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연재시작일: 2018.02.01
1. 작품 소개<br/><br/>널 어떻게 모를까.<br/>어떻게 하면 널 모를 수 있을까.<br/>급작스럽게 결정된 한국에서의 겨울.<br/>그리고 너무나 빨리 마주쳐버린,<br/>‘첫사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남자 이준.<br/><br/><br/>“나 이준인데.”<br/>“나 윤시은. 시아 아니고.”<br/>답을 알면서도 기어이 내 하고 싶은 말을 했다.<br/>“……그 소리 정말 오랜만에 듣네.”<br/><br/><br/>없던 사연이 생겨버린 시은.<br/>어떤 사연이라도 괜찮다는 이준.<br/>13년 만에 만난, 31세의 그들.<br/><br/><br/>2. 미리 보기<br/><br/>피로나 잠은 애저녁에 달아났다. 대신 나는 남의 학교 앞을 서성였다. 정작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이모가 사는 옆 동네에 있었다.<br/>‘서경고등학교.’<br/>외국인인 클라인의 입으로 들을 때에는 그렇게 생소하더니 눈으로 명판을 보고서야 좀 그럴듯했다. 학교 예산이 모자란가, 벽돌 정문의 명판은 가장자리 녹슨 모양까지 변한 게 없었다.<br/>“아아…….”<br/>‘서’ 자의 모서리에 이끼같이 어두운 자국을 더듬어보았다. 숨은 그림 찾기라도 한 것처럼 웃음이 났다. 우리 학교 정문은 어디에 뭐가 붙었나 기억도 못 하는 주제에 남의 학교 앞에서 잘하는 짓이다.<br/>그래도 나만큼 이 학교 앞을 잘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난 이 학교가 생긴 이래로 교문 앞을 서성인 사람 중에서 가장 집요한 여자였다. 오후 5시면 늘 여기서 시아가 마치는 것을 기다렸고, 한 번씩은 4시에 오기도 했다.<br/>그때에는 다른 사람을 기다렸지만.<br/>“……여기 볼일 있어요? 누구 기다려요?”<br/>“아뇨. 그건 아닌데.”<br/>“학교에 그렇게 막 들어가면 안 되는데.”<br/>정신을 팔고 있느라 수위아저씨가 다가온 것도 몰랐다. 여자이다 보니 아주 크게 경계하는 건 아니지만 무슨 일인가 떠보는 눈에 움찔해버렸다.<br/>죄지은 것도 아니고 볼일이 있다 둘러대면 되는데 나는 그럴 만한 센스도 없었다. 어어, 하고 어벙하게 구는 사이에 볼일이 있다 거짓말할 기회가 모두 달아났다. 사람은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하는 법이거늘.<br/>“……그럼 학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br/>“뭐 그런 걸 물어요?”<br/>딴에 최대한 솔직하게 이야기한 건데 아저씨 눈에 의심이 더욱 짙어졌다.<br/>“학교에 오려면 학부모나 학생이나 선생이나 그래야지. 볼일이 있거나.”<br/>“아…….”<br/>전부 아니다. 교문도 열려 있으니 그냥 좀 들어가면 될 것 같은데 입구부터 야박했다. 나는 아빠를 닮아서인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br/>그래도 저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킨다는데. 어쩔 도리가 없이 미적대다가 벨소리 요란한 휴대전화를 꺼냈다. 엄마였다.<br/>“응, 엄마.”<br/>- 너 어디야. 밖이야?<br/>영상통화 버튼을 누르자 목소리는 엄마인데 화면은 예쁜 아인이로 가득 찼다. 심심하니 전화를 걸어달라고 고집을 부린 모양이었다. 내가 전화할 만한 멀쩡한 가족도 있다는 게 확인되자 수위아저씨는 괜히 철제 정문을 매만지고 있었다.<br/>“아인아, 외할머니랑 뭐 해?”<br/>- 엄마, 엄마야?<br/>“응. 우리 아인이 밥 먹었어? 할머니들이랑 노니까 재미가 없어?”<br/>- 엄마아.<br/>아인이는 내가 보고 싶다고 웅얼거리다 훌쩍였다. 독일에선 독일말 못하는 외할머니만 아쉬웠는데 아인이도 한국 오고 처지가 바뀐 게 서러운가 보다.<br/>“아인아, 아인이 데리러 갈까?”<br/>- 됐어. 뭘 또 와. 너도 너무 다니지 말고 밥 먹어.<br/>엄마가 흐느끼는 아인이를 달래는 모습이 보였다. 이내 전화기를 내팽개쳤는지 화면엔 어느 식당 천장만 가득했지만 차마 그대로 끊을 수는 없었다.<br/>“아인아? 왜 울어?”<br/>- 엄마아. 히이잉.<br/>입을 내민 아인이가 전화기를 꼭 부여잡았다. 사랑하는 조카의 울먹임에 화면 속 작은 네모 안 내 얼굴도 같이 울상이 되었다. 거울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이다. 이만 전화를 끊으려는데 어느 무도한 남자가 그 작은 네모를 비집고 들어왔다.