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집착과 의존의 실타래, <아무런 말도 없이>
[BL] 집착과 의존의 실타래, <아무런 말도 없이>
케이툰 수요웹툰 연재중
글/그림 아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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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학급에서 반장을 도맡으며 모범적인‘척’을 하는 평범한 고등학생 지수. 매사에 마땅한 의욕이 없는 그에게 발칙한 꿈이 하나 있다면 모범생 이미지를 유지하여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은서와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교 옥상에서 은서와 은밀한 스킨십을 나누던 지수. 그 순간 벽 너머에서 기침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 은서는 부끄러움에 도망친다. 소리를 따라 달려가자 지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순수한 눈망울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한 남자 아이. 말을 하지 못 하는 소년, 준영이었다.
그 날 이후 지수는 준영이 반장인 자신의 도움 없이는 학교생활을 잘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라고 쓰고 ‘변명하며’라고 읽는다) 준영과 꽤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체육복 갈아입는 것을 기다려주는 건 기본, 친구가 없어 조별과제에 어려움을 겪는 준영을 위해 같은 팀을 자처하고, 평소보다 급식을 재빨리 해치운 채 옥상에 뛰어 올라가 혼자 도시락을 먹는 준영의 말동무가 되어주기까지 한다.
그렇게 준영은 단풍잎 물들 듯 지수의 일상과 마음을 서서히 뒤흔들어 놓기 시작하고, 지수는 자신의 행동에 낯선 다정함을 느낀다.
과연 지수는 자신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을까? 그리고 준영은 그런 지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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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영과 지수
단정하게 잘 정리된 까만 머리와 뿔테 안경, 지수의 트레이드마크다. 모범생의 정석으로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그의 마음은 그의 머리색처럼 까만 ‘흑심’으로 가득하다. 물론 그 흑심은 오로지 준영을 향한 것. (다른 사람에게는 일절 관심조차 없다.) 말을 하지 못 하는 소년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 자꾸만 챙겨주고 싶어지는 관심으로 변하고, 후에는 그 마음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어지게 된다.
‘장화 신은 고양이’가 떠오르는 맑은 눈빛의 소유자, 준영. 어렸을 때부터 삼촌에게 맞고 자라 온 몸에 흉터가 가득하고, 그 충격으로 말을 잃게 되었지만 언제나 환한 웃음을 잃지 않는다. 친구 없이 혼자 보내는 학교생활에 익숙해질 찰나, 지수가 나타난다. 지수의 흑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영은 어느 순간부터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마냥 지수에게 기대고 의존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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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씨의 존재
웹툰 <아무런 말도 없이>에는 ‘마음씨’가 나타난다. 마음씨는 말 그대로 주인공 두 명의 가감 없는 속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새카맣고 복슬복슬한 먼지를 떠오르게 하는 외모(?)를 갖고 있다. 침착하고 두 사람과는 달리 어찌나 시끄럽고 말이 많은지 늘 두 사람을 졸졸 쫓아다니며 조잘조잘 이야기를 한다. 물론 그 이야기는 모두 준영과 지수의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속 이야기다.
지수의 ‘마음씨’는 늘 지수의 흑심과 준영을 향한 강박적인 사랑에 대해 맹렬하게 비난한다. “호모판타지가 이루어져서 좋냐”, “더러운 위선자 자식”, “너도 서준영이랑 그런 상상 하잖아” 라며 막말도 서슴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작 지수는 매일같이 쏟아 붓는 마음씨의 맹공에도 귀가 간지럽다는 듯 한 번 스윽- 파주거나 책으로 검은 먼지를 깔아뭉개는 것이 전부다. 사실 마음씨가 하는 말은 모두 지수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소리기 때문이다.
