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저편』, 로맨스 판타지의 정석
명작에는 두 종류가 있다. 대중에게 잘 알려져 스테디셀러 반열에 오른 작품과 대중은 잘 모를지라도 마니아 사이에서 인정받는 숨겨진 명작이 그것이다. 후자의 경우 중고 시장이 활발하기 마련인데, 눈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지 드문드문 나오는 중고 매물도 빛의 속도로 사라진다. 히가와 쿄오코의 만화 『바람의 저편』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바람의 저편』은 이세계로 떨어져 예언 속의 존재가 된 소녀와 내면에 괴물이 봉인되어 있는 청년의 사랑과 모험을 그린 장편 로맨스 판타지다. 1996년 서울문화사에서 단행본으로 발간되기 시작해 2003년 14권으로 완결됐다. 2006년에는 7권짜리 완전판이 발간됐다. 현재 전자책이 나와 있지만, 여전히 완전판은 물론 상태가 좋지 않은 대여점용 책도 금방 팔려나간다. 그리워하는 독자가 많은 탓이다. 무엇이 『바람의 저편』을 그리 매력적인 작품으로 만들었을까?
평범한 소녀, 예언의 존재가 되다
일본의 평범한 여고생 ‘노리코’는 하교하던 중 갑작스러운 폭탄 테러에 휘말린다. 폭발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 보니 이상한 숲 속에 떨어져 있다.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괴물들이 나타나 목숨을 위협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년이 나타나 노리코를 구해 탈출한다. 청년은 ‘이자크’라는 떠돌이 전사로, ‘천상귀’라는 괴물을 내면에 간직하고 있다. 이자크의 세계에는 언젠가 ‘자각’이 나타나 ‘천상귀’를 불러내리라는 예언이 있었다. 이자크는 자신을 천상귀로 변하게 할지도 모르는 자각을 찾아 죽여 버리기 위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말도 통하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노리코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얼떨결에 그녀와 동행하게 된다.
자각이 나타난 것을 감지한 이세계의 국가들은 천상귀를 차지해 세상을 지배하려는 목적으로 자각 수색에 나선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서로 의지하던 노리코와 이자크는 사랑에 빠지게 되고, 천상귀 각성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영원을 약속한다.
두 사람은 ‘랭카’를 다스리는 ‘라체프’의 끈질긴 추적 속에서 갖가지 고초를 겪다가 천상귀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현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라체프에게 붙잡힌 이자크는 라체프와 계약을 맺은 어둠의 힘인 ‘원흉’에 맞서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천상귀로 변한다. 그러나 때마침 노리코가 각성하고, 덕분에 천상귀를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컨트롤할 수 있게 된 이자크는 원흉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평화를 되찾은 뒤, 노리코는 이자크의 곁에 남기로 결정한다. 대신 이세계에서 있었던 일기를 정기적으로 가족에게 보낸다. 현실에서 노리코의 일기는 소설로 출간된다.
‘자각’의 의미를 찾는 여정
『바람의 저편』은 만남-동행-사랑-위기-각성 5부로 나뉘어 빠르고 뚝심 있게 전개된다.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자각’과 ‘사명’이다. 이세계에서 노리코가 ‘자각’으로 불리는 것부터 시작해, ‘자각’은 작중 이야기 전개를 위한 중요한 코드로 작용한다. 노리코와 이자크의 사랑에 대한 자각, 라체프의 세계를 지배하고픈 욕망에 대한 자각, 공간이동을 가능하게 해 주는 동물인 ‘치모’의 사육사로서 라체프에게 이용만 당하던 ‘도로스’의 자존에 대한 자각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자각들이 새로운 사건을 불러일으키고 등장인물들을 움직인다. 결정적인 순간 이자크가 천상귀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식 역시 이자크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각은 ‘사명’을 실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노리코는 이세계에 떨어진 후 위기가 닥칠 때마다 ‘내게 주어진 사명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노리코는 끊임없이 자문한다. 원흉과 이자크가 최후의 싸움을 벌이던 때, 노리코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의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 세상 만물은 살아가기 위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형태로 빽빽하게 연결돼 있다는 일종의 진리를 알게 된 것이다. 마침내 각성한 노리코는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빛의 세계’를 경험한다.
『바람의 저편』은 판타지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도 무리 없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순정과 판타지, 양쪽의 장점을 조화롭게 녹여냈기 때문이다. 작품 내부적으로는 노리코와 이자크의 사랑과 갈등이 섬세하게 그려지는 한편 외부적으로는 로드무비겸 어드벤처물로서 호쾌한 액션이 펼쳐진다. 액션의 강도도 꽤 세다. 이자크가 천상귀로 변하는 순간이나 세상을 지배하려는 원흉의 욕망이 폭주하는 장면은 섬뜩할 정도. 히가와 쿄오코가 그리는 아름답고 우아한 이세계의 풍광은 이자크와 라체프가 벌이는 숙명의 대결조차도 찰나의 작은 물보라처럼 여겨지게 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써 빛의 힘을 키워가다 보면 언젠가는 이세계와 현실이 연결돼 서로 왕래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노리코의 메시지는 정말로 머나먼 저편 어딘가에 노리코와 이자크가 사는 세계가 존재할 것만 같은 여운을 남긴다.
모든 고전 명작들이 그렇지만 『바람의 저편』 역시 완결된 지 20년이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설정이나 대사, 액션 등에서 촌스러운 구석이 없다. 다만 한 가지, 번역 문제가 있었다. 90년대 『바람의 저편』이 처음 들어왔을 때 노리코의 이름은 ‘지나’였다. 한국식으로 현지화되었던 탓이다. 뿐만 아니라 1권에서 ‘랭카’였던 지명이 후반으로 가면 ‘렌카’가 되거나 등장인물 중 하나인 ‘아골’이 일본식으로 읽은 ‘아고루’가 되는 등 번역이 오락가락하기도 했다. 다행히 완전판에서는 여주인공의 이름과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원작대로 교체되었고 번역도 개선되었다. 현재는 전자책이 시중에 나와 있는 상태다. 우아하고 서정적인 로맨스 판타지의 정석을 느끼고 싶다면, 『바람의 저편』은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필진 소개
출처 : 에이코믹스 주소https://acomics.webtoonguide.com/archives/30909
윤태호 작가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