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제해도 괜찮아] #08 『자꾸 생각나』
『자꾸 생각나』
송아람 | 레진코믹스 | 총 25화 | 각 화 2코인, 총 50코인
개성을 어필하고 전문성을 기를 수 있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자신의 취향을 고집함은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이다. 취향의 다양함은 그 취향을 가르는 조건의 다양함을 전제로 하는데, 그 중에서도 장르의 구분은 독자들에게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선택지로서의 역할을 해 왔다. 그 가운데‘분명히 익숙하고 자주 접했던 스타일이나 막상 구분 짓자니 어려운’작품들도 있기 마련이고,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런 독특한 작품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독자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준다. 레진코믹스에서 연재하고 얼마 전 완결된 송아람 작가의 『자꾸 생각나』역시 그런 부류에 속하니 다양한 장르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라면 꼭 눈여겨보자.
공동 작업실에서 주로 일러스트 작업을 하는 미래(장미래). 작가 데뷔가 꿈이지만 아직은 습작으로 그칠 뿐인데, 어느 날 만화가 도일(최도일)과 그의 후배 만화가인 승태(백승태)와 술자리를 가지게 된다. 작가와 팬이 만나는 것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도일에게 상당한 호감을 지니고 있던 미래에게는 특별한 일이었다. 작품 속에서 동성 혹은 이성이 만남으로서 생겨나는 특별한 감정은, 때로 감정이 생겼다는 사실만큼이나 그 원인을 제대로 밝혀주지 않으면 이야기의 설득력이 떨어지기 쉽다. 사실미래와 도일은 각자 애인이 있었지만, 긴 연애와 불투명한 앞날에 지쳐 있던 터였다. 어쨌거나 이들의 첫 만남 역시 둘만 따로 만났다면 달랐겠지만, 도일의 애인인 명지(유명지)가 술자리에 합류하는 탓에 겉으로 보이지 않을 뿐 사실은 은밀한 교감이 오가는 상태에서 끝나게 되고, 그 와중에 미래를 마음에 두고 있던 승태의 사심만 커진다.
삼각관계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고, 사실을 부풀리는 것 역시 드문 일이 아니라지만, 속한 출판사에서 자신이 가진 위치를 그럴싸하게 포장하여(사실 승태는 진짜로 그렇게 믿고 있다) 미래의 호감을 얻으려 하고, 의도적으로 도일을 나쁘게 이야기하거나 거짓말을 해서 도일을 만남에서 배제하는 승태의 속물 같은 행동은 왠지 밉지 않지만 비난을 받아 마땅하긴 하다. 그러나 애초에 미래는 승태에게 애정으로 발전할 만한 감정의 건더기가 전혀 없었던 상황. 설상가상으로 승태가 소개해 준‘자유창작’의 사장은 미래가 며칠 밤을 새서 완성한 작업물에 대해서 그리 좋은 평을 내주지 않는다. 잔뜩 기대했던 만큼 크게 낙심한 미래는 도일과 술자리를 마주하게 되고, 결국 마음과 몸 모두 선을 넘고 만다. 사람 일은 알 수 없다거나 인과는 덧없이 흘러간다는 흔한 속담대로, 미래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기 위해서였던 승태의 못난 행동은 오히려 도일과 미래가 이어지는 데 수저를 얹은 셈.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미래와 도일의 건너편에는 승태와 겨자(김겨자)가 이야기를 쌓아간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것으로 따지면 다른 인물들과 비슷하지만, 겨자는 승태와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파격적인 성향으로 만화계에서 많은 관심을 얻고 있는 겨자는 채식주의자이고 연애를 혐오하며 지극히 현실주의자이기도 한데, 재능과 적성보다 끝까지 버티는 참을성을 작가의 덕목으로 내세우는 승태에게 겨자는 버틸 수 있는 것 자체가 사치일 수도 있기에 안 되는 걸 계속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맞받아친다. 작가는 미래와 도일의 밀회에 대해서는 마음이라는 키워드를 강조하며 독자들을 윤리와 비윤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만들지만, 작품이 마음대로 안 되어 내내 갑갑해하는 미래나 단지 버티기만 할 뿐 성취가 거의 없는 승태, 책이 잘 팔리지 않아 고민하는 ‘자유창작’의 사장, 적성을 찾아 만화를 그만두고 작은 술집을 차린 선배 등 작가와 관련업계종사자들의 분신이라고 할 만한 캐릭터들을 유기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이상과 현실에 대한 묵직한 고민거리를 던진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다툼 한번이 없을 리 없고, 아무리 안 맞는다고 해도 사람은 가까이 지내면 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미래와 도일은 각자 기존의 연인과도 결별하고 떳떳하게 연애하려 하지만, 도일은 조금씩 미련이 남았고 미래는 도일의 미련을 알아차린 데다가 작품마저 마음대로 안 되어 머리가 복잡하다. 바위도 얼었다 녹음을 반복하다 마침내 갈라지듯, 사람도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이고 화를 내며 다투다 힘들게 마음을 추스르는 일이 반복되면 그 누구도 사랑을 유지하기 어렵다. 차라리 눈치도 없을 뿐더러 끝까지 속물근성을 버리지 못한 승태가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집요할 정도로 디테일을 살린 『자꾸 생각나』의 결말은, 현실은 서사보다 더 서사적이고 그것은 곧 우리의 일상이며, 단순히 개인의 행동만으로 윤리와 비윤리를 따지기에 세상은 너무나 복잡하다는 즐겁지 않은 교훈이다.
서두에서의 언급만으로 이 작품을 정의하기엔 역시 뭔가 부족하다. 단순히 독특한 만화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장미래와 최도일을 비롯한 캐릭터들의 확연한 개성과, 도통 정의할 수도 없고 규정할 수도 없으며 예측은 더더욱 불가능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놓고 오가는 미묘한 심리, 더하여 애정과 자부심으로 가득하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만화인들의 일상이라는 실들을 리얼리티라는 바늘에 꿰어, 교묘하고 촘촘하게 짠 뒤 사람 냄새로 진하게 염색한 한 장의 직물이다. 이 작품에 뭔가 꽂힌 느낌이 들었다면 동 작가의 단편『대구의 밤』 역시 추천한다. 특히 여성 독자에게 소소한 씁쓸함을 줄 만한 작품.
< 출처: 에이코믹스 http://acomics.webtoonguide.com/archives/21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