<br/>“……네 딸이야?”<br/>“엄마야! 하아.”<br/>사람이 이렇게 놀랄 수도 있다니.<br/>안 그래도 오랜 피로 누적으로 지쳐버린 내가 가슴에 손을 얹고 놀란 숨을 헐떡였다. 눈앞의 무례하고 뜬금없는 남자를 노려볼 힘도 없어 눈부터 질끈 감았다.<br/>“잘못 봤나 했어.”<br/>“…….”<br/>할 말을 잊었다. 나는 이 뻔뻔한 남자를 두고 이번에도 어벙하게 굴었다. 반가운 척해본다거나, 도대체 네가 누구냐며 모른 척할 모든 기회를 놓쳤다.<br/>“아, 서 선생님 친구분이셨어? 그럼 말을 하시지.”<br/>“네. 괜찮으니 이만 가보세요. 제 친구거든요.”<br/>수위아저씨가 이 남자의 한마디에 반색하며 태도가 달라졌다. 왜 진작 말을 안 했냐는 타박 아닌 타박을 길게 하다 바로 자리를 떴다. 아까까지는 제발 좀 가줬으면 싶던 사람이 막상 떠나자 바짓가랑이라도 붙들어놓고 싶었다. 나와 이 남자 단둘이 있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br/>“한국 온 거야?”<br/>“어.”<br/>“아주?”<br/>“아니.”<br/>“그랬구나.”<br/>뭔가 바로 이어 말을 할 듯했던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있다가 목덜미를 쓸며 웃었다.<br/>“나 서이준인데.”<br/>단답형의 성의 없는 대답을 깨트리고는 그의 이름이 나왔다. 내가 그를 모른 척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난 이제 자연스레 ‘맞다, 너 서이준이었지.’ 하며 마치 긴가민가했다는 말투로 웃어주면 그만이었다.<br/>간단하다. 쉽다. 내가 다루는 꼬부랑 숫자들에 비하면 자존심이 상할 만큼.<br/>“나 윤시은. 시아 아니고.”<br/>나는 왜 이럴까. 답을 알면서도 기어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멍청하고 미련한 것과는 달랐다. 나는 이 남자를 모른 척할 만큼 뻔뻔하지 못했고 그럴 연기력도 부족했다.<br/>“……그 소리 정말 오랜만에 듣네.”<br/>서른이 갓 넘은 남자의 미소는 더 이상 상큼하진 않지만 그윽해졌다. 열여덟, 프랑크푸르트의 첫 겨울쯤에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다.<br/>널 어떻게 모를까. 어떻게 하면 널 모를 수 있을까.<br/>시아의 표현대로라면 이놈은 ‘착하고 순진한 우리 두 자매를 농락하고 뻔뻔하기 이를 데 없으며 얼굴값만 오지게 하는 천하의 나쁜 놈’이다. 그리고 내 표현대로라면 더없이 간단한.<br/>“…….”<br/>그러니까 ‘첫사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1. 작품 소개널 어떻게 모를까.어떻게 하면 널 모를 수 있을까.급작스럽게 결정된 한국에서의 겨울.그리고 너무나 빨리 마주쳐버린,‘첫사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남자 이준.“나 이준인데.”“나 윤시은. 시아 아니고.”답을 알면서도 기어이 내 하고 싶은 말을 했다.“……그 소리 정말 오랜만에 듣네.”없던 사연이 생겨버린 시은.어떤 사연이라도 괜찮다는 이준.13년 만에 만난, 31세의 그들.2. 미리 보기피로나 잠은 애저녁에 달아났다. 대신 나는 남의 학교 앞을 서성였다. 정작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이모가 사는 옆 동네에 있었다.‘서경고등학교.’외국인인 클라인의 입으로 들을 때에는 그렇게 생소하더니 눈으로 명판을 보고서야 좀 그럴듯했다. 학교 예산이 모자란가, 벽돌 정문의 명판은 가장자리 녹슨 모양까지 변한 게 없었다.“아아…….”‘서’ 자의 모서리에 이끼같이 어두운 자국을 더듬어보았다. 숨은 그림 찾기라도 한 것처럼 웃음이 났다. 우리 학교 정문은 어디에 뭐가 붙었나 기억도 못 하는 주제에 남의 학교 앞에서 잘하는 짓이다.그래도 나만큼 이 학교 앞을 잘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난 이 학교가 생긴 이래로 교문 앞을 서성인 사람 중에서 가장 집요한 여자였다. 오후 5시면 늘 여기서 시아가 마치는 것을 기다렸고, 한 번씩은 4시에 오기도 했다.그때에는 다른 사람을 기다렸지만.“……여기 볼일 있어요? 누구 기다려요?”“아뇨. 그건 아닌데.”“학교에 그렇게 막 들어가면 안 되는데.”정신을 팔고 있느라 수위아저씨가 다가온 것도 몰랐다. 여자이다 보니 아주 크게 경계하는 건 아니지만 무슨 일인가 떠보는 눈에 움찔해버렸다.죄지은 것도 아니고 볼일이 있다 둘러대면 되는데 나는 그럴 만한 센스도 없었다. 