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무사다 - 정통 판타지 서사시의 문을 열다
모처럼의 판타지 대작을 만난 것 같다.
방대한 세계관의 판타지는 작가라면 한 번쯤 끌렸을 법한 소재다. 나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또 그 세계의 거대한 변혁이 시작되는 서사시를 직접 그려내고 싶은 충동을 누구나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하 판타지를 ‘독자들에게’ 재미를 주는 것은 쉽지 않다. 세계관의 스케일이 커진다는 것은 그만큼 작가가 신경 쓰고 조율해야 할 배경 설정과 인물들이 늘어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웹툰 ‘그녀는 무사다’ 는 근래에 보기 드물 정도로 우직한 정통의 대하 판타지를 밀고 나가면서도 큰 혼란 없이 충분한 재미를 준 수작이다. 전체적인 분량과 그림, 스토리의 퀄리티를 생각했을 때 터무니없이 적은 댓글이 안타까울 정도이다. 아마 올레마켓 웹툰이라는 다소 마이너한 연재처가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줄거리는 길게 소개하기 보다는 독자들이 직접 읽는 쪽이 더 바람직하다. 시대 배경이 다소 모호한, 과거의 동양과 서양이 조금씩 섞여있는 판타지의 대륙에서,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대륙을 일통, 압제를 펼치는 제국에게 맞서는 무사들의 이야기쯤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무사다’ 를 성공적인 대하 판타지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현재까지 연재된 90화 분량 1부의, ‘운명적인 영웅의 성장기’ 가 충분히 매력적이고, 또 설득력 있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자고로 영웅이란 곧 재능과 운명을 타고난 존재인데, 고전 설화가 아닌 이상에야 단지 태생적인 능력만으로 모든 문제를 족족 해결하는 이야기 따위가 재밌을 리가 없을 것이다.
반면에 ‘그녀는 무사다’에서는 남들과 다른 운명을 타고났을지라도 척박한 환경에서 몰아닥치는 갖은 역경과 고난을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노력으로 힘겹게 해쳐나가고, 또 그런 힘을 타고난 주인공들을 노리는 온갖 세력의 암투와 경쟁,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의도하지 않은 돌발적인 변수와 결과들을 흥미진진하게 펼쳐가고 있다. 이야기의 완급조절이 매우 탁월하다.
조연으로 간주할 수 있는 인물들의 매력과 입체성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제국의 압제에 대항하는 ‘백귀’ 의 무사들 하나하나에 작가들의 애정이 느껴진다. 판타지 만화에 잘 어울리는 그림체와 인물 묘사와 더불어, 불과 2~3화만에 인물들의 과거를 간단명료하게 보여주면서 그들의 행동과 성격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에서도 고유의 전투 방식과 성격 등을 통해 입체적인 개성을 확보했다.
세계관은 독자들에게 지나친 괴리감을 주지 않으면서도, 동양 베이스의 대륙에 전형적인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 것을 알 수 있다. 배경이 되는 대륙이 워낙 광대하기 때문인지 새로운 사건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배경으로 거기에 어울리는 종족과 자연환경이 등장한다. 판타지에서 낯선 세상을 여행하는 재미는 절대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약간의 스포일러지만 거대한 운명을 둘러싼 ‘타고난 영웅’ 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이야기의 초점이 태풍의 핵보다는 그곳에서 약간 비켜선 쪽에 맞춰져 있는 점도 호평할 만하다. 원하는 내용을 그리면서도 진부함을 피할 수 있는 영리한 방법이다. 다소 뻔한 소재라 해도, 독자들을 이끄는 안내자의 위치를 약간 비틀어주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는 또 다른 생명력을 얻는다.
거대한 서사시, 판타지, 그리고 영웅담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필히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