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웹툰 <신과 함께: 저승편> 리뷰:[신곡]의 탈을 쓴 오디세우스의 모험
글/그림: 주호민
<신과 함께: 저승편>은 웹툰계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흥행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해외 리메이크를 비롯하여, 영화, 뮤지컬, 게임 등 다양한 매체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원작 웹툰 외에 다른 판본을 본 적은 없지만, 이렇게나 흥행하고 또 다른 매체로 전유되는 것은 이 작품이 독자/관객들에게 핵심적으로 와닿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는 <신과 함께>가 <신곡>의 외형을 쓴 <오딧세이아>라는 독특한 형태의 작품이어서가 아닐까 합니다. <저승편>은 권선징악이라는 키워드를 지닌 채 미지의 위험을 넘어서는 모험의 서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서사가 영화나 연극 등 다른 매체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혹은 여타의 매체에서는 다른 부분에 포인트를 맞추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전통적인 저승 개념에서 매력적인 세계관과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세상은 인과법칙에 따라 움직입니다.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나 날아가는 것은 투수의 몸에서 공에 힘이 가해졌기 때문입니다. 병에 걸리는 것은 병균이 체내에 침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러한 자연적 인과성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과성이 개입하지 않는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선과 악의 영역입니다. 도덕적 인과성이라는 게 이 세계에 존재했다면, 선하게 살면 좋은 결과를, 악하게 살면 나쁜 결과를 얻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연결고리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대체로 남을 속이고 악하게 살면 더 잘 사는 것 같고, 착하게 살면 남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비참하게 죽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은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어떤 공동체도, 종교도, 이 질문을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규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규율대로 사는 것이 결코 행복한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이유로 이 규율을 지키도록 요구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니체가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했던) 사후세계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비록 현세에서는 선행과 악행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지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에서는 그 행동에 따라 엄정하게 상과 벌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인들은 영원히 행복한 삶을, 악인들은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사후세계는 그래서 이승과 독특한 방식으로 연결되며 이는 <신과 함께: 저승편>(이하 ‘저승편’)에 등장하는 저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김자홍'이 저승에 도착한 이후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는 '이곳의 법은 이승과 다르다'입니다. 예를 들어 김자홍이 이승에서 쓰던 방식의 이력서를 변호사 진기한에게 건냈다가 "이건 이승에서나 내는 것"이라는 대답을 듣습니다. 저승의 법칙은 이승과 다르며 그 때문에 이승에서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인과에 따라 처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저승과 이승의 선악이 완전히 달랐다면 저승에서의 모든 처벌은 불합리할 것입니다. 저승은 이승에서의 선악 판단을 철저히 법제화하는 방식으로 이승과 이어집니다. 이처럼 이승과 저승은 서로 다른 영역이지만 동시에 같은 논리를 통해 이어집니다.
<저승편>의 매력은 서로 다르지만 같은 저승과 이승 영역들을 잘 꿰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김자홍이라는 인물이 사망하면서 저승의 재판과정을 따라가면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가 저승으로 가는 길에 판초우의를 쓴 어느 혼령이 탈출하고, 차사들이 이 혼령을 추적하면서 이야기가 별도의 트랙으로 전개됩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저승에 있는 김자홍이 이승에서의 기억들을 토대로 재판을 받는 과정과, 이승으로 탈출한 혼령이 겪은 부조리한 이승의 사건들을 보여주는 과정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전통적인 도덕철학적 문제 - 선행을 행하는 것은 어떤 결과를 위한 것인가, 내지는 선행이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등 - 들은 제껴둡시다. 어차피 이 문제들은 답이 안 나오기 때문에 작품에서도 여기에서도 짧게 다룰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저는 그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그리고 이 인물들의 설정 자체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습니다. 변호사 진기한은 김자홍을 변호하기 위해 대화하다가 이 사람이 가장 평범하고 무난한, 그리하여 변호하기 힘든 유형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특별한 선행도 한 적이 없고 큰 악행도 저지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품의 전개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오히려 김자홍이라는 인물의 티없음에 크게 의존합니다.
