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책 - 도둑맞은 이야기와 그로 인한 결과들
이미 출판된 작품인 것 같습니다. 비슷한 경우가 종종 보이던데 ‘도둑맞은 책’도 그런 것 같아요. 딱히 기출판 웹툰이라고 신경쓸 필요는 없겠고요.
주인공 ‘서동윤’은 왕년에 잘 나가던 영화 시나리오 작가입니다. 자연히 이야기의 초점은 영화, 시나리오, 창작가들에게 맞춰져 있지요. 한국 영화계 최초로 ‘큰 거 한 장’에 계약까지 했던 동윤은 5편의 시나리오가 내리 엎어지면서 - 엎어졌다는 게 시나리오 내적인 문제로 무산됐다는 의미인지 개봉은 했는데 흥행에 실패했다는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요 - 점차 몰락하기 시작입니다. 영화는 여러 이야기 매체 중에서도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기 때문에, 그만큼 창작가(여기서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 개인의 힘이 한계가 있고, 모험을 꺼릴 수밖에 없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유가 어쨌든 5편 연속으로 문제가 생겼다면 아무리 왕년에 잘 나가던 작가라도 어려움이 따르겠죠.
결국 동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명성에 빌붙어 사설 시나리오 학원에 강사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집에는 같이 시나리오를 쓰는 일종의 문하생이 둘이나 있고요. 이 둘은 밥값과 교통비 정도를 지원받을 뿐 제대로 된 급여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공동으로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수익이 발생하면 분배하기로 했는데, 이런 경우에는 동윤도 마찬가지인 입장이니 ‘열정 페이’라고 부르기는 어렵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감’이 떨어져 버린 동윤이 새롭게 재기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제작자와의 면담은 번번히 퇴짜를 맞고요. 결정적인 변화는, 그리고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은 ‘김영희’라는 학생이 눈에 띄면서 시작됩니다. 김영희와 얘기를 나누던 도중 그가 동윤이 초짜 시절에 쓴, 너무 빨리 내려버려서 대박은커녕 악플조차 하나 찾을 수 없는 초기작의 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우연히 김영희가 쓴 시나리오를 읽게 된 동윤은 이런 장르에서 대체로 그렇듯 큰 감명을 얻습니다. 어떻게든 공동 저작으로나마 김영희를 꾀어내려고 하지만 자존심 강한 아마추어인 그는 쉽게 넘어오지 않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여기까지 내용 소개를 읽고 나면 기성 프로인 동윤이 표절을 하거나 아예 이름만 바꿔 달고 김영희의 시나리오를 훔치지 않을까 생각하기 쉬울 것 같은데요. 저도 그랬지만 ‘도둑맞은 책’의 전개는 보다 극적입니다. 동윤이 술에 한껏 취해 집에 들어간 다음날, 형사들이 그를 방문하거든요. 김영희는 무참하게 살해당한 채로 발견되었고 동윤은 용의선상에 올라있습니다. 사실 동윤도 그런 위험한 충동을 한 번 느꼈고 만취 상태였던 만큼 본인이 정말로 저지른 짓인지 아닌지 스스로도 확신이 없습니다.
이제 김영희의 시나리오는 주인 없는 상태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그 주인 없는 시나리오를 영화 제작자 앞에서 언급하자 당연히 좋은 반응이 돌아오지요. 영화 제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김영희의 아내이자 홍대에서 잘 나가는 인디가수인 ‘보윤’까지도 어찌어찌 깊은 관계로 나아갑니다. 무슨 막장스러운 스토리는 아니고, 동윤이 교묘한 화술과 거짓으로 김영희의 빈자리에 힘들어하는 보윤을 유혹했다고 볼 수 있겠어요. 이제 동윤은 시나리오 작가로서 회생했고 좋은 여자까지 얻었지만 언제나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입니다.
‘도둑맞은 책’의 특징을 몇 가지 언급할 수 있겠어요. 작가 분이 영화에 조예가 깊은지 아니면 실제로 영화 제작계에 몸을 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작중에서 굉장히 다양한 영화가 인용되고 실제 영화계에서 쓰이는 은어 같은 부분도 여럿 보입니다. 진짜 업계에서 벌어지는 것 같은 현실성은 대체로 이런 디테일에서 비롯되지요.
내용 자체는 다소 고전적인 스릴러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충분히 설득력 있는 동윤의 어려움과 동윤 그 본인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상황은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충분합니다. 주인공에게 몰입하는 독자들에게 있어 주인공조차 짐작하지 못하는 안개 속을 헤쳐 나가는 재미야말로 스릴러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일독을 권할 만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