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 바로미터 - 잴 수 없는 감정들에 관하여
2년의 이유 있는 휴학을 마치고 돌아온 채운. 조용한 학교생활을 하고 싶지만 자꾸만 얽히게 되는 같은 학과 인기남 사도, 그들 사이에 난입한 열혈 새내기 민규까지. 이들이 풀어가는 세련되고 깔끔한 캠퍼스 로맨스 순정 바로미터.
이상 레진 메인의 소개글이다. 그러나 사실 모든 로맨스 물이 그다지 깔끔하지는 않다. 모든 연애관계는 사진에 찍힌 단편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와 멀다. 오히려 그보다 정리되지 않은 지저분한 스케치 선과 같다. 어떤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리는 초기 단계의 밑그림 말이다. 이 학원 로맨스 물은 그 소개글과는 다르게 깔끔하다기보다는 그 지저분해 보이는 연필선이 그대로 살아 있어 더욱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도 그러한데 스포를 자제하기 위해 프롤로그의 예를들어볼까.
채운은 오랜만에 캠퍼스로 복학하는 첫 날, 화장과 헤어스타일, 그리고 신발까지 고민 고민을 한다. 그러다 결국 가방과 깔맞춤 한 보라색 하이힐을 신고 가는데 왜 그 신발을 신었는지 자세한 설명이 없지만 여자라면 모두 단박에 캣치했을 것이다. 가방과 색을 맞추기 위해서라는 걸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이야기의 세심함이 좋았다. 이건 정말 단편적인 예일 뿐 한 회, 한 회 넘기다 보면 그런 섬세함이 그대로 살아 있어 이야기의 결을 살려 준다.
물론 종종 등장하는 우연들이 지나친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주인공들의 만남 또한 그러하다. 등교길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무슨 일인지를 알아보던 채운은 체감온도 -1도의 날씨에 학교 연못에 입수하는 미친 짓을 하고 상반신 탈의를 하고 나온 사도와 정면으로 마주친다. 알고 보니 동기였던 그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과거의 상처로 인해 사람을 분석하는데 도가 튼 채운은 친구들을 요리조리 분해하여 스캔하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두 번째 우연. 술집 공용화장실에서 마주친 둘, 그리고 친구들. 게다가 알바로 과외를 해줬던 녀석은 같은 학교 대딩이 되어 등장한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 우연들이 아니라면 이 웹툰이 과연 진행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다.
예전에는 청춘 시트콤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무슨 우연을 저렇게까지 남발하는지 아주 지구 반대편에서도 우연히 만나겠다고 비꼬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때 보다 이십 년 쯤 더 나이를 먹고 보니, 이제는 과거의 내 모든 추억들이 참으로 아이러니한 우연들에서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실제로 우연을 빼놓고 우리 인생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우연히 내가 경품으로 탄 공용 티셔츠를 하루만 빌려 달라고 했던 그 오빠는? 인터넷 음악 카페에서 만난 녀석이 알고 보니 내 앞자리였던 그 아이는?
그리고 이어지는 수많은 추억들 중 우연으로 시작되지 않은 것들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우연을 무시해 필연으로, 그리고 운명으로 만들지 못한 것은 나의 노력부족 때문이었다. 한 번의 상처가 두 번이 되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자꾸만 꼬이는 인연들을 잘라내고, 또 잘라내고.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하지만 정말 이기적이었던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남아주기를 바랬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인간을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고서 말이다.
그런 면에서 채운은 여러 가지로 나와 닮아 있는 캐릭터였다. 그 아이만큼이나 대단한 스캔들의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와 만나서 사랑하고 헤어지는 일이 뭐 그리 대수라고 그 때는 그토록 구설의 중심이 되는 것을 아파했을까. 만약 그 때로 돌아간다면, 웹툰 속의 채운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당당해 지라고 말해주고 싶다. 누군가를 아껴서 받은 상처만큼 너를 더 사랑하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