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오늘의 우리 만화상 연작 리뷰 - 아 지갑 놓고 나왔다.
외출을 했다. 별 의미는 없었다. 라면을 사러 밖으로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시계를 보다가 거스름 돈이 얼마가 될까, 이런 생각을 했다. 생각한 김에 지갑을 열려고 주머니를 뒤졌다. 주머니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제서야 지갑을 찾으러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현대 사회에서 지갑은 많은 의미를 가진다. 자신을 증명하는 신분증을 보관하는 장소이자, 돈을 챙겨넣는 귀중한 함이다. 이런 지갑을 함부로 두고 다닐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수시로 주머니를, 혹은 가방을 확인한다. 집에서 나올 때도 그렇다. 때때로 지갑을 두고 나왔다는 걸 기억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손 쉽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이 집이 나의 집이라는 인식이 있어서다. 지갑을 방에서 가져나오는 건 간단한 문제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아 지갑놓고 나왔다.]의 주인공 선희는 집에서 함부로 지갑을 빼내올 수 없는 위치였다. 그녀는 가출했고, 집과 연락하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고등학교 때 쓰던 예쁜 문양의 지갑이 필요하다면 새로 사는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작품은 처음부터 주인공 선희와 집을 분리한다. 집은 안정된 공간이다. 안정된 공간에서 분리된 인간은 불안해진다. 주인공 선희는 작품 연출 뿐만 아니라 집에서 분리됐다는 상황만으로도 불안한 인간이다. 작품은 이 불안함을 만든 근원을 탐구한다. 작 중에서 원인은, 가족의 학대와 무관심이다. 가장 안정된 공간에서 가장 불안해지는 상황만으로도 주인공의 가출 동기는 설명된다.
가출을 설명한 시점에서 다시 전환되어 화제는 주인공의 딸 [노루]에 맞춰진다. 노루는 주인공 선희의 딸로 어른스럽고 침착한 아이지만, 역시나 가정에서 분리된 불안한 존재다. 죽고나서도 주인공을 위해 놀이터에서 동전을 모아주고 매일 같이 병문안을 가는 모습에서 이런 불안함이 나타난다. 더이상 이어질 수 없는 가족에게 매달리는 모습은 측은하기도 하고, 가엽기도 하다.
[아 지갑 놓고 나왔다.]를 대표하는 흐름은 이 불안함이다. 작가는 둘 사이의 흐르는 불안한 정서에 대한 관찰과 치유를 말한다.
학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작품의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며 작품에 거부감을 느끼게 할수도 있는 소재다. 만화 [단지]에선 이런 학대에 대해 이 후 시점에서 이야기하는 오너캐를 끼워넣는 것으로 작품의 감정을 추슬렀다. 하지만 [아, 지갑 놓고 나왔다.]는 이런 감정을 조절하려 들지 않는다. 작품은 보다 노골적이고 직설적으로 주인공의 감정을 표현한다. 거칠게 그어진 선과 마구잡이로 쓰여진 텍스트로 학대에 지친 감정을 표현한다. 이런 연출은 작가의 자신감이기도 하다. 작품의 서사로 주인공에게 몰입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거부감의 향연으로 끝마칠 뿐이다.[아 지갑 놓고 나왔다.]는 주인공의 심각한 정신 질환에도 도리질을 치지 않을만큼 매력적인 작품인가?
작품의 서사는 단순하다. 학대로 지친 여성이 새 삶을 찾는 과정을 그려나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 여성이 제대로 된 삶을 찾아갈 수 있을 지 호기심을 안고 보는 것이다. 이런 단순한 인간 관계 드라마에서 감정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좋지 않다. 로맨스 소설의 꽤 많은 부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기도 한데, 주인공의 내면을 심층까지 파고들며 4페이지 정도를 심리 묘사에 할애하곤 한다. 주저리 주저리 '그녀는 마치 늪에 빠진 듯 했다. 엉겨붙는 진흙과 새까만.....' 부류의 진득한 묘사를 들이밀며 독자에게 공감을 강요한다. 우리가 보고 싶은 건 심리 카운셀링이 아니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로맨스 소설을 집어던지는 독자들도 있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심리에 집중하게 하기 위해선 어떤 서사를 활용해야 하는가.
[아 지갑 놓고 나왔다.]는 어두컴컴한 심리 만화가 어떤 방향으로 독자를 끌어들여야 하는 지 보여주는 좋은 지표다. 작품의 서사는 철저하게 주인공 선희와 노루의 심리 상태를 걱정하고 궁금해하도록 짜여있다. 여기에 판타지를 섞어내어 독자들이 '자아와의 독백' 등의 비현실적인 연출에 적응하도록 했다. 여기까지 와서 깊은 심리를 표현했을 때 독자들은 거부감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주인공의 심리에 공감하고, 다시 안좋은 일이 일어날까 노심초사하며 좋은 일만 있길 기도한다. 작품은 막 그린듯 하면서도 독자를 유도하는 역량이 있다.
타인의 사연에 깊게 공감하기 위해선 그만큼 절절한 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눈물을 쏟는 건 때에 따라선 거부감을 일으키고, 독지가를 도망가게 만드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 중간 지점을 캐치하는 것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가 해야할 일이다. [아 지갑 놓고 나왔다.]는 우리를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서게 하는 작품인가? 이제 당신이 확인할 차례다. 적어도 내겐 아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