이 부분은 두 가지 측면에서 껄끄럽습니다. 우선 '평범함'은 대체로 자잘한 흠결들과 잘못들을 내포합니다. 김자홍이 정말로 평범한 인물이었다면, 그 평범성은 선행의 평범성뿐만 아니라 악행의 평범성도 공유했어야 합니다. 김자홍은 평범한 듯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인물임이 드러나며 (이를테면 정말로 평범한 사람은 제5지옥을 쉽게 통과할 수 없습니다), 이는 작품의 전개를 다소 쉽게 풀어버립니다. 영화 <변호인>에서 변호사가 "이 아이들은 빨갱이가 아닙니다!"라고 항변하는 순간, 이는 영화에 몰입하기 쉽게 만드는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정말 피고인들이 빨갱이였다면 어땠을까?'라는 궁금증도 일으키는 것처럼요. 두 번째로, 이와 관련하여, 이러한 설정은 악에 대한 접근을 다소 평이하게 만듭니다. 저승의 기본적인 자세는 권선징악이기 때문에, 악 자체가 기본적으로 징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작품에서는 악을 동시에 구제의 대상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가령 미륵보살은 악인을 벌의 대상뿐만 아니라 구제의 대상으로도 바라보며, 당장 주인공인 진기한 변호사는 악인도 변호하고 싶어서 신장급 변호사의 지위를 포기한 인물입니다. 이러한 설정은 악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 지 ('악에 대한 용서란 무엇인가?' 혹은 '악행의 책임이 오직 개인만의 것인가?' 등등) 매우 복합적인 고찰을 던져줄 수 있는 지점인데, 작품의 전개 과정에서 어느새 이 고찰은 단순한 권선징악적 기조로 다시 되돌아갑니다.
물론 이처럼 단순화된 지점이 작품의 모든 매력포인트를 지우지는 못합니다. 저승의 신화적 장치들은 기괴하고 공포스럽게 등장하며, 이를 뚫어내는 진기한은 <신곡>의 베르길리우스보다는 신화 속의 인물 오디세우스를 닮았습니다. 귀마개를 껴서 세이렌의 노래를 벗어나듯, 혹은 '아무Nobody'라는 이름으로 퀴클롭스에게서 탈출하듯, 진기한은 발전없이 정체되어 있던 신화적 장치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뚫어냅니다. 어떻게 보면 꼼수같고 또 어떻게 보면 기발하기도 한 그의 책략을 지켜보는 재미는 이 작품의 백미입니다. 또한 앞서 언급된 것처럼 저승에서의 사건과 동시에 일어나는 차사들의 혼령 추격전이 작품의 한 축을 이룸으로써 단조로운 전개를 방지합니다. 이승에서의 부조리는 흔히 해결되지 못한 채 한으로만 남지만, <저승편>에서는 강림도령에 의해 그 부조리가 다소간 해소되는 방식으로 카타르시스를 제공합니다. 물론 차사들이 이승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데, 그러한 극한적인 상황은 <신과 함께: 이승편>에서 첨예하게 그려집니다. 강림과 해원맥은 매력적인 저승차사로 그려지며, 다만 덕춘에 대한 설정이 조금 더 보강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참고로 해원맥과 덕춘이 차사가 된 배경은 <신화편>의 에피소드에 자세히 등장합니다.)
<신과 함께> 3부작 중 <저승편>은 서사적 완결성이 가장 뛰어나며 또한 가장 밝은 작품입니다. <신화편>은 에피소드적 성격이 강하며, <이승편>은 다소 짧습니다. 또한 <이승편>은 굉장히 현실적이며 어둡다면, <신화편>은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에피소드들이 등장합니다. <신화편>의 느낌은 현재 네이버웹툰에 연재중인 <빙탕후루>의 느낌과 유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차이들이 작품성 자체의 정도를 나누지는 못하지만, 대중적 친화성을 지니면서도 높은 작품성을 갖는 데 성공한 작품이 <저승편>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