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어 리시, 수인과 백합 그리고 전쟁
대략 20세기 초중반을 배경으로, 미국과 프랑스·이탈리아, 나치 독일을 모티브로 삼은 3개의 국가가 전쟁을 벌이는 세계관입니다.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수인화(化)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고, 변하는 동물의 종(種)은 포유류·파충류·조류로 분류되는데 이 차이가 곧 국가와 국민을 나누는 기준이기도 해요. 조류 수인들의 국가인 '피더볼크 제국'(이들은 날개가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근거를 알 수 없는 선민의식에 빠져 있습니다)이 전쟁을 일으키자, 파충류 수인 국가 '랩틸'과 포유류 수인 국가 '마멜리아 합중국'이 연합해 피더볼크에 대항합니다. 주인공 레드는 개로 변신하는 마멜리아 합중국의 보병 병장이고, 또다른 주인공 뤼스는 랩틸의 군의관(장교)입니다. 이들은 전쟁터의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고요.
리뷰의 제목에서 나열한 것처럼 웹툰 '온 어 리시'를 키워드는 세 가지입니다. 수인, 백합, 그리고 전쟁. 장르가 수인물이지만 그렇게 본격적이지는 않습니다. 수인화를 하면, 외향이 크게 변하고, 육체가 강건해지며, 일부 동물적인 능력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지를 상실하지도 않고, 사람이 동물처럼 변하지도 않습니다. 이족보행하는 동물의 모습을 하게 될 뿐이죠. 수인과 사람을 오고가는 데 있어 큰 제약이 있지도 않는 것 같고요.
일단 수인화를 마치고 나면 남녀 간의 신체적 격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이 세계관에서는 여성들 또한 전투병으로 징집되는 모양입니다. 작품에서 비추는 전장에는 남자들 못지 않게 여자들이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주인공 레드는 이름처럼 정열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조국에 대한 충성과 전쟁을 승리해야만 하는 확고한 명분, 전우를 위하는 마음까지 그야말로 - 국가의 입장에서는 - 모범적인 군인입니다. 전투력이 뛰어난 것은 물론이고요. 또다른 주연인 뤼스는 뱀처럼 차갑고 단호한 여자 의사인데, 장대한 서사와 백합이 뒤섞인 이야기의 히로인들이 흔히 그렇듯 복잡한 비밀을 품고 있습니다. 군의관이라는 보직에도 불구하고 현역 전투병인 레드 못지않은 피지컬과 전투력을 뽐내기도 했지요.
이야기는 피더볼크의 폭격병들이 연합군의 임시 진지를 급습하며 본격적으로 막을 올립니다. 레드는 허를 찔린 와중에도 노련한 숙련병답게 많은 활약을 펼치는데요. 그때 폭탄이 쏟아지는 난장판에 멍하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는 뤼스를 발견합니다. 레드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녀를 죽음의 불구덩이에서 끄집어 내고, 그런 레드에게 뤼스가 (당시로서는)일방적인 흥미를 느끼게 되죠. 첫만남부터가 그리 유쾌하지 못했고 그 이후로 이어지는 둘의 관계도 연인은 커녕 차라리 악연에 가깝습니다만, 하여튼 레드와 뤼스, 마멜리아의 사병과 랩틸 장교가 어떤 방식으로 만났든지 간에 전쟁은 계속 이어집니다. 둘의 관계 또한 전쟁에서 자유로울 리 없고요.
아마 이 작품을 찾아보는 독자들은 대다수가 수인이나 전쟁보다는 '백합'이라는 장르에 끌렸을 것이라 짐작이 가능하지만, 사실 1부가 끝난 시점에서도 정작 백합, 그러니까 뤼스와 레드의 사랑이나 연애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애시당초 병사와 장교가 알콩달콩 연애를 할 만한 환경이 아니기도 하고, 둘의 성격도 상극 내지는 최악에 가깝거든요. 그래서 1부와 2부 초중반까지 지면을 채우는 것은 군인으로서의 레드와 뤼스가 치루는 전쟁, 그리고 레드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뤼스와 그런 레드에게 사사건건 대드는 레드의 갈등입니다.
리뷰를 쓰는 시점에서 적은 분량은 아니지만 내용은 크게 진척되지 않았어요. 둘의 관계도 - 그렇게 될지 안 될지도 모르지만 - 간신히 원수는 면했다 수준이고요. 긴 호흡으로 지켜봐야 될 웹툰입니다. 앞으로도 백합이 단독으로 메인 장르가 될 것 같지는 않아요. 여자들의 관계에 온전히 초점을 맞춘 그런 백합물을 찾으신다면 다소 곤란합니다. 그럼에도 '온 어 리시'를 백합물로 추천할 수 있는 것은, 서사 매체로서 긴장과 갈등의 완급조절이 상당히 훌륭하고, 그리고 작품의 핵심을 맡고 있는 두 인물, 레드와 뤼스라는 인물과 그들의 관계가 무척이나 사려깊게, 인상적으로 그려졌으며, 따라서 백합 장르의 팬이라면 누구나 뤼스와 레드, 전혀 맞지 않는 두 여자의 관계 진전을 기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겁니다.
- 2018 / 03 / 06
P.S.
작가의 전작을 리뷰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서 확인 가능한데요. 위 작품과 비슷한 장르(백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