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 섹스와 사람
'세컨'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작중에서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 엄연히 실재한다고 하네요. 세컨은 말 그대로 SNS에서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만드는 두 번째 계정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그 목적이란 섹스입니다. 익명성이 어느 정도 보장된 SNS를 통해 남녀가 섹스를 즐길 파트너를 찾는 공간이에요. 닉네임은 가명을 사용하지만, 사람들이 헐벗은 제 몸을 찍어 올리는 그런 이중적인 곳이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초점은 거의 대부분 주인공 '해선'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해선은 세컨의 이용자이기도 해요. 본명은 해선이지만 세컨에서는 '사인'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습니다. 해선이 세컨에서 활동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역시 섹스 파트너를 찾기 위함이지만, 작품에서 묘사되는 내용으로 짐작컨대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에 강하게 집착하는 성향이 있습니다.(본인은 부정하지만요) 세컨을 알기 전에도 여자가 매우 드문 게임 커뮤니티에 참여해 - 해선은 게임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 남자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며 만족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 모임 내에서 평판이랄지, 그런 것들을 신경쓰는 탓에 대놓고 성추행을 벌이는 남자 회원의 범죄 행위를 두루뭉실하게 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는 날 세컨의 존재를 알게 되고, 게임 모임 따위보다 훨씬 노골적이며(내숭을 덜 떨어도 되고), 동시에 시공간적 제약이 적은 온라인이라는 특성상 더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점에 흥미를 느껴, 해선이 아닌 '사인'으로서 또다른 생활을 시작합니다. 사실 이중적인 생활이라고 할 건덕지도 별로 없어요. 원나잇 자체는 특별한 게 아니고 클럽에서 춤을 추다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서 섹스를 하나 SNS에서 글을 보낸 다음 섹스를 하나 크게 다를 건 없으니까요. 오히려 비용이나 시간 측면에서 이쪽이 더 효율적이니까,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발전을 잘 이용한 사례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해선이 사인으로서 이 남자 저 남자를 만나고 다니며 섹스하는 내용의 웹툰은 아니에요. 실제로 그런 행동을 하긴 하지만, 작품의 방향과 목적은 그렇지 않습니다. 리뷰를 클리셰적으로 적어보자면 육체적 관계에만 집착하는 여자 주인공이 진정한 사랑을 만나 정신적으로 치유되고 짝을 찾아가는 뭐 그런 식의 설명을 할 수 있을 테지만, 그리고 여주인공에게는 당연히 과거의 아픔이 존재할 테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런 건 사실 현실에서는 사회적이고 성차별적인 편견이고 서사 매체로서는 다소 진부한 클리셰에 불과하지요.
사인으로서의 해선에게는 객관적으로 별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해선은 낮에는 다른 대다수의 사회인들처럼 직장에 다니고 있고, 터무니 없는 낭비벽을 가진 것도 아니에요. 마약이나 술에 찌들어 살고 있지도 않고, 과거에나 지금에나 누군가에게 학대당한 경험도 없습니다. 그저 잘생기고 몸 좋은 남자와 섹스를 좋아하고, 그렇고 그런 사진을 SNS에 찍어올려 남자들의 관심을 받으며 만족을 느낄 뿐이에요. 외모가 되고 놀 줄 아는 젊은 남녀라면 한 번쯤 거쳐갈 법한 그런 즐거움이죠. 요즘 같은 시대에는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일도 아닐 테고요.
해선 본인도 사인으로서 자신이 특별하게 취급당할 이유가 하등 없다는 사실을 강하게 항변합니다. 그럼에도 변화는 찾아오는데, 육체적·성적인 즐거움과 정서적·감정적 교제는 분명 다른 측면이 있고, 어느 한쪽이 결핍되는 것보다는 둘이 균형을 이루는 쪽이 더 바람직한 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죠. 전자에 극단적으로 치우쳐 있는 세컨을 시작하기 전의 인연이 별안간 해선의 삶에 끼어들며, 그녀는 불특정 다수의 관심이나 섹스의 쾌락이 아닌 다른 종류의 만족을 느끼고, 갈구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변화의 과정이 평탄하지도 썩 유쾌하지도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 과정이 웹툰 '사인'의 핵심적인 내용이기도 해요. 세컨이라는 특수한 공간이 문제였는지 아니면 해선(사인)에게 남자복이 없었는지, 그녀에게 엮인 일부 남자들은 섹스 파트너로서 꼭 갖춰야 될 맺고끊음이 크게 부족합니다. 일부는 이미 범죄의 영역에 발을 디뎠고요. 단지 외부에 방해자가 있을 뿐이라면 경찰을 부르든 사설탐정을 부르든 어떤 식으로든 해결이 가능하겠지만, 사실 해선에게 새로운 형태의 관계를 눈뜨게 해준 과거의 남자 역시 문제의 소지가 엿보이는 데다, 무엇보다 해선 본인부터가 아직은 확신없이 그와의 관계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3부가 시작하는 시점에서는 생물학적으로 엄청난 곤경에 처하기도 했고요. 해선이 사인으로서 더 오래 머무르게 될지는 더 지켜봐야 될 것 같습니다.
해선(사인)의 심리 묘사라든지,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자가 맞게 되는 (남자들의)편견과 이중잣대 따위가 무척이나 잘 묘사되어서, 웹툰을 조금만 읽다보면 저도 모르게 주인공에 몰입해서 그녀를 응원하게 돼요. 결말이 어느 쪽으로 나든지 간에 이미 충분히 독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저는 엔딩의 방향성과는 무관하게 작품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피 엔딩이나 새드 엔딩, 치유와 성장 같은 도식적인 구분은 우리의 주인공부터가 그리 탐탁치 않아할 테고, 다시 한 번 '변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좋을 것 같아요. 해선은 '사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을 때처럼 모든 갈등과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한 번 변화할 것인지 자못 궁금해 집니다.
- 2018 / 03 / 14
P.S.
연재 초기와 중반 정도쯤부터 그림체가 확연히 달라졌는데, 개인적으로는 바뀐 쪽이 더 마음에 듭니다. 날카로운 느낌이랄까, 내용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