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풀 군바리> - 보낼거면 '여자'를 군대를 보냈어야지
설이 & 윤성원, <뷰티풀 군바리>
- 보낼거면 '여자'를 군대에 보냈어야지
0. 역지사지(易地思之)
▲ 너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이번 리뷰는 조금 곁가지 얘기부터 해보자. ‘내가 네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는 것’은 타인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이기에 많은 철학자들이 중요하게 다뤄온 주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우리 모두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역지사지라는 말을 주문처럼 달고 살아왔다. 하지만 말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쓰면 쓸수록 처음의 꺼끌꺼끌한 어감이 사라지면서 매끈하면서도 속이 빈 것이 되어버린다. “아니, 우리 역지사지로 생각해보자”라는 표현을 생각해보자. 나는 별로 그럴 생각 없지만, 네가 좀 생각을 고쳐먹었으면 좋겠다는 의도가 깔린 말로 쓰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타자(他者)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여전히 상대의 생각과 경험에 대한 그럴 듯한 추측을 해볼 수는 있을지언정, 어쨌든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즉,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기획은 본질적으로 매우 지난한 시간동안 끈질기게 몸부림쳐봤자 ‘근사적으로만’ 해결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 “준비된 ‘여자’부터 입대 개시!”
그렇다면 <뷰티풀 군바리>에서 군대를 둘러싼 남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채택한 ‘여자를 군대에 보내는’ 설정과 서술방식이 얼마나 느슨한지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먼저 우리는 정말로 ‘여자’를 군대에 보냈는가? 그리고 왜 ‘여자’를 군대에 보내야만 했는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여자가 ‘군대’를 간다는 만화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이번 리뷰에서는 ‘작품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 말고, ‘작품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1. ‘여자’를 군대에 보내기
질문에 대해 본격적으로 대답하기 전에 먼저 이동건 작가가 네이버에서 연재 중인 <유미의 세포들>에 대해 짚고 넘어가보자. 독자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온 작품이라면 대부분 9점 후반의 별점을 받곤 한다. 그런데 <유미>는 그 중에서도 10월 2일 기준 <유미>의 평균 별점은 9.98로 거의 만점에 가까운 수치를 보이고 있다. <유미>의 많은 독자들은 작품의 인기요소로 이동건 작가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보다 여자의 심리를 더 섬세하게 그려낸다’는 점을 지목한다.
▲ 여심을 낚고 있습니다. (<유미의 세포들> 中)
다시 <뷰티풀 군바리>를 보자. 이 작품은 정말로 ‘여자’를 군대에 보냈는가? 랩퍼 더콰이엇이 'Profile'이라는 곡에서 “뭘 하겠어 겉만 남자인 기집애가”라고 말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안타깝게도 작가는 ‘겉만 여자인 사내놈’을 군대에 보낸 뒤에 그 위로 자신의 군생활을 덧씌워 ‘군대만화’ 장르의 클리셰를 답습하고 있다고 말해야겠다. 그러나 그것들은 적어도 이미 기안84가 <노병가>에서 끝낸 얘기들이다.
그 반복들과 차이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지점은 ‘여자’의 성별을 가진 캐릭터를 그려냈다는 점이다. 한번 나열해보자. <뷰티풀 군바리>의 주인공 ‘정수아’는 가슴이 매우 크게 그려진다. 작중 등장하는 선임들의 생리대를 후임들이 챙긴다. 휴가를 다녀온 말년이 성형수술을 받고 복귀한다. 훈련소에서 남자 훈련병들이 여자 훈련병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 무섭...
그러나 이는 부차적인 디테일에 지나지 않는다. <뷰티풀 군바리>의 스토리를 진행시키는 힘은 일반적인 남성들의 군생활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작품에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들은 대부분 ‘보이쉬’하거나, ‘과묵’하거나, ‘차가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대사에서 ‘년’을 ‘놈’으로 바꾸고서 남자 캐릭터가 읽게 하는 것만으로도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유미>가 보여주고 있는 여성을 가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없다는 것이다. ‘남자’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군대’라는 조직에 ‘여자’를 대신 집어넣었을 때 발생하는 균열을 포착해내는데 실패한 이유다. 내 기준에서 이 작품은 아직 ‘여자’를 군대에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2. 정수아는 ‘왜’ 입대해야 했을까?
