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자 리뷰] 『오후 네 시의 생활력』
『오후 네 시의 생활력』
김성희 지음, 창비 펴냄, 1만 3,000원
“마흔을 맞았다. 이렇게 원숙하지 않은 마흔이 될 줄 몰랐을 뿐이다.”
– 영진의 독백
오후 네 시, 퇴근을 기다리는 조금 늦은 오후. 그 시간을 닮은 마흔이 되었건만 여전히 삶은 익숙하지 않다. 기간제 여교사 영진은 병원에서 나이를 곱씹는다. 자궁근종이 심하다는 이유로 자궁적출을 제안하던 의사의 낯짝이 아직도 아른거린다. 아직 결혼도 못한 자신에게 생명을 품는 여성의 상징을 포기하라니. 하지만 아랫배에는 칼자국이 선명하다. 학생들은 기간제 교사를 우습게보고, 이주노동자를 돕는 남자친구와는 수년째 제자리걸음이다. 그녀는 묻는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김성희 작가가 만화 『오후 네 시의 생활력』으로 돌아왔다. 마흔, 계약직, 생활력이라는 일상 화두를 가지고. 여전히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낮고 묵직하지만, 전작처럼 날서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관통해 나아간다. 그렇다고 현실을 피해가진 않는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하지만 너무나 주변부로 밀려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하나하나 분명하게 그리고 넘어간다. 기간제 교사, 이주노동자, 활동가, 노무사, 계약직 등 같은 시간을 일하지만 다른 처지에 속한 사람들. 오늘은 일하지만 내일은 보장받지 못하는 역군들. 애처롭고 분통터지지만 작가는 어느 하나에 머무르진 않는다. 오히려 외로운 그네들이 보란 듯 제 길을 간다. 그 걸음이 희한하게도 가볍다.
만화 『오후 네 시의 생활력』의 껍데기는 ‘시사만화’스럽다. 그래서 우울하다. 뉴스와 다를 바 없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전진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을 붙잡는다. 작가가 ‘생활력’이라고 명명한 그 힘은 요리, 청소, 돌봄, 사랑 등 우리가 일상을 이어가는 작은 마법들이다. 작품의 주인공들이 일상화된 불합리와 부조리에 떠밀려 제대로 항변도 못하고 일자리를 잃어버리지만 ‘생활력’이 저녁에 온기를 불어넣고 다음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회복시켜준다. 작지만 중대한 이 발견으로 작품은 누군가에게 선물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 후반에 영진은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버티는 걸까?” 그녀는 명쾌하게 답하지 못 한다. 다만 막연하게 그녀가 갈구하는 삶의 빛깔과 형태를 짐작해볼 뿐이다. 어쩌면 마흔이란 그런 나이인지도 모른다. 맞서고 항변하고 증명하지만 종종 좌절하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점점 알 수 없는 시기. 포기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고 계속 나아가야만하는 위치말이다. 그래서 영진은 좀 더 느긋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생각한다. 일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언젠가는 그 답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포기는 늙은 사람이 해야지. 그것도 지혜거든.
젊은 사람이 포기하면 안돼.
젊은 사람들이 살 방도 알아내야지.
그게 그래야 당신들 세상이지.”
– 퇴사하는 계약직 작가에게, 영진 어머니가
출처: 에이코믹스 https://acomics.webtoonguide.com/archives/34158
윤태호 작가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