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까칠한 엄친아x무모한 사랑둥이 - "커밍아웃노트"
친애하는 나의 노트와, 내 커밍아웃 노트를 읽을 누군가에게.
안녕, 나는 23살 우도경이야. 나는 얼마 전 생애 첫 소개팅을 했어.
결과는 대실패…. 멘붕 상태에서 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어. 그게 말이지… 말할 수 없는….
‘SAYO / DEAN,MAY’의 <커밍아웃노트>는 스물 셋의 평범한 대학생, 우도경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고등학생 때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노트에 고이 적어 온 유쾌하고 발랄한 성격의 소유자, 우도경. 아직 첫 연애도 해보지 못한 그는 큰 결심 후에 소개팅을 나가지만, 결과는 그야말로 참패였다. 소개팅이랍시고 과도한 매너를 선보이다가 도리어 '이쪽이 맞냐'는 소리까지 들으며 대차게 까인 그는, 소개팅을 주선해준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답답한 마음에 ‘나 게이 맞다고!’ 라고 크게 외쳐버리고 만다. 그리고 깨닫는다. 통화하던 장소가 다름 아닌 학교 화장실이었다는 사실을.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 것인지 깨달은 도경은 불안한 마음으로 화장실을 나오지만, 불행하게도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 만이 그를 반겼다. 다른 사람과 통화 중이던 친한 선배, 헤드폰을 끼고 노래를 듣고 있던 같은 과 동기가 거기 있었다.
통화 중이었고, 노래를 듣고 있었다면 그의 선언을 듣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마저도 확실하지 않기에 도경은 크게 불안해한다. 혹시나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말을 들었다면… 들었는데도 말하지 않고 모르는 척 하는 거라면…. 차마 본인들에게 묻지는 못하고 머리만 싸매고 괴로워하던 도경은 괜히 제 발이 저려 두 사람이 하는 부탁이라면 무조건 들어주게 되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런 도경을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도경이 화장실에서 외치던 소리를 옆 칸에서 여과 없이 들어버린 이현과 동기이자, 도경에게는 선배인 유상균. 친분이 있는 선배 이현도, 같은 과 동기도 아닌 엉뚱한 사람이 도경의 비밀을 알아버린 것이다.
잘 생긴데다가 공모전에 나갔다 하면 수상을 휩쓸어 오는 건 기본에 돈도 많지만, 워낙 소문이 흉흉한 상균 덕분에 도경은 혼란에 빠진다. 거기다 수업 과제로 내준 공모전에 같이 나가자는 제안에 더욱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지는 도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균과 함께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도경은 점점 그가 좋아지는 것을 느낀다. 말은 거칠고 험해도 꼬박 도경의 과제를 도와주기도 하고, 밥도 사주고, 디자인 위주의 건축을 싫어하지만 도경이 가져온 난해한 디자인 위주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공모전 작품을 준비하는 상균의 다정함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상균과 처음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자신을 보고 혐오한다는 말을 했을 때는 ‘게이’인 자신을 혐오한다는 줄 알고 좌절했던 도경은, 사실 그가 도경이 아니라 디자인을 혐오한다는 걸 알고 나서는 안도한다.
‘선배는 저 안 불편하세요?’
‘내가 알던 네가 그 사실 하나로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그저 너에 대해 좀 더 알게 된 거지, 우연히. 굳이 알 필요는 없던 사실이긴 했지만, 알게 되었다고 해도 별로 기분 나쁠 일은 아니야. 그건 그냥 네가 가진 '사실'중 하나니까.’
고등학생 때 같은 반 반장이 아웃팅을 당하는 모습이 트라우마로 남았던 도경으로서는 무척이나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그 시절, 커밍아웃을 할까 망설이던 도경이 소중히 여기던 사람들로부터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상균이 해준 것이니까. 이것을 기점으로 도경은 상균에 대한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지지만, 그가 저와 같은 동성애자가 아니기에 표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집에서 우연히 발견한 사진 한 장으로 상균이 저와 같은 동성애자였고 그 사실을 숨겨 왔다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그런 도경을 배려해 상균은 그와 거리를 두지만 충격도 잠시, 도경은 간단히 그 거리를 좁혀간다.
하지만 상균은 자신이 겪어 왔던 동성애자로서의 고민과 속상함을 알고 있기에 도경을 한 번 더 배려한다. 아직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보지 못한 도경이 동성애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과 서로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남들에게 드러낼 수 없다는 고통을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도경은 상균의 밀어냄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만다. 조금 더 신중하고 싶고 선택의 여지를 주고 싶었던 자신과는 다르게 무모할 정도로 솔직한 도경의 고백에 상균도 결국은 그저 웃어버린다.
이렇게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조금은 어렵게 연애를 시작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남들에게는 그저 친한 선후배 사이일 뿐이다. 그래도 그 사실에 위축되거나 상처 받지 않고 웃어넘길 수 있는 것 또한 그들이 가진 에너지이자 매력이 아닐까? 주인공인 도경이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그건 상균의 독백을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이에 대해 몇 번이고 공감하는 바이다.
‘우도경은 대체 왜 이렇게 무모하고 대책이 없는 걸까. 남자를 만나본 적도 없다면서
신중함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주제에 대체 뭘 믿고 이렇게 자기 감정에 충실한 걸까.
부럽고, 사랑스럽게.’
이 작품의 매력은 그런 게 아닐까? 아웃팅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주인공이지만 그를 어둡고 우울하게 표현하지 않고, 그저 보통의 대학생으로 에너지 넘치게 그려낸 점이 말이다. <커밍아웃노트> 라는 제목만 보았을 때도 무언가 사연이 깊고 조금 더 어두운 내용일 줄 알았는데 그런 생각은 보기 좋게 배신당한 격이다. 하지만 보다 더욱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나서 기쁘다. 커밍아웃 노트라는 곳에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방식도 굉장히 독특하고 재미있다. 노트에 글을 써내려 갈 때 ‘친애하는 나의 노트와, 내 커밍아웃 노트를 읽을 누군가에게.’ 라고 시작하는데 이 때문인지 정말 그의 노트를 훔쳐보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 마치 그들만의 비밀스럽고 설레는 연애를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랄까. 때문에 저도 모르는 사이 그들의 사랑을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작품의 끝자락에 도경은 노트에 이런 말을 써내려간다.
‘꼭 한 가지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그건 생각보다 내가 평범하다는 사실이야.
그러니까 나를, 혹은 나와 같은 사람들을 가장 보통의 시선으로 바라봐 준다면 나는 너무 고마울 것 같아. 나는 충분히 행복한 보통의 삶을 살고 있고 특별히 특별할 것이 없는 보통의 사람이니까.’
이 말 한 마디로 그들의 사랑을 응원할 이유는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커밍아웃노트>는 담백하고 진솔하게 또 사랑스럽게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등장하는 인물들마다 개성도 강하고 이야기 내내 마냥 달달하거나 쓰지도 않으며, ‘적당히’를 아는 작품이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개그 요소도 적정수준의 함량으로 포함되어 지루할 틈도 없다. 대학의 리얼 라이프도 세밀하게 잘 표현 되어 있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본 일이라며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까칠한 것 같지만 누구보다 다정하고 무모한 것 같지만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꼭 한 번 읽어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