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VS 만화 시즌 2] #03. 누구도 알아챌 수 없는 방향으로 향하다, 만화가 양영순
양영순의『누들누드』는 ‘성’을 소재로 한, 당시에는 꺼내기 힘들었던 이야기를 농담처럼 진담처럼 세상에 툭 던졌다. 검색창에 몇몇 단어들만 넣어도 금방 원하는 수위의 사진을 찾아낼 수 있는 때인 지금에서야 들춰보면 양영순의 말처럼 “청소년이 바라보는 성에 대한 호기심” 정도의 이야기로 밖에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엔 파격이었고 그만큼 만화가 양영순은 별난 천재였다. 이후 웹툰으로 자리를 옮겨 『1001』,『란의공식』, 『덴마』를 선보이는 그는 성적 호기심을 반짝반짝 빛내던 천재에서 별난 이야기꾼으로 천연덕스럽게 옷을 바꿔 입는다. 그래서 그가 더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 서울에서 살다가 여수로 내려온 지 꽤 됐다고 들었다.
= 6년 정도 됐다. 처음 1년은 힘들었다. 일단 주변에 사람이 없으니까. 이제는 다시 서울에서 살라고 하면 부담스러울 것 같다. 여수엔 소도시가 가지고 있는 담백한 정취가 있다. 여수처럼 예쁜 도시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여수를 배경으로 한 만화를 그려야한다는 부담이 있다. 여수 3부작으로 뭔가를 꾸려볼까. 내 작품이 영화화 된다면 꼭 여수에서 로케이션을 50% 해야 한다거나. 오해할까봐 말해두지만, 이건 절대 여수시와 관련 없다. (웃음)
- 근황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다. 『준의 알람』 연재가 계속되고 있지만, 최근 어떻게 지냈나.
= 『덴마』처럼 장기연재는 처음이어서 만화 경력이 10년 이상 됐는데도 불구하고 장편의 호흡을 이제야 알게 되는 것 같다. 허둥지둥 하는 부분도 없지 않아서 새로운 압박감을 느꼈다. 연재처인 네이버의 담당자분이 ‘이쯤에서 잠시 끊어줘야겠다’라고 판단하셨는지, 잠시 휴재기간을 가지자고 먼저 제안을 해주셨다. 그래서 『덴마』를 휴재하고 있는 상황이다. 시기적으로는 잠시 숨 돌리고 가는 게 맞는 것 같다. 『준의 알람』같은 경우는 『덴마』하고는 다른 호흡이다.
(편집자 주 : 인터뷰는 2014년 12월에 작성 되었습니다.)
- 아직 초반이지만 『준의 알람』도 『덴마』만큼 이야기가 커질 듯 한 분위기가 보인다.
= 옛날에 선생님께 들었던 경험을 『덴마』를 연재하면서 하나 둘 하게 된다. 맨 마지막 결말만 있으면 어떻게든 간다라는 것. 또 하나는 이두호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건데, ‘컨트롤이 안 되는 캐릭터들이 나타나서 작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아서 움직인다’. 모두『덴마』를 연재하면서 알게 됐다. 그게 너무 버거울 경우에는 심지어 캐릭터를 갑자기 죽인다고 하더라. 캐릭터가 작가의 의지와 관련 없이 튀어 나오는데 정말 신기했다. 한편으론 이걸 어떻게 마흔이 넘어서 경험하나 싶기도 하다. (웃음)『준의 알람』 같은 경우도 마지막 장면에 대한 이미지가 있다. 처음의 방향이나 의도와는 관계없이 스스로 흘러가는 것 같다. 어떤 느낌이냐면 밤에 흉가 체험할 때 손전등을 켜고 한 계단 한 계단 비춰서 올라가지 않나. 약간 그런 느낌이다. 나는 이 흉가에 들어갔다 나올 거라는 결론은 있는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는 거다. 그냥 내딛는 내 발만 보이고. 이전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짜둔다던가 혹은 짧은 이야기들이니 이야기가 다 나와 있는 상태에서 했다. 지금은 한 주 한 주 해나간다 이런 느낌이 있다. 불안감도 있고 걱정도 되지만,『덴마』나 『준의 알람』이나 뻔뻔하게 작업하고 있다. 뭐가 다 있는양 뻔뻔하게. (웃음)
- ‘만화 대 만화’에 이충호 작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 이충호 작가는 잡지 시절에 정말 지지 않는 태양 같은 느낌이었다. 『드래곤볼』을 이겼던 작가니까. 잡지시절부터 선을 굵게 가졌던 분이기 때문에 나는 저 자리에 언제 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가져보기도 했었다.
