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척받는 영매사들, 그 혼란스러운 이야기 "누설"
최근의 창작물에서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비현실적, 초자연적 설정이 폭넓게 허용되고 있다. 물론 상상에는 한계가 없는 법이고, 창작의 세계에 그 어떤 금기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동시에 가상의 이야기라는 면피 아래 촘촘히 짜여 있는 현실의 법칙과 관습을 너무 간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은 자연적, 사회적, 인문적 원리에 의해 돌아가고 있는 복잡한 유기체이며, 만약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존재나 규칙이 등장했을 때는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큰 변화를 이끌어낼지도 모른다.
물론 이를 엄밀히 따지고 드는 것은 차라리 거대한 사회실험에 가까울 터, 그 한계가 명백하지만, 역시 한 번이라도 더 고민하는 창작자가 너무 적은 게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판타지 웹툰 ‘누설’은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종족, 새로운 능력, 그로 인한 변화를 진지하게 다룬 작품이다.
개화기의 조선 내지는 중국 정도를 모티브로 삼은 배경, 그리고 무엇보다 초월적인 존재들이 등장한 지 불과 15년여 밖에 되지 않았다는 설정은 매우 흥미롭다. 저승과 이승을 잇는 인간, ‘영매사’들과, 저승에 머물러 있다가 영매사의 부름을 받고 이어지는 ‘혼령’들. 이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았고, 많은 것들이 베일에 가려져 있으며, 영매사와 혼령 본인들조차 무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과 다른, 그러나 인간과 동일한 지능과 인격을 지닌 새로운 종(種).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변화이다. 생물학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는, 단지 외양에 있어 약간 다르거나, 심지어는 생긴 것조차 비슷한 인간들조차도, 민족(Ethnic Groups)이라 이름 붙인 상상의 공동체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는 세계이니 말이다.
영매사들은 심지어 능력이라는 측면에서도 평범한 인간을 압살한다. 단지 그 수가 적고 영매사들끼리도 싸우기 바쁜지라 협력이 안 될 뿐.
갑작스러운 이종족의 등장에 공식적인 제도는 전혀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영매사들을 통제하는 공무 집행 기구나 법률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자연히, 가장 민첩하게 반응하는 것은 돈을 좇는 민간의 무리들이다. ‘혼령사냥꾼’이라 불리는 통제받지 않는 여러 무력집단들이 사사로이 영매사와 혼령을 노린다. 초인적인 힘을 소유하게 된 영매사들 또한 곱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고,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 같다.
제도적으로 조율되지 않은, 전혀 다른 두 존재 - 평범한 인간과 영매사의 다툼은 격화되고 있을 뿐 달리 나아질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절대다수의 인간들에게 몰리고 있는 영매사들, 혹은 강인한 능력을 지닌 영매사에게 피해를 입은 인간들은 증오만을 키우고 있다.
‘산윤’은 붉은 얼굴이 인상적인 영매사로, 당뇨병에 시달리고 있다. 복잡한 과거를 지니고 있는 것 같고, 아마도 영매사들의 등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지만, 밝혀진 건 많지 않다. 본인은 영매사이지만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왔는지 현실 사정에 무지하며 인간과 영매사의 다툼에도 큰 관심이 없다. 우연히 소란에 휘말렸다가 과거의 실마리를 발견하고 이를 쫓는다.
‘오류’는 쥐 혼령과 함께하는 영매사로, 영매사 특유의 부작용으로 인해 20줄을 훌쩍 넘은 나이에도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고, 이를 큰 콤플렉스로 여기며, 이유 없이 자신을 핍박하는 인간들에게 깊은 증오를 품고 있다. 무인도에서 속세와 유리된 채 살다가 스승 ‘보리안’의 의지에 따라 밖으로 나왔다. 보리안 역시 영매사이지만 자신은 ‘인간’임을 강하게 긍정하며 영매사의 힘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이 사제(師弟)는 인간인 동시에 인간이 아닌 영매사들의 내적갈등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야기는 상당히 천천히 진행된다. 그리 유쾌하지 않은 사건을 전개시키며 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와 갈등을 조망한다. 인물들은 하나 같이 그러한 갈등을 대표하거나, 은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물론 서로 다른 정체성과 특징을 가진 집단의 다툼은 만화 밖 현실에서도 가장 흔하고 심각한 문제 중 하나이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보다 진지한 관점의 접근을 선호하는 독자라면 일독을 권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