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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뢰진(地雷震)

툰가 10호 | 2016-12-16 11:12

지뢰진 특성

지뢰진(地雷震)

다카하시 츠토무(高橋ツトム) | 코단샤(講談社) / 세주문화, 서울문화사 | 1992년 연재 시작 | 19권(완전판 10권) 완결



“살아있는 인간에겐 반드시 그림자가 있다. 그건 그 사람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그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지. 하지만 사람마다 그림자 색깔은 모두 달라. 빨간 사람도 있고 파란 사람도 있다. 난 사람을 볼 때 반드시 그림자를 본다. 범죄자의 그림자는… 한없이 어둡지….”


– <지뢰진> Last File ‘LIFE’ 중 이이다 쿄야의 말



“인간이 설치한 것(=지뢰)에 의해 인간이 막을 수 없는 것(=지진)이 일어난다. 그것이 범죄다.” 제목인 ‘지뢰진(地雷震)’에 대해 다카하시 츠토무가 말한 바는 <지뢰진>에서 나타나는 범죄의 양상 그대로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지진, 즉 범죄는 일종의 자연재해처럼 다가온다. 범죄는 인간이 아니라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인재(人災)지만, 파괴력은 자연재해인 지진 못지않다. 게다가 지진대(地震帶)는 정해져 있지만, 인간의 뒤틀린 욕망은 언제 어디든 도사리며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지뢰는 한없이 어두운 그림자 뒤에 숨어 조용히 불꽃을 머금는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 촉발되지만, 사건이 일어난 다음부터는 범죄를 일으킨 인간조차도 컨트롤할 수 없다. 이것이 하드보일드의 걸작 <지뢰진>이 정의하는 범죄다.



地雷震01



신주쿠서 강력계 형사 이이다 쿄야는 경찰과 범죄자 세계에선 꽤나 알려진 인물로 통한다. 과묵하고 비정한 성격으로, 정의감에 불타지도 범죄에 분노하지도 않는다. 그는 범죄를 종식시키기 위해 뛰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순간 저지하기 위해 나서는 것처럼 보인다. “신발 밑창 다 닳도록 범인을 쫓아다녀도 범죄가 줄진 않아. 범죄가 줄도록 노력하는 것 따윈 웃긴 일이지.”(File2. 가책), “함부르크는 아무것도 안 변한다. 또 다른 디어칼테가 나타날 테니.”(File5. 세상의 소금)라는 다른 캐릭터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하드보일드 소설과 마찬가지로 사건의 배후에 일개 형사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악(巨惡)을 배치한다. 그러나 이이다 쿄야가 맞서는 거악은 정경을 장악한 거대 범죄조직 따위가 아니라, 범죄 그 자체다. 인간이 사라지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거나 줄어들지 않을 욕망, 증오, 살의, 그리고 그에 따른 추악한 범죄 그 자체. 쿄야는 분명히 알고 있다. 자신이 움직이는 것은 모든 범죄를 발본색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앞에 던져진 범죄를 우선 끝내기 위함임을. 범죄자의 목숨보다도 중요한 것은 당면한 범죄의 완전한 해결이라는 것을. 때문에 설령 범죄가 해결된다한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변의 누군가를 구하는 것도, 사회정의를 드높이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그저 범죄와 함께 살아갈 뿐이다. 그의 말마따나 그에게 형사란 직업은 “호흡 그 자체”다.


하드보일드는 장르라기보다는 스타일에 가깝다. 비정한 세계관, 고독한 탐정, 섬세한 일인칭 독백, 음모와 배신, 팜므파탈 같은 요소들은 더 이상 하드보일드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양한 윤색과 변형을 거쳐 다방면으로 가지를 뻗어나간 오늘날 하드보일드는 비정한 세계관, 고독한 탐정으로 합일되는 하나의 스타일에 더욱 밀착했다. <지뢰진>은 비정한 분위기에 더해 스타일에서도 극단의 하드보일드를 지향한다. 애초에 범죄자의 정체를 감출 생각일랑 아예 없다. 처음부터 이이다 쿄야와 대적하게 될 적을 독자의 눈앞에 풀어놓는다. <지뢰진>이 집중하는 것은 오로지 범죄를 일으키는 인간의 뒤틀린 욕망이다. 28개 에피소드, 28개 사건을 통해 다양한 공간에 다양한 사건을 형상화하는 사이, 비정한 세계와 그에 맞서는 쿄야의 행동은 자연히 <지뢰진>의 모든 스타일을 정의한다.



