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기점도 지나친 - 소녀 더 와일즈
라이트노벨 제목처럼 이야기하자면, <내 클래스메이트 들이 전부 여자라 불행한 사랑 싸움에 휘말린 사건>. 제목은 <소녀 더 와일즈> 건만 여기 나온 소녀들은 와일드하지도 않고, 연애에 대해 진지하게 다룰 줄 알았건만 그마저도 아니다. 이제 남은 건 갑질 뿐이니 불행한 우리의 대리만족을 위해 갑질이라도 실컷 해주시길.
픽션에 현실이 끼어들면 작품은 짜증나게 변한다. 우리네 공상에 차디찬 반지하 단칸방과 빛나는 모니터가 들어오면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과 같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현실은 전혀 반갑지 않다. 환상은 철저하게 환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장자가 아니기에 호접지몽은 필요 없다. 꿈이냐 현실이냐, 그 중간은 애매해서 싫을 뿐이다.
어쩌다 보니 주인공이 원래 여고였던 학교의 유일한 전학생이 되고 여자들은 이 남자가 신기해서 단체로 몰려들고 여자는 남자에게 첫 눈에 반하고, 정말 비현실적이군요! 철저하게 대리만족으로 나가는 작품의 전개는 이렇듯 진지해지면 지는 것이다. 프롤로그 장면부터 작품이 말하지 않던가. 우리는 현실적인 연애에 관심이 없다. 여자 다수가 남자를 좋아하는 게 뭐 어떠냐! 페미니즘적인 관점 이야기를 하며 따진다면 할 말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 작품은 이런 작품이라고 전면에 내세운다면 그걸 가지고 따지는 건 예의가 아니다.
작품은 철저하게 대리만족을 보여준다. 무술을 잘하는 여자가 주인공의 적을 패주기도 하고, 좋다고 달라붙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부자라는 설정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갑질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은 주인공을 위해 이루어진다. 좋지 않은가 하렘, 대리만족. 거기다 주인공이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성장하려는 모습도 보이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작품은 이렇게 깔끔하고 자극적이다.
이 자극적인 전개가 나쁜 방향으로 치달을 때는 단 한 순간뿐이다. 현실이 개입하면 작품은 이상하게 꼬인다. 이를테면 현실적인 연애 문제가 있겠다. 주인공이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 재벌 2세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자책할 때부터 작품은 꼬인다. 판타지와 현실을 부딪히게 하는 것은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눈이 보는 것을 뇌가 이해하지 못해 혼란이 따라온다. 깔끔하게 해결될 갈등도 아니고, 해결된다 해도 재미없는 갈등이다.
작품에 진지함과 현실성을 부여하는 건 정말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때에 따라 그 현실성은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예컨대 <소녀 더 와일즈>에 어울리는 현실성은 남자 주인공이 사륜안을 쓰지 않는 것 정도라 할 수 있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진지함을 찾기엔 너무 멀리 오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