사실 <뷰티풀 군바리>는 마치 ‘진짜사나이 여군특집’처럼 오락적인 측면에서 꽤 괜찮은 작품이다. 네이버 월요웹툰에서 <신의 탑>, <대학일기>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한국 만화시장에서 군대를 소재로 한 만화는 일종의 서브장르로 정립되어 있다. 주제는 보통 계급사회의 불합리한 부조리를 다양한 각도에서(보통은 리얼리즘) 그려내는 일이었고, 독자가 작품에서 등장하는 피해자에 최대한 몰입할 수 있도록 연출하는 것이 장르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그리고 그 소비층은 대부분 군필자로 한정되어 있었다.
▲ 그 놈의 ‘깨쓰’ (기안84 <노병가> 中)
이런 상황에서 <뷰티풀 군바리>는 적어도 앞에서 제시한 편견 중 하나를 깨뜨리는 데는 확실히 성공했다. “군대 다녀오신 남자분들 정말 대단하시네요!”같은 댓글처럼 심심치 않게 여성 독자들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대화의 장이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지는 베스트 댓글은 어김없이 “우리가 이렇게 힘들었다니까?”를 토로하는 내용의 댓글이다. 이렇듯 ‘역지사지’의 연장선상에서 주인공 정수아는 군대에 가야만했다.
▲ ‘B.B.B’ 좋았는데 달샤벳은 요즘 뭐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걸그룹의 위문공연과 다를 바가 없다. 위문공연을 보는 일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지만 위문공연에는 전제가 있다. 관람객들은 특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이며, 위문공연은 관람객들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더욱 열심히 수행하여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장치라는 사실이다. 즉, 위문공연이 끝나면 관객은 제자리로 돌아가 더욱더 ‘열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이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남성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군경험자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표현하고, 그것으로 호소의 사이클은 마무리된다. 그러나 분출 이전에 해소되어버린 불만은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릴 수 있을 만큼의 더 큰 메시지로 심화되지 못하고 ‘위로’와 ‘추억팔이’ 속에 사라지고 만다. 여전히 갈등의 진원지는 그대로 남겨둔 채로 말이다. 조금 더 끌고 나아가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이 남는다.
3.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 계속 포인트를 가슴에 잡을래?
<뷰티풀 군바리>는 거의 모든 회차에 걸쳐 성적대상화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사실 이러한 경향은 이 작품만의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다만 꽤나 사회적으로 첨예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이슈를 다루는 웹툰에서 유희요소로 여체의 선정적 묘사라는 전략을 선택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아쉽다. 유려한 그림체와 작화력을 가지고 있는 만큼 이를 십분 활용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그러나 주인공을 ‘젖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캐릭터로 그려낸다는 것은 작가의 인식 문제를 드러낸다.
전수조사를 해보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러나 큰 가슴을 갖고 한국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여성이 자신의 가슴에 쏟아지는 성희롱적인 눈길에 대해 정수아처럼 수줍게 반응하고 싶지 않아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사실 이 작품에서 정수아를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지 모아보기만 해도 특정 장르가 여성을 소비하는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남성이 보고 싶어 하는 방식대로 그려진 여성을 군대에 보내고 나서 남성과 여성의 상호 이해에 대하여 얘기한다면 과연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 맥락과 전혀 무관한 선정적 연출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4. 마치며
▲ 심경이 복잡하다
잠깐만 개인적인 얘기를 하고 싶다. 나는 육군에서 병장으로 만기 전역을 했다. 무사히 전역했지만 정신력이 썩 강한 사람이 아니기에 군생활 동안 심적으로 꽤나 고생을 했다. 군대에서의 나는 2년이라는 시간동안 소모되는 부품이라는 의미 외에 아무것도 아닐 때가 많았다. 그리고 납득할 수 없는 스트레스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없었기에 사회로부터의 고립이 더욱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개인적인 얘기라고는 했지만 비단 나만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마치 북한에서 장애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듯이, 국가는 ‘정예강군’에서 병사들에게 일어나는 각종 부조리한 경험과 사고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상하거나 개선하기는커녕 은폐하려고 하기 일쑤다. 한편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한국 남자들을 ‘군무새’라며 깎아내리기까지 한다. 양성평등이 화두로 떠오른 오늘날, 그렇기 때문에 <뷰티풀 군바리>는 충분히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작가는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을 외치며 시대적 흐름을 외면한 채로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모든 작품이 사회적 이슈에 대해 교훈적 메시지를 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네이버’에서 ‘전체 연령’을 대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라면 대상이 다뤄지는 방식이 최소한 편견을 만들지 않을 정도까지는 안일함을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조금 더 많은 것을 바라기에 <뷰티풀 군바리>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여기까지 온 이상 방향을 바꾸기는 힘들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