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가족이기주의가 <엔드게임>을 망쳤다.

최서윤 | 2019-04-30 12:18


가족이기주의는 세상을 망친다가족의 이익을 다른 무엇 보다 앞세우다보면 더 큰 공동체의 편익은 훼손될 수 있다.

 

가족이기주의가 <어벤져스: 엔드게임>도 망쳤다. 물론 <엔드게임>이 아주 형편없이 망가진 영화라는 뜻은 아니다. 효과적인 유머도(주로 캡틴 아메리카와 관련된 것들이다), 눈시울을 붉히는 감동도 있었다. 다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잘 만든 영화였구나, 재평가하게 될 정도로 <엔드게임>에 아쉬운 점이 많았다는 것이다. <인피니티 워>도 단점은 있었지만 적어도 <엔드게임>만큼 영화를 길고 지루하게 만드는 씬이 난무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게 뭐 화가 날 정도의 일은 아닐 수 있다. ‘루소 형제(<캡틴 아메리카: 윈터솔져>,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공동 감독잘나가다 왜 그랬소정도의 안타까움이었는데 내막을 듣고 나니 화가 났다영화 보며 저 장면은 쳐내도 될 것 같은데, 싶었던 씬의 출연자들이 죄다 루소네 가족들이었다고. 충분히 더 잘 만들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까닭이 가족이기주의였다니!

 

편집해도 좋았을 장면에 대해 설명 하자니 역시나 스포일러 투성이가 될 것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거나, 스포일러에 노출되어도 무관한 사람들만 이 다음을 읽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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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게임>은 호크아이 가족들의 평화로운 한 때를 비추며 시작한다. 관객은 그게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가 우주 생명체 절반을 소멸시키기 위해 손가락을 튕기기 직전임을 유추할 수 있다. 영화는 사격을 배우던 호크아이의 딸과, 간식을 준비하던 그의 부인과 재잘거리던 아들들이 모두 먼지로 변하는 과정을 찬찬히 보여준다. 호크아이의 가족 잃은 황망함과 애통함, 좌절과 분노를 공들여 그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애통함 같은 건 대사나 회상으로 짧게 처리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호크아이 보다 인지도 높은 캐릭터인 헐크가 배너 박사와 융합된 과정도 대사로 간단히 처리했으면서, 상대적으로 인기 없는 캐릭터인 호크아이의 내면 풍경 묘사를 위해 그렇게 많은 시간을 쓴다고?

  

이미 전작 <인피니티 워>의 결말에서 지구 절반이 사라진 상황은 충분히 보여줬다. 호크아이 가족이 먼지가 되는 것은 이야기 진행에 필수적인 씬이 아니었다. 게다가 호크아이가 그렇게 오래 보고 싶은 캐릭터인가? 그의 주된 싸움 기술은 타격감 넘치는 방식이 아닌 원거리 공격, 활쏘기이고 그다지 재미있는 농담을 던지는 성격도 아니며, 그렇다고 연기하는 배우의 외양이 황홀하게 근사한 편도 아니라서 보고 있기 영 지루한 캐릭터다. 그래서 감독의 판단에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호크아이 딸로 나온 사람이 감독의 딸이란다. 그 사실을 알고 무릎을 탁 쳤다. 자기 딸 오래 비춰주려고 그렇게 늘어지는 편집을 한 것이 아닌가! 어쩌면 한 가족의 가장인 호크아이에게 또 다른 가장인 감독이 흠뻑 이입했을 수도 있겠고.

 

어쨌든, 그 뒤 영화는 아이언맨이 캡틴마블과 함께 지구로 귀환하고, 나머지 어벤져스들이 병들고 지친 타노스를 허무하게 처단하는 것을 보여준 뒤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다. 5년이 지난 시점을 보여주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그때의 충격과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임을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떠올리게 하는 도시의 풍경을 비추며 드러낸다. 그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굳이 사람들이 황량한 내면과 사건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치로 캡틴아메리카가 주도하는 극복 모임을 비출 필요가 있었을까? 캡틴아메리카가 절망적인 현실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성격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기에는 글쎄, 결말에서의 그 선택과 대치되는데 굳이? 게다가 그 다음 센터에서 나타샤와 대화하는 장면에서도 상황에 대한 인물의 입장은 드러낼 수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모임에서 새로운 동성 애인을 만나는 남자로 나오는 것이 루소들 중 하나란다. 이야기 진행에 썩 필요하지 않고, 지루하고, 주요 캐릭터의 모순을 강조하는 장면인데도 편집하지 않은 것, 설마 자기가 나온 장면이라서야? 그리고 그걸 다른 형제는 눈감아줬고? 가족이기주의의 또 다른 사례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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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5년 뒤 우연한 계기로 앤트맨이 돌아오고, 그가 살아남은 어벤져스 멤버를 찾으며 이야기는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뿔뿔이 흩어진 어벤져스 멤버를 규합하고 작전을 세우는 과정에서 앤트맨은 차분해진(어떻게 보면 나사가 하나 빠진 듯도 한) 헐크 박사를 만난다. 그는 함께 사진을 찍자고 요청하는 아이들에게도 친절하지만, 그 친절이 앤트맨에게는 독이 된다. 헐크의 달라진 성격을 묘사하는 유머러스한 장면이다. 다만 이 역시 필요 이상으로 길다. 알고 봤더니 사진 찍자고 요청하는 아이들도 루소네 핏줄이었다고. 루소는 정말 못 말려.

