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진코믹스] 웹툰창작실습(2015)
* 웹툰창작실습(2015) *
http://www.lezhin.com/comic/toon_kill
2015년에 정성완 작가가 레진 코믹스에서 연재를 시작해 전 27화로 완결한 호러 만화.
내용은 모 대학의 현직 웹툰 작가가 교수로 있는 웹툰 창작실습과에서 웹툰 원고를 지웠다는 이유로 칼부림 사건이 터지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작화는 2012년에 나온 그녀는 흡!혈귀 때와 비교해서 기본 작화와 컬러링은 거의 동일하다. 사람 피부색은 하얀 색에 배경도 하얀/회색 조합의 모노톤을 기본으로 하고 머리카락, 복장에만 간단한 컬러가 들어가 있다. 근데 컬러 비율이 전작보다 오히려 더 떨어져서 거의 반 흑백 만화에 가깝고 작중 인물 중 유일하게 컬러가 돋보이는 건 노란 머리로 나오는 민형 뿐이다.
변화된 점이 있다면 그녀는 흡!혈귀 때는 단 한 개의 컷만을 위에서 아래로 쭉 나열해서 그린 반면, 본작은 구도에 따라서 1~3컷으로 늘어났다.
쉽게 말하자면, 예전에는 컷 하나당 □ 이렇게 입구 방식으로 그렸다면, 이번 작에서는 상황에 따라 ? 이런 창문 방식으로 상황에 따라 2~3개로 나누어 그렸다는 말이다. 읽는 방식이 수직낙하가 아닌 갈지자형이다.
그렇게 그리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대다수의 신인/기성 작가들이 컷을 씬에 따라 나누어 한 라인에 담지 않고 □ 하나만 복사+붙여넣기 해서 컷을 나열해 놓고 그리는 경우가 많아서 나름 발전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웹툰의 스크롤 뷰어 시점을 활용한 연출이 인상적인 게 하나 있다. 8화에서 김범이 괴성을 지르고 연희가 그에 대한 리액션을 할 때 김범과 연희의 원룸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 아래로 나뉘어져 있는 그림을 한 장으로 길게 그려낸 것이다. (게임으로 치면 방 안이 한눈에 보이고 등장 인물 머리 꼭대기가 보이는 탑뷰 시점이다)
스토리 같은 경우는, 전작은 인간과 흡혈귀의 달달하고 답답한 로맨스물인 반면 본작은 웹툰과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을 다룬 드라마가 됐다.
정확히는, 사이코 드라마다.
주인공 김범은 4년 동안 웹툰을 그렸지만 별 성과가 없는데 비해 같은 과 강호수는 그리는 웹툰도 인지도가 높고 본인도 엄친아라 현실 세계에서도 위너라서 김범의 여자 친구 미진이 김범을 떠나 강호수에게 가 버려 열등감과 NTR 때문에 심리적 압박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살인까지 저질러 상황이 파극으로 치닫는다.
현시창 인생의 주인공이 열등감에 빠져 괴로움에 번민하다가 결국 미쳐서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 드라마는 흔해 빠진 이야기지만 거기에 웹툰 소재를 첨가하니 신선하게 다가온다. 항상 먹던 야채 샐러드에 드레싱만 바꿨는데 산뜻한 맛이 나는, 그런 느낌이랄까.
김범의 미쳐 가는 과정에서 범죄 모의 혹은 살인 욕구를 웹툰 콘티로 풀어내는 것부터 시작해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콘티화시켜 웹툰으로 그려내는 것, 여자 친구랑 헤어지고 친구와 사이가 멀어지다 못해 원수지간이 된 것 등등 모든 사건의 갈등이 웹툰에서 출발하고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어 웹툰 소재의 아이덴티티를 충실히 지켰다.
김범을 미치게 한 원인을 제공한 주변 인물들도 모두 제 역할을 다 했다. 남자 갈아타기 모드를 발동해 본격 X년 무쌍을 보여주는 미진과 틈만 나면 김범을 도발하며 그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강호수, 유일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실은 본인도 열등감 덩어리라 시한폭탄이 되어 김범에게 장렬한 통수를 날린 이민형 등등 김범의 사이코드라마를 완성하는데 있어 누구 하나 빼놓을 수 없는 퍼즐 조각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최종화다.
최종화인 27화가 프롤로그 내용이 동일한데 여기에 어떤 대사 첨가나 수정 하나 없이 1화 원고를 재활용했다. 복사+붙여넣기 수준이다.
물론 26화랑 27화가 내용적으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오프닝/엔딩이 똑같은 거라 왜 이렇게 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다시 보면 느낌이 색다를 것이다!’ 이걸 노린 것 같긴 하나, 단순 복사+붙여넣기로 끝낼 것이 아니라 엔딩에는 엔딩만의 추가 내용이 있었어야 됐다고 본다.
최종화가 내용만 놓고 보면 나름대로 여운을 줘서 나쁘지는 않은데 그게 프롤로그랑 똑같은 게 옥의 티가 돼서 좀 더 완성도를 높이고 싶었다면 프롤로그와 엔딩을 따로 그렸어야 됐다고 본다.
결론은 추천작. 열등감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미쳐서 살인을 저지르고 파극으로 치닫는 것 자체는 사이코물로서 흔한 전개일 수 있지만 거기에 웹툰 소재를 첨가하는 것으로 신선함을 가미했고, 작중 인물들이 한 편의 사이코 드라마를 만드는데 있어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다해서 스토리가 튼실하고 몰입도 잘 되며, 작화에도 컷의 분할 개념이 들어가 있어 전작보다는 조금 발전한 모습을 보여준 작품이다.
여담이지만 이 작품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데이타 ‘백업’이다. (여러분, 백업을 생활화합시다!)
덧붙여 의도한 건지, 아니면 작풍이 본래 그런 건지 몰라도.. 작중에 김범이 고양이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연희의 눈동자와 프롤로그/최종화에서 형사와 대치한 김범을 보는 연희 어머니의 눈동자가 어쩐지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의 명탐정 우사미를 연상시킨다. 분명 심각하고 진지한 장면인데 범인을 보는 우사미 눈동자가 생각나서 본의 아니게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추가로 작가 후기에도 자책성 개그로 나온 거지만 작가가 진짜 고양이를 못 그린다. 사실 작화 퀄리티 자체가 그렇게 높은 건 아니어도 간결한 그림체로 나름대로 개성도 있어서 나쁘지는 않은데.. 인간적으로 고양이를 너무 못 그려서 실드를 쳐줄 수가 없다. (특히 고양이의 인중 묘사가...)
애초에 작가가 동물 그림을 전혀 안 그려본 것 같다. (하긴 전작인 그녀는 흡!혈귀에서도 동물은 안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