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트> 백합·SM·연애의 달달한 조화
백합이라는 장르를 구분하는 여러 가지 틀이 있죠. 그중에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프레임을 꼽자면 역시 '남성향'과 '여성향'의 구분입니다. 백합을 좋아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필자 역시 거칠기는 하지만 여성향과 남성향의 이분법적인 구분을 애용해 왔거든요.
'릴리트'라는 작품이 어느 쪽인가 하면, 일단은 당연히 백합이고, 또 성인물이에요. 장르에 성인/백합이라고 떡하니 써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웹툰이 남성향인지 여성향인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두 가지 매력이 동시에 공존하는 작품이라서요.
주인공 '천재희'는 무척이나 여성스러운 외모와 성격을 가진 여고의 국어교사에요. 그리고 진성 마조히스트이자 서브미시브입니다. 순진한 국어교사가 SM에 빠져 타락하는 그런 배덕적인 이야기를 기대하셨다면 조금 실망할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SM의 세계에 발을 들였고 주기적으로 관계를 맺는 파트너까지 두고 있는, 말하자면 '숙련자'이기 때문이죠.
동성애자이자 에세머로서 매력이 넘치는 천재희를 중심으로, 중국 갑부집 딸이자 재희가 다니는 학교의 이사장인 '주혜림'(당연하지만 혜림은 재희의 플레이 파트너이기도 합니다), 재희의 사촌동생이자 한때는 제자였던, 그리고 어렸을 적 사고로 부모를 잃고 한동안 재희와 같이 살았던 '윤설화'까지. 각자의 사정과 다른 점도 있지만 동시에 재희에게 매력을 느끼며 SM에 어떤 형태로든 연관이 있는 - 혹은 앞으로 그렇게 될 - 인물들이 등장하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백합 장르의 이분법적 구분 이야기를 다시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먼저 '릴리트'는 인물들 간의 육체적인 관계가 대단히 강조됩니다. 주인공 천재희와 조연들의 관계가 플라토닉한 사랑은 커녕 연인관계도 아닌, 성적인 즐거움을 위해 맺어진 소위 '플파'인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단순한 레즈비언 섹스가 아닌 회초리와 노끈, 눈가리개, 딜도와 같은 도구들, 수치를 강요하는 명령과 복종을 선언하는 말들이 난무하며, 그 수위 또한 결코 낮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재희는 한때 제자였고 어리기만 했던 동생인 설화가 몰라보게 자란 모습을 보고, 그녀와 플을 하는 상상을 하며 수업 도중에 은밀한 부분을 적시거나, 파트너인 혜림이 출장을 가자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그 일'을 위해 연락을 할 정도로 욕구가 충만한 여성이기도 해요.
성애를 묘사하는 수준이 무척이나 훌륭하다는 것도 꼭 언급하고 싶습니다. 행위 묘사에만 전적으로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교류하는 두 여자의 심리라든지, 여기서 특히 SM이라는 특수한 관계에서 비롯된 그렇고 그런 표현들, 일상을 유려하게 그려내던 부드러운 그림체로 헐벗은 여자들이 격렬한 행위를 주고받는 장면 또한 흥분을 더하죠.
동시에 이 작품은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인물들 간의 관계 또한 빼놓지 않고 다루고 있습니다. 재희와 설화의 복잡했던 과거와 그녀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미묘한 감정, 설화와 혜림 사이의 질투와 갈등에 이르기까지, 여성향으로 구분되는 백합물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던 내용들이죠.
정리하자면 무척이나 짜임새 있으면서도 장르 본연의 목적에 충실한 수작이라는 생각입니다. 백합과 SM(성인), 연애라는 장르가 각각 삼분지 일 정도씩 섞여있는데, 셋 중에 하나만 좋아하거나 다른 하나에는 흥미가 없던 독자라도 충분히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거예요. 리뷰를 쓰는 시점에서 분량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작품의 특장점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하고, 새로 정주행을 시도하는 독자들도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만한 적당한 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