민하고 있는 걸로 설정을 했죠. 그래서 각각의 캐릭터에게 서로 다른 상황들을 만들어 넣기 위해, 많은 부분 제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 모티브를 가져 왔습니다. 그 때문에 친구들에게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고교시절 회상 신에서,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가 엑스재팬의 투어를 보는 에피소드는 <나라의 숲에는>에서 이색적이었습니다. 작품 전반적으로 시대, 세대를 짐작케 하는 얘기가 별반 나오지 않잖아요. 딱 그 시절에만 존재했던 밴드의 기념적인 공연이야기를 보며 당시의 추억들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엑스재팬 콘서트 에피소드는 저의 실제 경험입니다. 1997년의 엑스재팬 라이브는 제 인생에서 어떤 전환점이 된 경험이었어요. 만화에도 표현되어 있지만 저의 어느 한 시절이 막을 내린다는 걸 온 몸으로 느낀 경험이었거든요. 주인공들의 삶의 한 시점이 이제, 지나간다는 느낌을 주고 싶어서 이 에피소드를 만화에 넣게 되었습니다.

 

 

 

 

결국, <나라의 숲에서>로 독자들에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라 정리할 수 있을까요.

 

‘여행’과 ‘변해가지만 변치 않길 바라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살다보면 어떤 특정 시기에 요구받는 변화들이 있고, 그 변화들을 누군가는 자연스레 지나가지만 누군가는 무척이나 힘들게 머뭇거리며 지나가잖아요. 자연스럽게 변해가는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서 마침내 변화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류승희 작가가 참여 중인 아이패드 앱 만화잡지 . 무료다.
류승희 작가가 참여 중인 아이패드 앱 만화잡지 <우주 사우나>. 무료다.

 

 

 

작품에서 좋았던 것 중 또 하나가 매 에피소드, 배경과 잘 어울리는 ‘하이쿠’를 넣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본 문학에 관심이 많은데요, 특히 하이쿠는 예전부터 좋아했습니다. 작품 기획단계에서 각각의 캐릭터에 맞는 하이쿠가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찾아서 넣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의 상황을 말해주는 하이쿠 한 수 써 본다면,

 

 

‘생각지 않은 병아리 태어났네. 겨울의 장미思わずもヒヨコ生れぬ冬薔薇’

- 가와히가시 헤키고토河東碧梧桐

 

 

 

 

 

하이쿠를 차용한 것도 그렇지만, 작품 전반에서 ‘단정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대사나, 독백에서 단어 선택과 글의 리듬감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사가 매끄럽게 이어지는가, 독백이 적절한가를 신경 쓰는 편입니다. 읽어보면 어색하고 이상해서 여러 번 고치는 일이 많아요. 소리 내서 읽기도 하고, 나레이션은 조금씩 다르게 여러 번 써보기도 합니다. 콘티 단계에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면서 글을 다듬는 과정을 꼭 거치고요. 그렇게 해도 완성된 원고를 보면 여전히 이상한 대사나 독백이 눈에 거슬립니다.

 

 

 

 

만화를 업으로 삼은 경력이 길지 않음에도 드로잉에 대한 평이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연필의 질감을 십 분 활용했고, 채색을 했음에도 과감히 흑백을 선택한 점 등이 눈에 띕니다.

 

만화를 처음 시작했을 때, 그림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게 상당한 콤플렉스였어요. 어떻게 그리는 게 잘 그리는 건지도 몰랐고요. 무작정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을 따라 그려보기도 하고, 크로키도 했지만 그림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어요. 펜으로 그렸다 붓으로 바꿨다하며 제게 맞는 걸 찾아봤지만 경직된 선만 나오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출판사에서 연필로 작업한 외국 작가의 책을 보고 ‘바로 이게 내가 원하는 그림이다.’라고 깨달았습니다. 그 때부터 연필로 작업하기 시작했는데, 연필의 매력에 푹 빠져서 지금까지 연필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연필은 쓰기도 쉽고, 아련하고 포근한 느낌이 좋습니다. 아직도 연필의 매력을 그림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더 오랫동안 연필로 작업할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경력이라는 단어가 나왔으니 질문 드립니다. 만화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한겨레 훅에 연재를 하게 된 연유도 과정도 궁금합니다. 인권잡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만화 그리는 사람이구나 느꼈던 건, 역시 제 이름 석자가 적힌 <나라의 숲에는>을 처음 받았을 때였던 것 같아요. 책이 나오기 전에도 잡지에 단편들이 실려서 책을 받아보긴 했지만, ‘제 책’이 나와야 정말 만화 그리는 사람이 되는구나, 생각했어요.