 

작품 외적의, 제작 과정에서의 가족주의뿐만 아니다. 작품 내 녹아있는 가족주의 역시 비판의 지점이 있다. 각본가와 연출진이 가장의 무게를 진 캐릭터들에 과하게 애정을 느끼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려 한 순간들이 특히 그렇다. <어벤져스> 최근 시리즈에서 가장의 무게가 부각된 캐릭터로 타노스, 호크아이, 아이언맨을 꼽을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마음이 움직인 것은 아이언맨의 서사뿐이었다(자신을 3000만큼 사랑하는 딸을 두고,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하며 세계평화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영웅의 비극이라니...엉엉). 타노스와 호크아이의 감정을 전달하려는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가부장의 비감함을 관객에게 억지로전달하려다보니, 지독히 과잉된 장면이 뜬금없이 튀어나오게 된다. 가족들을 잃은 뒤 악당들을 도륙하는 살인귀가 된 도쿄에서의 호크아이를 오래도록 비춘 씬이 대표적이다. 일본인 악당을 만화적 스테레오 타입으로 과장하여 그려내고, 그를 잔인하게 해치우는 것은 작품 전체의 결에 어울리지 않았고, 이야기 진행에 꼭 필요한 장면도 아니었다. 가족을 잃고 황폐한 내면을 갖게 된 호크아이를 표현하고자한 욕구가 지나치게 충만했던 것 아닌가?

 

<인피니티 워>에서 가모라를 희생시킨 뒤 괴로워하는 타노스를 비추며, 관객에게 일종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려 했던 연출도 같은 결에 있다. 가부장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역겹게 보일 뿐이었던 그 장면. 여담이지만 타노스가 왜 그리 가모라를 특별하게 여긴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른 양자 네뷸라에게는 신체개조고문까지 할 정도로 엄했던 타노스인데 말이다다른 입양아들 보다 우수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까지 편애할 수가 있나? 에로스가 내재된 차별이 의심되어 징그럽다.  

 

그러고 보면 타노스에게 오랜 세월 직접적으로 학대 받았던 가모라와 네뷸라가 힘을 합쳐 타노스의 목을 따버렸어야 제대로 정의 구현 결말이었을 것 같은데, 그 점이 가장 아쉽다. 마블 스튜디오의 개국공신아이언맨에 대한 예우는 이해하지만 말이다. 제대로 예우한 덕인지, 아이언맨의 서사는 확실히 마음을 움직였다. 지난 11년의 세월을 함께했던, 짧지 않은 여정의 일단락을 실감하며 눈시울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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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년간,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가 개봉하고 이를 본 사람들끼리 다양한 감상과 해석을 나누는 일들은 일종의 축제와도 같았다. 마블 스튜디오가 만든 세계와 그 세계 안의 사람들에게 매료됐고, 매료된 다른 이들과 영화에 대해 열기 어린 대화를 나눌 때 일종의 느슨한 공동체에 속해있다고 느꼈다. 감독들의 사리사욕에 의한 작품성 훼손은 공동체에 실망을 안기는 일이다. 강산이 바뀔 세월을 함께 해 온 이로서 이 정도 아쉬움은 토로할 수 있으리라.

 

실망하며 투덜댔지만, 몇 번 더 실망을 거듭하기 전까지는 계속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를 극장에 달려가 관람하는 호구로 남을 전망이다. 남겨졌던 사람들과 5년을 점프해 돌아온 사람들의 충돌과 부적응은 필연적일 텐데, 마블은 이 혼란한 세계관을 앞으로 어떻게 그려나갈 것인가? 설정 오류로 보이는 것들은 더 많은 시리즈를 우려먹기 위한 디즈니의 큰 그림이었을까? 스톤을 가져올 때의 해프닝으로 인해 생긴 평행우주들은 다음 시리즈에서 어떻게 등장할 것인가? 아직 나는 이 세계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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