- 사실 그간 작품의 행보로 봤을 때는 양영순과 이충호에게 딱히 공통점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이충호 작가에게 자신과 묶을 수 있는 작가가 있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하더라. 양영순 작가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 신문만화 하면서 비슷한 군이 있었다. 내가 『아색기가』 시작한 후에 『멜랑꼴리』, 『트라우마』, 『츄리닝』 이런 작품이 나오면서 끼리끼리 모이는 분위기가 있었다. 지금은 판이 인터넷으로 바뀌면서 다시 쾅하고 사방으로 퍼진 느낌이다. 지금은 같은 카테고리 안에 묶기보단 그놈이 그놈 이런 느낌이 들기도 하고. (웃음)
- 이충호 작가와 양영순 작가의 공통점을 굳이 꼽자면 잡지, 단행본 황금기에서 웹툰으로 넘어와 제대로 안착한 작가들이지 않나 싶다.
= 시기적으론 그렇다. 이충호 작가는 소년만화 층을 계속 끌고 온 거고, 나는 성인만화 범주에 들어갔었다. 근데 완벽한 성인만화로 보기엔 좀 그렇다. 소재가 ‘성’이니까 성인만화로 분류됐지 스스로 판단하기에는 성에 호기심이 많은 소년만화 정도의 느낌이다. 일본만화를 보면서 이런 것이 정말 성인만화라고 느꼈던 게 많았다. 『시마과장』, 『황혼유성군』 같은 만화들. 특히 『황혼유성군』 보면서 이런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 잡지에서 신문으로, 다시 웹으로 플랫폼의 변화를 누구보다 몸으로 체감했을 작가 중 한명이다. 특히 웹툰의 경우 강풀, 강도하 작가와 함께 웹툰의 문법을 완성한 작가라 불린다.
= 만화가로 먹고 살기위해서 쫓기듯이 매체를 옮겼다. 잡지 시장이 막 무너져 내릴 때 장상용 기자가 연락을 줘서 신문사에 연재를 할 수 있었다. 동료작가인 비타민과 함께 웹툰 작가들과 어울리다가 웹으로 넘어갔다. 많은 분들 덕택에 인터넷까지 물 흐르듯이 넘어 온 거다. 어떤 확고한 의도나 선견지명이 있거나 그러지 않았다. (웃음) 그러니 지금 돌이켜 보면 아찔하다. 그런데 앞으로도 별로 큰 차이 없을 것 같다. 그저 버티는 거다. 인정 많고 따뜻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서 만화가로 살 수 있는 것 같다.
- 잡지 『미스터 블루』에서 『누들누드』란 작품을 선보이며 데뷔했다. 섹시코드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라 당시에 누구도 그 작품을 보지 않은 이가 없었던 것 같다.
= 성인만화라고 화제가 됐지만, 청소년이 가질 법한 성에 대한 판타지를 가져와서 한 작품이 『누들누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변에서 더 난리였다. 그런데 나는 내가 섹시코드로 만화가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늘 우주를 배경으로 싸우는 소년만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 왜 성인 만화를 다시 그리지 않느냐는 질문도 참 많이 받았다. 인장이 아니라 낙인이 된 느낌이 들 때도 있지 않나.
= 처음에 사람들한테 알려졌을 때 아버지가 『누들누드』를 뛰어넘을 수 없으면 곧 잊힐 거라 하셨다. 난 거기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걸 목표로 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늘 머릿속엔 『도라에몽』이나 『우주해적 코브라』 같은 만화들을 하고 싶었다. 왜 『누들누드』만큼 신선하지 않느냐란 질문도 많이 받았다. 이 사람이 내가 만화가가 되려고 했을 때의 의지를 알 수 없으니 저런 말을 할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다.