한겨레 훅,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모두 출판사를 통해 알게 되서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웹툰을 하지 않는 한 연재하는 기회를 갖는 다는 게 쉽지 않은데, 한겨레 훅에 연재를 하게 돼서 <나라의 숲에는>을 순조롭게 마무리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은 책으로 나오는 잡지라 저한테는 남다른 애정이 있었던 작업이었는데 사정상 연재가 중단되어서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그림 얘기로 돌아가서, 배경이나 사물을 그릴 때와 인물을 표현할 때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 여성 넷이 모였는데, ‘아름답다’고 느껴지지 않네요. 감정표현도 다양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 그림 실력이 아직 부족하다보니 인물 그리는 게 여전히 어려워서… 드라마틱한 표현을 하고 싶어도 못 한달까요. 아직까지도 인물의 표정 그리는 건 정말 어려워요. 그리고 어려서부터 순정만화를 많이 봐와서 그런지 왠지 그것과는 다르게 그리고 싶다는 열망이 그림에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해요(보는 사람들이 다들 인물을 못생기게 그린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래도 계속 이렇게 그리는 걸 보면 제가 깨닫지 못하지만, 아마 이런 그림이 제가 추구하는 그림에 다가가는 과정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림에 있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한겨레 출판만화학교에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전반적인 만화적 연출 등도 만족할 만큼 배우나요? 일러스트 아닌 만화는 연출공부는 필수라 생각합니다. 연출의 스승이 된 작품이나 관련 서적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한겨레 출판만화학교가 6개월 과정인데 연출에 대해 배우는 시간은 길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만화의 가장 기초적인 것들을 배웠고요, 사실 연출이라는 걸 모르고 무작정 그리기 시작했어요. 만화를 그리면서 연출이 중요한다는 걸 깨달았죠.

 

작품을 여러 번 보고, 따라 그리면서 연출에 대해 많은 부분 배울 수 있었던 작품은, 일본 만화가 중에 ‘타카노 후미코’라는 여성 작가가 있습니다(한국에는 아직 타카노 후미코의 작품이 정식 출간되지 않았다. 만화가 아닌 동화책 <요 이불 베개에게> 한 권이 유일한 국내 기출간 작품. 대표작으로 <다나베 츠루> <노란 책-자크 티보란 이름의 친구> 등이 있으며 <노란 책-자크 티보란 이름의 친구>로 2003년 데즈카 오사무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편집자 주). 일상의 디테일한 부분을 잘 표현하는 작가입니다. 제가 닮고 싶은 작가이기도 해요.

 

 

 

 

 

 

 마지막 신.
<나라의 숲에는> 마지막 신.

 

 

 

 

한 권의 어엿한 책으로 출간된 <나라의 숲에는>을 독자들은 순식간에 읽어내려 가지만, 작가가 작품에 쏟은 시간은 순식간이 아니죠. 창작, 연재, 마감. 일정을 잘 지키는 편인가요? 어떻게 작업하시나요.

 

작업을 안 할 때는 멍하니 뒹굴거리는 편이에요. 주부다 보니 집안일들은 해야 하지만요. 그러다 아이디어가 생기고 계속 생각하다보면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경우가 많아요. 집에서는 이야기가 잘 써지지 않아서 무작정 걷거나 커피의 힘을 빌려 완성하는 편이죠. 콘티나, 작화는 무조건 집 책상에 앉아서 매일 정해진 양을 하고요. 불안이 높은 편이라 마감은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마감이 있으면 빨리 하게 되죠 아무래도.

 

 

 

 

그럼 그 과정을,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표현해 보실까요.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발 길 가는 대로 걸으면서 뭔가가 떠오를 때까지 무작정 기다린다. 머리를 스치는 이야기가 떠오르면 그 때 책상에 앉아 끄적거린다. 하지만 이야기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아 다시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 보통은 그렇게 잊힌다. 하지만 다시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 책상에 앉아 열심히 끄적인다. 이야기가 완성되면 콘티를 짜고, 매일 조금씩 규칙적인 작화를 한다. 마땅한 시간이 흐르면 한 편의 만화가 완성되어 있다. 곧 허탈함과 함께 다시 멍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작가소개에서 텃밭을 가꾼다는 말에 시선이 머물렀습니다. 농한기로 접어드는 요즘은 키우는 재미, 키워먹는 재미를 어디에서 대신 찾으시는지.

 

대학시절 심리학 수업에서 교수님이 “머리가 힘들면 몸을 움직이고, 몸이 힘들면 머리를 움직이라”는 말을 하셨어요. 확실히 만화를 그리는 건 머리를 쓰는 일이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요, 분위기 전환에는 몸을 움직이는 것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텃밭을 시작했어요. 몸도 움직이고, 몸에 좋은 것들도 수확해서 먹고, 일석이조죠. 처음 하는 거라 시행착오도 많고 실패도 했는데요. 농사를 지으면서 깨달은 건 제가 아무리 야채들이 잘 안자란다고 안달해봐야 결국 땅과 해, 비가 해주는 만큼 수확할 수 있다는 거였어요. 뭔가가 자라서 수확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그것을 요리로 해먹는 다는 게 저한테는 신기하고 의미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여름에 제가 임신하면서 가을 농사를 못 지은 게 아쉽지만 뱃속 아이가 크는 재미에 살고 있는지라 아무래도 당분간은 베란다 텃밭에 만족해야 할 것 같아요.

 

 

 

 

2013년, 서른 두 해가 저물어 갑니다. 의미 있는 한 해가 되었나요? 이후의 계획도 궁금합니다.

 

올 해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는데요, 개인적으로 고양이 ‘콩이’와 뱃속의 아이를 만나서 기쁘고, 행복한 일들이 많았어요. 2월에는 첫 책인 <나라의 숲에는>이 출간되었고 11월에는 오늘의 우리만화상도 받게 됐으니 아마 잊지 못할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내년에는 건강하게 아기를 출산하고 아기 키우는 일에 매진해야겠지만, 꾸준히 만화를 그려서 좋은 만화를 그리는 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또 한 번, 큰 변화의 해를 맞이하는 기분이에요.

 

 

 

 

<출처: 에이코믹스 http://acomics.webtoonguide.com/archives/6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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