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특집 - 고아라 작가 편 : 5. «청소년 영화»

«청소년 영화»는 고아라 작가가 기존에 다뤄왔던 ‘일상적 정서’ 라는 주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제와 스타일을 선보인 작품이다. 그동안 고아라 작가가 일상에서 포착한 다양한 장면과 거기서 유래하는 정서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 전달하는 데 주력해 왔다면, 이 작품에서는 방향을 완전히 바꿔 하나의 온전한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하나 구축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는 전통적인 플롯(plot) 구성이기도 하며, 이를 통해 작가의 의도와 주제의식이 더욱 잘 드러나게 된다.
이야기의 얼개는 이러하다. 주인공 ‘영화’의 친구인 ‘주원’은 모종의 일로 인해 자살하게 되고, 주원의 발인일에 또 다른 친구인 ‘연성’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한다. 장례 도중 연성의 자전거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가던 영화는 뺑소니 사고를 당하게 되고, 그 뒤 주원의 사건과 관련된 대부분의 기억을 잃게 된다. 기억을 잃은 영화는 사건에 관한 단서를 하나씩 찾으며 자신의 기억도 차츰 찾아가게 되고, 그렇게 영화가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과 그에 따른 자기 발견이 작품의 주요 이야기이다.
기존 작품들과 노선을 달리한 관계로 형식에서부터 전작과는 차이가 나기 시작한다. 밝은 톤의 화사한 컬러는 작품의 내용에 따라 어둡고 무거운 컬러로 바뀌었다. 조각난 단서를 찾아가는 형식을 통해 수미일관한 플롯을 전달하고자 영화적 스토리 구성을 시도하였으며, 연출에도 그것을 적용하여 영화같은 와이드한 컷을 종종 선보인다. «청소년 영화»라는 제목을 통해 암시하듯, 작가는 ‘영화’라는 한 청소년의 이야기를 담아냄과 동시에 ‘청소년에 대한 영화’를 그리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 전작과는 상당히 다른 작화와 연출을 보여준다.
작품은 주인공인 영화가 군데군데 흩뿌려진 단서를 찾아가면서 동시에 자신의 기억도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것이 작가 고유의 퍼즐형 전개 방식과 어우러지면서 독자들은 그 단서 자체, 즉 주원이 죽은 진짜 이유와 그 원인을 제공한 인물, 그리고 주변 인물들의 행동과 그 배경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작품의 제목도, 작품의 주인공도 ‘영화’라는 것을 잊지 말자. 작품에서 영화가 겪는 모든 일은 ‘영화가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며, 따라서 ‘그렇다면 영화는 왜 기억을 잃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작품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영화는 연성의 자전거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밝혀지는 것은, 연성이 주원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이며 영화 역시 그것을 기억을 잃기 전에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연성과 함께 주원의 장례에 참석하고, 그것은 영화가 기억을 잃기 전에도 주원을 외면하고 연성의 편에 섰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화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은, 이미 영화가 주원과 관련된 기억을 외면하고 그것을 잊어버리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에 영화가 기억을 잃었고 그것을 되찾으려 한다는 사실은 작품 전체의 주제이자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된다. 기억을 찾는다는 것은 곧 ‘내가 왜 이 기억을 잃었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는 ‘내가 이 기억을 잃고자 했기 때문에’라는 답이 있다. 그 지점에서 작가는, 결국 외면할 수 없는 것은 끝까지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을, 도망칠 수 없는 것으로부터는 끝내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은 결국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듯 하다. 영화는 주원의 죽음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니지만, 주원의 유일한 친구였음에도 주원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다는 책임이 있다. 주원은 영화를 위해 가해자를 밝히지 않고 침묵했지만, 그런 주원을 혼자 두고 가해자인 연성과 어울리는 영화를 보며 더욱 더 크게 마음을 다쳤을 것이다. 결국 영화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자신에게도 주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외면하려 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 영화의 단서 추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으로 돌아온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은, 어째서 영화는 청소년이어야’만’ 했으며, 작가는 어째서 ‘청소년 영화’라는 제목으로 이 이야기를 다루었는가이다. 작품의 이야기는 인간 일반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청소년 고유의 이야기는 아니며, 영화가 성인이었다고 해서 플롯의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영화의 선택은 ‘청소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은 아니며, 영화가 청소년의 전형으로서 청소년 일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이 이야기는 한 인간의 자기 반성에 대한 이야기는 될 수 있으나, 그것이 한 계층 혹은 한 인구 집단을 대표하는 이야기가 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어째서 작가는 «청소년 영화»라는 제목으로 이 이야기를 청소년 전체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시키려고 했을까? 나로서는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고아라 작가의 «청소년 영화»는 ‘영화’라는 한 청소년의 이야기 그 자체로서 독자에게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청소년은 연약하지만, 성인이라고 해서 더 강한 것은 아니다. 청소년은 혼란스럽지만, 성인이라고 해서 더 맑은 정신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청소년’인 영화가 자기 자신의 내면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한다. “나는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을 외면한 적이 없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