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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해도 괜찮아] #02 129페이지로 보내는 편지

툰가1호 | 2016-08-17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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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페이지로 보내는 편지

 

이즐라 지음 ㅣ  레진코믹스 ㅣ  프롤로그, 에필로그 제외 총 20화 (내서재 소장 40코인)

 

 

 

 

뒤를 돌아봐야 자신의 발자국이 보이듯 시간도 그렇다. 30대가 되어야 비로소 뜨거웠던 20대가 보인다. 수많은 사건과 만남으로 가득한 20대, 그 중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뒤흔드는 사건은 뭐니뭐니해도 ‘사랑’이다. 누군가는 그 시절 자신에겐 사랑이 없었노라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사랑은 찾아왔을 거다.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이즐라의 웹툰 <129페이지로 보내는 편지>는 사랑이 사랑 이전의 모습으로 찾아왔을 때, 그 중심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한밤중의 풍경을 포착한 만화다. 짝사랑이라는 평범하고 진부한 소재에도 불구하고 남다른 컬러 감각과 깔끔한 일러스트 스타일의 캐릭터로 시선을 끌고, 느릿느릿하지만 가감 없이 성실하고 끈기 있게 전진하는 이야기의 힘으로 조용한 공감을 얻는다.

 

작가는 짝사랑이라는 이 미지근한 사건을 제대로 된 이야기로 탄생시키기 위해 ‘서간 만화’라는 형식을 채택한다. 극적인 사건도 대사도 없는, 그러니까 담백하지만 흥행요소 미달인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독자를 연애편지 한 통에 울고 웃던 그 시절로 초대한다. 사랑을 문장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그래서 하얀 편지지 앞에서 긴 밤 씨름했던 그 시절로. 편지는 당시의 감정을 고스란히 되살리면서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주인공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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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만화가 지망생인 남자 주인공 ‘이즐라’는 한 교육과정에서 알게 된 S를 좋아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예쁘고 스타일 좋을 뿐만 아니라 이미 다양한 그림 활동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넓혀가고 있었다. 백수인 이즐라에겐 그야말로 밤하늘의 별 같은 존재. 최종 과제인 전시회도 끝나고 더 이상 그녀를 만날 길이 없던 이즐라는 그녀의 블로그를 기웃거리며 간간히 댓글을 주고 받을 뿐이다.

 

그러다 어떤 댓글 사건을 계기로 둘은 쪽지를 주고 받게 된다. 댓글에서 쪽지로의 변화. 그 소통 방식의 변화에서 이즐라는 ‘관계의 진화’라는 미묘함에 사로 잡히고, 서로의 취향과 감정을 나누며 단계적으로 메일과 메신저로 대화의 장을 옮겨 간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일상에 침투하고 둘 사이의 시간의 흐름도 점점 속도를 붙인다.

 

 

하지만 대화가 깊어 가면서 이즐라는 불필요한 사실도 알게 된다. 이를테면 S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이 엄청난 장애물 앞에서 이즐라는 그린 라이트를 끄고 우정을 선택한다. 남녀의 영원한 우정을 꿈꾸며 이즐라는 더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다. 자신의 감정은 최대한 누르고 이성의 탑을 쌓아올려 간다. 마치 바위를 계속 밀어 올리는 시지푸스처럼.

 

네 번째 편지에서 이즐라는 S에게 한 가지 규칙을 제안한다. 편지 하되 ‘절대 만나지 않는다’는 절대규칙을. 플라토닉 사랑의 정점에나 있을 법한 이 제안을 S는 의외로 흔쾌히 수락한다. 그리고 이 장치가 <129페이지로 보내는 편지>의 사랑을 좀더 특별한 것으로 만든다. 고백하듯 내뱉지 않고 교감하고 소통하는 사랑으로, 열병을 앓듯 질주하지 않고 차분하게 성장하는 사랑으로 이야기는 점차 발전한다. (만약 여기에서 살짝 방향을 틀었다면 전례없는 변태 만화가 탄생하게 됐을지도... 조금 아쉽다. ^^) 이즐라는 이제 펜팔 S와 글을 나누기 위해 읽고 또 읽는다. 심리학, 소설, 시 등을 닥치는 대로. 이를 통해 둘은 자신의 부족함과 약함을 들여다 보게 되고, 마치 수동 카메라의 사진 현상 같이 더딘 답장의 기다림 속에서 서로의 자리도 점차 자라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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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나 '쿨'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연인 사이에도 오해가 있기 마련인데, 하물며 고백도 못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면 그것은 끝없는 괴로움과 슬픔 그 자체인 셈이다. 이즐라는 자신이 제안한 약속의 문 앞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저 문을 열고 나아갈지 아니면 이대로 문앞에 선 채 좋은 친구로 머물러야 하는 것인지를.

 

 

둘의 결말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림체와 말투만큼이나 밝고 희망적이다. <129페이지로 보내는 편지>는 결말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매 편지에서 내쉬고 들이 마시는 호흡 하나하나가 더 값지다. 이를 테면 감정을 언어로 객관화하는 노력,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방식으로 좋아하는 즐거움, 사소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일상을 재발견하는 기쁨 등 전력을 다해 사랑할 때 비로소 만나게 되는 것들을 오롯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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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는 재미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하지만 글보다 이미지가 더 익숙한 시대에 만화는 더 이상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니다. 인간을 탐구하고 가치관을 확장하는 또 하나의 문학이다. 카톡 이별이란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요즘, 밤새 좋아하는 사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사랑을 하는 것은 특별하고도 소중한 경험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달지 않은 나이의 독자들도 단지 만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시절의 감성이 되살아날 것이다. <129페이지로 보내는 편지>는 만화계의 ‘응답하라 1994’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열아홉 번째 편지의 추신으로 구독을 권한다.

 

 

 

“P.S. 무엇에도 미쳐있지 않은 사람은 평범한 게 아니라 불쌍한 거야.”

 

 

 

< 출처 : 에이코믹스 https://acomics.webtoonguide.com/archives/144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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