지뢰진 2


<지뢰진>이 소재로 삼고 있는 범죄는 모조리 현대식 범죄다. 매스미디어를 이용해 은연중에 자살을 부추기거나, 장기이식을 통해 기억이 이전된다는 가설을 토대로 범죄를 구현하는 등 한 회 한 회 다채로운 독립성을 가진다. 쿄야는 신주쿠만이 아니라 중국 상하이나 독일 함부르크, 홋카이도와 뉴욕을 종횡무진하며 다양한 범죄와 맞닥뜨린다. 물론 모든 범죄는 절대로 마르지 않는 인간의 다양한 욕망과 맞닿아 있다. 그것은 언니를 자살로 몰고 간 남자를 벌하려는 복수심(File15. -10℃의 증인)이기도 하고, 어릴 적 트라우마로 인한 강박증(File9)이거나, 이이다 쿄야를 향한 호승심(File10. 재도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서브리미널(잠재의식) 효과를 이용해 대량살육을 기도하기도 하고, 주일미군으로서 치외법권을 이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언어로 명확히 정의할 수 있을 만큼 사건이나 범죄 심리는 단순하지 않다. 그 끝이 참혹할 것을 알면서도 범죄를 벌이는 인간도 있고, 영문도 모른 채 꾐에 빠져 벌인 범죄도 부지기수다.


<지뢰진>의 범죄는 인간처럼 다양한 모습을 하고 나타나 마치 생물처럼 영리하게 성장한다. 단지 범죄의 방식만이 아니다. 우발적 범죄가 어떻게 악화일로를 걷는지, 영민한 범죄 집단이 얼마만큼 일개 인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지를 똑똑히 보여준다. 범죄는 날이 갈수록 영민해지며, 악의는 단순해지고 지독해진다.  반면, 쿄야는 전혀 성장하지 않는다. ‘File5’ 함부르크 뒷골목의 대부 디어칼테와 맞서다 오른팔을 다친 쿄야는 이후 마지막 에피소드까지 줄곧 왼손으로 총을 쏜다. 이는 곧 모든 사건이 쿄야를 중심으로, 언제나 ‘순차적으로’ 벌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계속해서 전진하기만 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쿄야는 결코 갈등하거나 변화하지 않는다. 그는 완성된 인간으로서 이 세계의 비정한 법칙을 몸소 증언하는 인물이다. 그는 형사로서 자리를 보전할 생각도 없어 보이며, 때때로 실정법마저 무시한다. 과거 파트너는 쿄야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넌 여전히 안 변했군. 난 너의 그런 억지수사가 싫어서 서장한테 보고했지. 너랑 파트너로 있다가는 목숨이 몇 개 있어도 모자랐으니까. 이이다. 난 범죄를 쫓다가 내 목숨을 잃는 건 후회 안 해. 하지만 너 때문에 개죽음 당하는 건 납득할 수 없었다.” 이에 쿄야는 반박한다. “전혀 안 변했다고 했지? 6년 전에 네 장난으로 계속 추적하던 수사가 중단되어 결과적으로 희생자를 더 내고 말았지. 이번에도 똑같다. 날 저지하면 반드시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올 거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방식을 확신한다. 범인의 죽음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늘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그로 인해 범죄자는 오히려 그에게 동질감을 느낄 정도다. “이제 알았다. 이이다. 넌 형사 따위가 아니구만. 항상 죽음이 등 뒤에 없이는 못살아 가는 존재야. 남이 죽는 것에 대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못 느끼는. 넌 나와 같은 부류다.”(File10. 재도전).


지뢰진


범죄에 대응하는 이이다 쿄야의 기조는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자신의 목숨이나 주변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것. 둘째, 굳이 범죄자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 것. 셋째, 형사라는 입장에 얽매이지 않는 것.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 것이 고결한 희생정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면 오해도 큰 오해다. 단지 그에게 있어 자신 혹은 범죄자의 목숨까지 고려한다는 것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가장 미온적인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인지 쿄야의 방식은 언제나 범죄자 심리에의 완벽한 이해에 의거한다. 때로는 그보다 더 지독하다. 어린아이를 인질 삼은 범인에게 인질과의 도주를 제의하고(File14. Thrill & Real), 아들의 잘못에 책임을 지겠다는 어머니에게 총을 건네 아들의 머리를 겨누게 한다(File15. -10℃의 증인). 파트너인 아이자와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우리 쪽은 형사 한 명을 잃을 뿐이지만 넌 아내를 잃게 돼. 미안하지만, 형사는 또 얼마든지 있거든.”(File24. 파트너)이라며 범인을 도발한다. 살의에 불타 돌을 든 사람에게는 “이 상황에서 죽일 셈이오? 차라리 딴 기회를 찾으시오.”(File27. 사육제)라고 설득한다. 쿄야의 방식은 마치 살의에 또 다른 살의로 맞불을 놓는 것처럼 그려진다. 마치 그것만이 범죄를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양 말이다.


사람을 죽인 것은 어떤 느낌이었냐는 질문에 쿄야는 답한다. “한번 하고 나면 그만둘 수 없지.” 쾌감이라는 뜻일까? “해석은 자유”란다. 아마도 자신이 사는 세상은, 가족이 있는 선배 형사 나리타의 세계와는 다르다고 말한 데에 답이 있을 것이다. 그는 이상하리만큼 연고가 없다. 나리타의 선배 형사였던 쿄야의 아버지는 잘못해서 시민을 쏴 질타 받다 자살했으며, 어머니는 그가 태어날 때 죽었다(전 에피소드를 통해 딱 한마디씩만 언급되고 있다). 다른 가족은 일절 없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 생각도 없다. 그에게 살인이란 한번 저지르고 나면 자의든 타의든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한 그의 그림자는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다. 한없이 어두운 범죄자의 그림자와는 달리 쿄야의 그림자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너무나도 많이 짊어져서 밝은 색인지 어두운 색인지 구별도 안” 간다. 쿄야의 말마따나 그에게 죽음이란 곧 “패배”다(File19. HUSH). 그는 아무런 목적도, 지킬 것도 없이, 그저 지지 않기 위해 끝내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계속해나갈 뿐이다.