어어, 하고 어벙하게 구는 사이에 볼일이 있다 거짓말할 기회가 모두 달아났다. 사람은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하는 법이거늘.“……그럼 학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뭐 그런 걸 물어요?”딴에 최대한 솔직하게 이야기한 건데 아저씨 눈에 의심이 더욱 짙어졌다.“학교에 오려면 학부모나 학생이나 선생이나 그래야지. 볼일이 있거나.”“아…….”전부 아니다. 교문도 열려 있으니 그냥 좀 들어가면 될 것 같은데 입구부터 야박했다. 나는 아빠를 닮아서인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그래도 저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킨다는데. 어쩔 도리가 없이 미적대다가 벨소리 요란한 휴대전화를 꺼냈다. 엄마였다.“응, 엄마.”- 너 어디야. 밖이야?영상통화 버튼을 누르자 목소리는 엄마인데 화면은 예쁜 아인이로 가득 찼다. 심심하니 전화를 걸어달라고 고집을 부린 모양이었다. 내가 전화할 만한 멀쩡한 가족도 있다는 게 확인되자 수위아저씨는 괜히 철제 정문을 매만지고 있었다.“아인아, 외할머니랑 뭐 해?”- 엄마, 엄마야?“응. 우리 아인이 밥 먹었어? 할머니들이랑 노니까 재미가 없어?”- 엄마아.아인이는 내가 보고 싶다고 웅얼거리다 훌쩍였다. 독일에선 독일말 못하는 외할머니만 아쉬웠는데 아인이도 한국 오고 처지가 바뀐 게 서러운가 보다.“아인아, 아인이 데리러 갈까?”- 됐어. 뭘 또 와. 너도 너무 다니지 말고 밥 먹어.엄마가 흐느끼는 아인이를 달래는 모습이 보였다. 이내 전화기를 내팽개쳤는지 화면엔 어느 식당 천장만 가득했지만 차마 그대로 끊을 수는 없었다.“아인아? 왜 울어?”- 엄마아. 히이잉.입을 내민 아인이가 전화기를 꼭 부여잡았다. 사랑하는 조카의 울먹임에 화면 속 작은 네모 안 내 얼굴도 같이 울상이 되었다. 거울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이다. 이만 전화를 끊으려는데 어느 무도한 남자가 그 작은 네모를 비집고 들어왔다.“……네 딸이야?”“엄마야! 하아.”사람이 이렇게 놀랄 수도 있다니.안 그래도 오랜 피로 누적으로 지쳐버린 내가 가슴에 손을 얹고 놀란 숨을 헐떡였다. 눈앞의 무례하고 뜬금없는 남자를 노려볼 힘도 없어 눈부터 질끈 감았다.“잘못 봤나 했어.”“…….”할 말을 잊었다. 나는 이 뻔뻔한 남자를 두고 이번에도 어벙하게 굴었다. 반가운 척해본다거나, 도대체 네가 누구냐며 모른 척할 모든 기회를 놓쳤다.“아, 서 선생님 친구분이셨어? 그럼 말을 하시지.”“네. 괜찮으니 이만 가보세요. 제 친구거든요.”수위아저씨가 이 남자의 한마디에 반색하며 태도가 달라졌다. 왜 진작 말을 안 했냐는 타박 아닌 타박을 길게 하다 바로 자리를 떴다. 아까까지는 제발 좀 가줬으면 싶던 사람이 막상 떠나자 바짓가랑이라도 붙들어놓고 싶었다. 나와 이 남자 단둘이 있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한국 온 거야?”“어.”“아주?”“아니.”“그랬구나.”뭔가 바로 이어 말을 할 듯했던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있다가 목덜미를 쓸며 웃었다.“나 서이준인데.”단답형의 성의 없는 대답을 깨트리고는 그의 이름이 나왔다. 내가 그를 모른 척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난 이제 자연스레 ‘맞다, 너 서이준이었지.’ 하며 마치 긴가민가했다는 말투로 웃어주면 그만이었다.간단하다. 쉽다. 내가 다루는 꼬부랑 숫자들에 비하면 자존심이 상할 만큼.“나 윤시은. 시아 아니고.”나는 왜 이럴까. 답을 알면서도 기어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멍청하고 미련한 것과는 달랐다. 나는 이 남자를 모른 척할 만큼 뻔뻔하지 못했고 그럴 연기력도 부족했다.“……그 소리 정말 오랜만에 듣네.”서른이 갓 넘은 남자의 미소는 더 이상 상큼하진 않지만 그윽해졌다. 열여덟, 프랑크푸르트의 첫 겨울쯤에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다.널 어떻게 모를까. 어떻게 하면 널 모를 수 있을까.시아의 표현대로라면 이놈은 ‘착하고 순진한 우리 두 자매를 농락하고 뻔뻔하기 이를 데 없으며 얼굴값만 오지게 하는 천하의 나쁜 놈’이다. 그리고 내 표현대로라면 더없이 간단한.“…….”그러니까 ‘첫사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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