- 인기가 많은 전작에 대한 큰 부담은 없었나보다.
= 없었다. 하지만 장편연재에 대한 부담은 있었다. 『타짜』같은 작품을 보면 내가 이런 장편 연재를 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이 들었다. 시간은 계속 가고 주변에서 ‘작가’라고 부르니까 부담도 생기고. 그러니 뭔가 심각해야 될 것 같고. 대화를 하면 수준차이가 너무 많이 나더라. 이 사람은 이렇게 깊게 생각하는데 나는 너무 얕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나는 그냥 소년활극을 하고 캐릭터를 많이 팔아서 나의 하렘을 만들어야지 라고 생각했었다. 남들은 고민도 세련되어 지는데 나는 너무 철이 없나 싶더라. 근데 이게 그냥 주변 탓이 아니라 내 마음의 소리기도 한 거다. 너도 철 좀 들어라. 성장 좀 해라 하는. 아마 나처럼 시작한 작가들이 많을텐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럴듯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게 작가의 소명이기도 하니까.
- 웹툰 첫 작품 『1001』은 만화가 양영순의 새로운 시작으로 보였다.
= 시작이지만 대표작으로 볼 수는 없다. 지면에서 온라인으로 넘어오는 징검다리 같은 작품이다. 물론 모든 작가들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대표작이길 바라겠지만, 여전히 욕심이 있다. 돌이켜 봤을 때 미소 지을 수 있는 작품에 대한 열망. 그런 작품을 나중에 만들겠다는 게 아니라 하얗게 불 태웠다라고 스스로 얘기할 수 있는 작품이 언제든 나왔으면 좋겠다.
- 『1001』 이후 저 사람은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을까 싶을 정도로 기발한 설정에서 시작한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란의 공식』이나 『라미레코드』 같은.
= 『우주해적 코브라』와 『도라에몽』 등 유년기에 봤던 나를 압도했던 만화들, 거기서 출발하는 것 같다. 아마 그 작품들을 보고나면 대충 양영순이라는 만화가가 어디서 뭘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 시절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필독서였는데 그 책이 줬던 압도적인 느낌, 그 범주 안에 내 작품이 있다.
- 『덴마』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세계관도 무척 넓어졌고 하나의 에피소드가 백편을 넘기도 하는 등, 이야기가 스스로 증식하는 것 같다. 방대한 세계관에 관한 부담이 있지 않나.
= 세계관을 만든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하나씩 붙이는 느낌이다. 애초에 만들려고 한 세계관이 아니기 때문에 부담도 역시 없다. 이럴 때 편리한 게 퀑이다. 모든지 할 수 있고 물리적 설명도 안 된다. (웃음)
- 캐릭터가 이야기를 끌고 가기도 하는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그들이 끌고 가는 방향이 더 좋을 때도 있나.
=『덴마』의 식스틴이라는 에피소드에 '이델'이라는 캐릭터가 나오는데 나에게는 그저 엑스트라였다. 식스틴 이전 에피소드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쯤 이 캐릭터가 계속 말을 걸어오더라. 무시하고 스토리를 떠올리고 있으면 그 캐릭터가 계속 깐족거린다. 정말 신경이 쓰여서 다른 얘기를 할 수가 없다. 심지어 캐릭터가 설정까지 가져온다. ‘쓰세요’하고 훅 던져준다. 진짜 신기한 경험이었다. 모든 작가들이 긴 이야기를 하게 되면 겪게 되지 않을까 싶다. 추측이긴 하지만 『왕좌의 게임』을 쓴 작가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웃음)
- 많은 팬들이 『덴마』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는데 그 시기는 언제쯤일까. 『준의 알람』 연재도 계속되고 있어서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 이미 작업은 시작했다. 별 무리가 없다면 곧 돌아오겠다.
- 양영순에게 만화란 무엇인가.
= 밥. 휴재하고 나서 ‘이제 뭐하려고 그러냐’ 그런 분들도 계신데 난 이게 생계다. 이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먼 훗날의 손녀가 “너희 할아버지 뭐해?”라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 할아버지 마감하고 있어”라고 답변을 할 수 있는 미래가 희망이라면 희망사항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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