변화는 온전히 쿄야의 파트너인 아이자와 에리코의 몫으로 남는다. 순직한 쿄야의 전 파트너 야마키의 자리를 메운 여형사 아이자와는 쿄야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그는 가족도 약혼자도 있다. 그러나 죽은 야마키와는 달리 쿄야의 세계에 스스로 뛰어들어 점차 변해간다. 물론 때때로 홀로 사건을 담당하기도 하는 아이자와만으로 사건을 전개한다한들 참혹한 건 매한가지다. 하지만 아이자와의 시선은 쿄야와는 다르다. 단순히 범죄가 해결된 것만으로는 개운치 못하다. 범죄는 해결됐지만 그 뒷맛은 쓰디쓰게 남아 ‘어쨌든 끝났다’며 눈물을 보일 수밖에 없다. 아이자와의 시선은 쿄야의 등 뒤에서 <지뢰진>이라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멀찍이 바라보던 독자마저도 쓸쓸히 감싸 안는다.



지뢰진 3



모든 에피소드는 한 권 안에 마무리되고, 후반부로 갈수록 한 권 분량의 굵직한 에피소드들이 작품을 채운다. 그러나 마지막 에피소드 ‘LIFE’만큼은 단행본 2권 분량으로 <지뢰진>의 결말을 그린다. 아이자와의 결혼식에서 벌어진 정신이상자의 총격으로 인해 아이자와는 배우자를 잃고, 하객으로 참석했던 나리타의 딸 아츠코도 죽음에 이른다. 뇌사상태에 이른 아츠코의 심장을 이식받은 킬러 케이는 심장에 새겨진 아츠코의 기억이 자신에게 계속 관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기억 속에 계속 모습을 드러내는 쿄야를 포함해 주변인들을 차례차례 제거하기로 한다.


장기이식에 따른 기억이전 가설로 유발된 범죄는 쿄야로 하여금 처음으로 갈등에 빠지도록 만든다. 자신을 좋아했던, 그리고 쿄야 자신도 분명 좋아했을 아츠코는 그동안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범죄자를 겨누던 쿄야를 고민에 빠뜨린다. 그는 술잔을 앞에 두고 밤새 고민한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남긴 ‘마지막 파편’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아무리 확고부동한 쿄야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나 결국 이번에도 방아쇠는 당겨진다. 살인범 케이는 쿄야와 맞닥뜨렸던 다른 범죄자들처럼 쓰러진다. 그러나 쓰러진 살인범 케이의 왼쪽 가슴, 즉 심장을 움켜쥐는 쿄야의 눈은 쓸쓸함으로 가득 차 보인다. 심지어 늘 ‘뱀눈’처럼 묘사되는 그의 눈동자에는 음양의 상징인 태극무늬까지 비치며 그 역시 살인범에게 아츠코를 느꼈으며 지키고 싶었음을 확증한다. 음과 양, 어둠과 빛처럼 쿄야에게도 역시 이번 살인은 살인범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안에 감춰진 빛, 또 다른 한 사람을 다시 한 번 잃는 것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뢰진>의 대단원은 이상하리만큼 낯선, 그의 축 처진 어깨가 장식한다.



<지뢰진>은 1989년 단편 게재 이후 1992년 연재를 시작해 2000년 완결된, 다카하시 츠토무의 데뷔작이다. 연재 초반부터 다분히 회화적인 스타일을 보여주던 그는 때때로 2페이지에 걸쳐 이미지컷을 배치하는 등 비단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스토리텔링만이 아니라, 만화에 있어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란 무엇인지, 다카하시 츠토무만의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물론 회를 거듭할수록 작화의 수준도, 연출도, 소재도, 스타일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성과는 날로 진화하는 범죄를 시종일관 단 하나의 트릭 없이 철저히 해부해 전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중심에는 이이다 쿄야가 있다. ‘HOPE(희망)’라는 이름의 담배를 피며 끊임없이 희망을 소진하는 이이다 쿄야는 범죄의 다양한 양태를 포함해 이를 뒷받침하는 범죄자들의 심리를 늘 냉정하게 응시한다. 이런 쿄야의 시선은 만화 장르를 넘어선, 오늘날 가장 현대적인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라 할 만하다. 아니, 가장 현대적인 하드보일드 작품임에 틀림없다. 덕분에 언제 읽더라도 <지뢰진>이 투사하는 비정한 세계는 날로 달로 잔인해지는 우리의 세계만큼 무게를 더해가는 듯하다. 우리 세계는 딱 <지뢰진>만큼 비정해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출처: 에이코믹스 https://acomics.webtoonguide.com/archives/5428#pretty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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