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VS 만화 시즌 2] #05. 양영순 찬양, 그리고 『아색기가』를 위한 몇 가지 변명
정말 사람 수명이 욕을 얻어먹는 만큼 늘어나는 거라면 만화가 양영순은 십장생 수준으로 오래 살지도 모른다. ‘애정이 있으니 까는 거야!’라고 하기엔 독자들의 반응 수위가 상당히 센 편이라서 ‘그냥 죽어버려!’ 따위의 얌전한(?) 댓글에선 실제로 팬심이 느껴질 정도. 이는 만화 연재일이 잘 지켜지지 않아 분노 게이지가 쌓일 대로 쌓인 독자들에게 그가 갑작스러운 연재 중단과 용두사미식 마무리로 기름을 붓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양영순은 여전히 인기 있다. 2014년 7월 29일 게시를 마지막으로 휴재 상태가 되어버린 네이버 웹툰 『덴마』엔 여전히 매일 스무 개 이상의 댓글이 달린다. 인신공격성 썅욕과 사랑하니 제발 돌아오라는 읍소까지 그 내용은 천차만별이나, 휴재중에도 이리 지속적인 관심을 받는 작가가 흔치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의 팬이다. '확산성 밀리언아서'라는 모바일 TCG 1)에 추가된 양영순의 일러스트가 죽도록 까이고 있었을 때도, 이런저런 말로 어그로를 끌던 그의 트위터 계정이 끝내 폭파되었을 때도, 나는 여전히 양영순의 팬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매주에 한 번 정도는 『덴마』의 웹툰 페이지를 방문한다. 하지만 양영순 만화의 장점은 『누들누드』, 『아색기가』와 같이 짧은 호흡의 만화에서 훨씬 잘 드러난다. 물론 단발성 일러스트나 긴 호흡의 장편만화도 나쁘진 않다. 최근작 『덴마』는 스토리 구성면에서 팬들의 큰 호응을 끌어냈으며, '확산성 밀리언아서' 일러스트는 다른 한국작가 SIU나 이광수에 비해 결코 떨어지는 수준이 아니다. 2) 그럼에도 ‘양영순’ 하면, 우리는 여전히 출세작 『누들누드』와 후속작 『아색기가』를 떠올린다. 부드럽고 안정적인 데생 실력과 성에 대한 대범하고 독특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누들누드』는,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당시 한국만화사를 뒤흔든 글래머러스한(!) 충격이었다. 게다가, 초고속인터넷과 토렌트를 통해 ‘야구동영상’마저 쉽게 구하는 요즘과 비교하면, 90년대는 여전히 청춘의 시청각자료 부족에 허덕이는 ‘암흑기’에 가까웠다. 그때 양영순의 아찔한 살색 그림은 중고등학생(남자)과 대학생(역시 남자) 들의 감수성을 여러 가지 의미로 적셔주었던 것이다.
문제는 후속작 『아색기가』에 대한 엇갈린 평가다. 상상력이 예전만 못하다느니, 작화가 성의 없다느니 하는 말들도 꽤 있었다. 나는 『아색기가』를 단행본 출간 이후에야 접할 수 있었고(연재 기간에 군입대 크리 맞아서), 만화를 읽으며 기존 비판에 어느 정도 동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아색기가』가 양영순의 대표작 중 하나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사실, 이 만화에 대한 비판은 만화가 양영순에게만 유효한 게 아니다. 대부분의 성공한 만화가는 소위 ‘속편 말아먹기’라 불리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게 되고, 그렇게 그들의 두 번째 작품엔 『아색기가』에 쏟아졌던 비슷한 비판이 가해진다. 상상력 부족, 소재 고갈, 작화 붕괴 등의 비난이 대표적. 『아색기가』의 경우, 작화가 성의 없다거나 흔들린다거나 하는 비난은 좀 부당해 보인다. 그의 작화는『양영순의 천일야화』(단행본)를 거쳐, 비운의 조루작 『플루타크 영웅전』(웹툰)과 『덴마』로 현재에 이르렀으며, 점차 간결하고 굵은 선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애초 양영순의 장기는 세밀한 묘사가 아니라, 부드러운 데생 선을 활용한 캐릭터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표정의 구현이었다. 이와 같은 그림체는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긴 한다. 하지만 카툰 렌더링에 유독 환장하는 게임유저 3) 가 있듯이 양영순의 작화 자체가 문제라고는 볼 수 없다. 어쨌든 작화의 전개과정을 감안하면 『아색기가』의 그림체는 자연스러운 변화라는 것.
상상력 부족과 소재 고갈이라는, 제법 타당해 보이는 비판에 대해서도 반론은 가능하다. 『누들누드』에 비해 『아색기가』가 심심하게 느껴지는 까닭이 정말 작가의 상상력이 떨어졌기 때문일까? 이건 반만 맞는 얘기다. 전작처럼 성(性)코드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얼마간의 소재 부족은 필연적이지만 『아색기가』가, 특히 남성 독자들에게, 좀 심심한 이유는 따로 있다. 『아색기가』가 『누들누드』에 비해 덜 자극적이기 때문. 실제로 『아색기가』엔 만화의 소재로 성(구체적으로는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이 전혀 사용되지 않는 경우도 꽤 있다. 무려 양영순이(!) 자기 만화를 통해 때로는 돈(물질)의 가치에 대해, 혹은 운명의 허무함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남성들이 『누들누드』의 노골적인 표현방식에 낄낄거리며 즐거워하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그 유머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색기가』의 유머는 훨씬 순하고 순진하다. 누구나 읽어도 될 만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 어쩌면 이쪽이 훨씬 더 대중적이라는 얘기다.
『아색기가』 이후 그는 성코드를 전면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지금도 충분히 좋지만 『아색기가』의 양영순이 그리운 것도 사실. 성을 만화 소재로 잘 다루는 작가라면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양영순처럼 2D-여자로 현실-남자를 흥분시키는 작가는 드무니까.
1) ‘Trading Card Game’라는 게임장르의 약칭이나, 실제로 대부분의 모바일TCG 게임은 유저 간 카드 트레이드 시스템을 제공하지 않는다. 예쁘고 헐벗은 여자가 그려진 카드를 얻기 위한 현질과 뽑기가 있을 뿐.
2) 다만 더 높은 곳에 갓꾸엠(꾸엠)과 갓요석(흑요석)의 카드가 있을 뿐. 하지만 이 둘은 만화가가 아닌 일러스트 작가니 어차피 논외다.
3) 게임 <보더랜드>는 카툰 렌더링으로 이미 대박을 쳤고, <페리아 연대기>(출시예정)와 같은 대규모 MMORPG에 카툰 렌더링이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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