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보문» -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노스탤지어

어느 동네 어느 구석,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는 작은 카페는 어떤 의미를 나에게 가져다줄까요? 번화가 대로변의 거대 프랜차이즈 카페와는 분명 다릅니다. 나만이 아는 공간인 것만 같고, 이 곳에서만큼은 내가 특별해지는 것만 같고,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그런 공간.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가질 수 없는 ‘온전한 휴식’을 발견하는 공간. 나와 마음의 파장이 맞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 ‘작은 카페’란 그러한 ‘나의 세계’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우도 작가의 «카페 보문»은 그러한 여러 사람들 각각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주인공 선화는 오래 전부터 있었던 어느 동네 어느 구석의 작은 카페를 자주 갔었죠. 카페 보문의 ‘주인 언니’는 그런 선화에게 카페를 맡기고 홀연히 사라집니다. “이미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과 함께. 덜컥 카페를 맡게 된 선화는, 선화처럼 카페 보문을 알던 여러 사람들을 차례차례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작가는, 각자의 세계가 교차하는 공간으로서의 카페 보문을 그립니다.

▲ 카페 보문에서 방문객은 ‘손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카페 보문을 찾는 사람의 면면은 다양합니다. 그림 작가인 선화를 비롯해 5년째 단골이지만 이름도 모르는 기린, 종종 음식을 해 들고오는 유정, 빵 만드는 정우와 나무를 다루는 머루, 만화 그리는 윤주와 잡지 만드는 수산 등 각자의 특징도 다양합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작품의 등장 인물들이 ‘규격화된’ 인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원자화된 개인은 노동자-소비자로 규격화되기 십상이죠. 이런 개인이 행하는 행동은 대개 비슷합니다. 대중교통이나 자가용을 타고 이동해서, 정해진 공간으로 가 정해진 일을 하며, 대동소이한 상품을 소비하고 대동소이한 집에서 쉬죠. 하지만 «카페 보문»의 인물들은 조금 다릅니다. 주로 무언가를 만들고, 특별한 사람은 아니지만 ‘오리지널한’ 사람이기는 하군요. 자기만의 세계를 갖지 않고서는 자신의 일을 해낼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사람들. 그래서 카페 보문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가 포개지는 공간이자 ‘오리지널리티’의 표상이 됩니다.

▲ 카페 보문은 ‘오리지널한 사람’이 쉬어가는 공간입니다.
그래서 이 오리지널리티의 표상은 동시에 판타지가 되기도 합니다. 카페 보문의 세상에는 디테일이 없습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생략했다고 봐야겠지요.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곧 노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품에는 그 결과만 나옵니다. 각자의 세계는 카페를 스쳐지나갈 뿐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반나절 장보고 반나절 음식하는 유정의 일상은 실은 고단할 것입니다. 제빵사의 하루가 새벽 네 시에 시작한다는 사실은 찾아볼 수 없군요. 카페란 결국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노스탤지어의 상징이지만, 그리움이란 언제나 고단한 디테일은 생략하고 아름다운 동경의 이미지만 남기는 법입니다.
물론 «카페 보문»은 만화지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작가가 리얼리즘에 입각한 작품을 그리려고 했을리도 만무하며, 세상 모든 작품이 날카로운 성찰과 비판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지하철에 앉아서까지 고통스러운 작품을 봐야겠어요? 다만 저는 이 작품을 보는 여러분들의, 어쩌면 카페 보문과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는 삶을 스스로 아쉬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카페 보문을 만들기 위해서든, 여러분의 삶을 만들기 위해서든, 고단함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찾아가는 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