준영의 ‘마음씨’도 격하기는 마찬가지다. 지수의 마음씨가 지수의 가식적인 모습을 욕할 때, 준영의 마음씨는 지수에게 한없이 의존해버리는 자신의 나약하고 바보같은 모습을 비난한다. 두 사람은 자신의 마음씨가 하는 말이 모조리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딱히 반박하지 못하고 괴로워만 한다. 결국 ‘마음씨’는 두 사람 각각이 가진 죄책감에서부터 비롯된 존재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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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연애
두 사람의 연애는 고등학생을 거쳐 이십대 중반이 될 때까지도 꽤 오랜 시간 지속된다. 아마 지수와 준영의 달달한 연애 일지를 보고 겨울잠을 자고 있던 연애세포가 깨어난 독자들이 여럿 있을 것이다. 특히 열아홉의 연애와 스물다섯의 연애를 비교하는 맛이 쏠쏠하다.
사실 본 웹툰에서 지수와 준영의 고등학생 때 이야기는 두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게 하는 징검다리 역할이자 하나의 큰 사건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에 분량상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6회까지가 고등학생 때 이야기의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영과 지수의 고등학교 시절 모습이 독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끄는 이유는 두 사람이 아무런 책임없이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눈앞에 닥친 캄캄한 현실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 오고 가는 진솔한 감정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나이. 열아홉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성인이 된 두 사람의 모습은 좀 다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직업이 다르다. 지수는 평범한 대학생이 되었고, 준영은 평범한 백수(?)가 되었다. 대학생인 지수는 강의를 듣고 과제를 하느라 낮 시간에 집을 비우고, 준영은 그 시간동안 햄스터 ‘까까’와 놀며 홀로 시간을 보낸다. 한 집에서 동거를 하지만 사실상 저녁만 같이 먹고 잠만 같이 자는 셈이다. 물론 다행히도, 애정 전선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준영의 일탈 아닌 일탈이 잦아졌을 뿐이다.
준영의 마음씨가 그를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힌 덕에, 준영은 자신이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지수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루의 절반을 집 떠난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마냥 준영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따라서 준영은 지수의 품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해 여기저기 아르바이트를 알아보고, 또 혼자 어딘가 홀연히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한다. 결국 자꾸만 사라지려하는 준영의 모습에 지수의 불안감은 커져가고, 자유를 원하는 준영과 그런 그를 구속하려는 지수의 갈등은 서서히 시작된다. (사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이성적이고 차갑기만 하던 지수가 준영의 앞에만 섰다 하면 감정에 치우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아주 ‘오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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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의미
사랑에는 늘 책임이 따른다. 상대방을 지켜야 할 책임, 연락해야 할 책임, 관계를 이어나가야 할 책임. 그러나 책임감이란 감정이 관계의 주인이 되면 본질이었던 사랑은 녹아 없어진다. 웹툰 <아무런 말도 없이>에서는 책임감, 집착, 의존과 같이 연인 사이에 있어 충분히 오고갈 법한 숱한 감정들을 지수와 준영을 통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때 책임감과 집착은 지수의 몫이고, 의존은 준영의 몫이다.
사실 지수가 준영에게 집착 아닌 집착을 하며 굳이 책임지지 않아도 될 부분까지 책임지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그의 책임감은 고등학교 시절 준영이 지수 대신 살인죄를 뒤집어썼다는 죄책감에서 기인한다. (안타깝게도 그 살인 역시 삼촌에게 피가 떡이 되도록 맞고 사는 준영을 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즉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을 망쳤다는 죄책감이 그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야겠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강박적인 사랑으로 변한 것이다.
지수의 집착으로 인해 준영은 자신이 지수가 없으면 안 되는 ‘쓸모없는 존재’라 생각하며 자책하기 시작한다. 마음씨가 툭하면 나타나 관계에 불을 지피는 것도 분명히 한 몫 하고 있다. 준영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보지만 지수의 방해로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결국 집착과 의존이라는 불가분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이들의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사랑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며 같이 있으면 그 어떤 순간보다도 행복을 느낀다. 다만 그 관계를 묶고 있는 연결고리가 책임감, 혹은 죄책감인 것뿐이다.
연인사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미’다. 어떠한 목적이나 이유가 없어도 맹목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준영과 지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사랑하고 있지만, 이미 마음속으로는 수많은 말을 삼켰을지 모른다. 그들은 서로에게 무슨 의미일까, 또 어떤 존재일까. 노래 ‘너의 의미’가 생각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