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는 입덕관문이어야 합니다
6월 3일부터 10월 3일까지. 넉 달 간 이어진 ‘황소’의 화가, 이중섭 회고전이 막 끝난 참이다. 거센 콧김을 뿜으며, 금방이라도 힘차게 땅을 구르며 앞으로 나아갈 것 같은 소의 역동성을 단순한 선과 면으로 표현한 멋진 그림, ‘황소’. 이중섭의 황소를 모르는 한국인은 아마(...거의?) 없을 거다. 그만큼 유명한 탓에(교과서에도 실리니까!) 황소 이외의 작품 활동은 생각만큼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는 무지한 나의 이야기). 전시 종료 한 달 쯤 전에 관람하며 나는 그의 짧지만 활발하고 변화무쌍한 작품 활동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중섭의 <황소>. 2010년 경매에 나와 역대 이중섭의 작품 중 최고가(35억 6000만)를 경신한 작품이라고.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을 모두 겪으며 살았던 이중섭 화가는 각각의 시기마다 화풍도, 그림의 만듦새도, 재료도 달랐다. 한국 땅이 곧 일본 땅이던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그는 꽤 부유한 유년기를 보냈다.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도쿄 유학을 떠날 정도였으니까. 도쿄 유학시절 프랑스나 독일, 영국 등 서양의 앞선 문명을 한껏 빨아들이며 자신의 사유와 화풍을 구축해나갔다. 평생의 사랑이 될 아내도 이 때 만났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경상남도 여수에 일자리를 얻어 윤택한 생활을 할 때가 있었는데, 여유롭고 서정적이며 생기 넘치는 유화를 주로 그렸다. 해방 이후 월남해 전국을 유랑하듯 일정한 거주지 없이 지내던 시간 동안은 완성된 그림이 아닌 작은 사이즈의 종이에 드로잉, 메모, 크로키 같이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는 그림을 선호했다. 국내 정세가 계속해서 혼란 일색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가족을 일본으로 보내고 홀로 부산으로 피난 와 살기 시작하고는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지금 시대에 보아도 조금 부끄러울 정도로 격렬한 애정표현을 담은 편지에 그림을 그렸다. 아내에게는 성숙한 문체의 연서를,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는 아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풀어 쓴 말과 만화 같은 그림을 덧붙였다. 결국 가족과 만나지 못하고 가난과 우울, 병에 절어 침잠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그림의 색조와 구도가 경직되고, 무기력했다. 땅을 울리고, 공기를 찢을 기세였던 황소는 무언가에 짓눌려 고통 받고 야위고 힘없는 모습으로 겨우 땅을 디디고 버티고 있었다. 자리에 누워 껌종이나 담배종이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결국 그가 사망한 1956년에서 1년 쯤 전 부터는 절필을 선언, 남긴 작품은 없었다.
2016년,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그리고 그는 온 대한민국 국민에게 ‘황소’로 기억되는 최고의 화가로 남았다. 그토록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이중섭은 황소요, 민족의 기상과 암울한 현재를 힘찬 미래를 개척하며 해쳐나가자는 의지를 화폭에 담은 민족주의 성향의 화가다. 그의 감수성 충만한, 혹은 시대의 탁류에 휩쓸리고 만 개인사에 기인한 작품들은 황소와 동일한 이름값을 얻지 못했다. 예술가의 인생을 통틀어 이토록 유명한 작품을 남길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영광이지만, 다만 한 작품만으로 세기를 넘어 회자된다면, 예술가는 납득할 수 있을까. 어쩌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내 대표작에서 ‘황소’를 지워줘!”라고 외치고 싶지는 않을지. 물론 개인적인 망상에 불과합니다만.
만화가 천계영의 <오디션>, 작품 속 네 주인공. 현재 천 작가의 스타일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우리는 모든 예술분야에서 이런 모습을 쉽게 목격한다. 사람들은 대개 카테고리화 하는 것, 내가 익숙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무언가로 태그를 붙이는 걸 좋아한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 말했듯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니까. 그래서 우리는 아다치 미츠루 =, 김성모 = <대털>, 이노우에 다케히코 = <슬램덩크>, 요시나가 후미 = <서양골동양과자점>, 천계영 = <오디션> 같이 작가와 대표작 한 개를 매칭시켜 기억해둔다. 백 년 뒤에도 만화가들이 마치 이중섭처럼, 여전히 인구에 회자되는 작가로 남는다고 생각해보자. 모두가 현재 한창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니 백 년 쯤 뒤에는 이제까지 쌓아놓은 작품보다 훨씬 많은 작품목록을 갖출 확률이 높다. 만년에 화풍이나 성향이 드라마틱하게 바뀌고, 바뀐 스타일로 오랫동안 작업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백 년 뒤에 “21세기에 천계영이라는 최고의 만화가가 있었어. <오디션>이라는 열 권짜리 작품을 연재했는데 그것이 십 년 뒤 전 세계적으로 유행할 서바이벌 리얼리티 예능방송의 시발점이 되었고 음악과 만화를 접목한 뛰어난 작품으로 인기가 어마어마했지. 허리가 유독 긴 인체비율이 신경 쓰이지만 이건 비교적 단신에 속했던 작가가 작품 속 인물들만이라도 길쭉길쭉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어간 그만의 개성이니까 괜찮아….” 같은 얘길 하며 <오디션> 전 후의 이야기 없이 오직 <오디션>으로만 작가의 설명을 마친다면.
물론 딱 한 작품으로 설명을 끝낼 수 있는 원히트원더도 많다. 단 한 작품도 만방에 알리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예술가는 아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거다. 그러니 한 작품이라도 이토록 오랫동안 읽히고 소비되며 작가의 이름을 빛낼 수 있다면, 그걸로 좋지 않으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대표작은 작가를 설명하는 첫 문장, 그러니까 ‘입덕’을 위한 밑밥으로 쓰고, 적어도 작품목록의 절반 정도는 파보고 ‘나만의 대표작’을 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입덕… 오덕이 되라는 말인가? 뭐, 그렇다. 인터넷 뉴스가 아무리 ‘제곧내(제목이 곧 내용)’여도 클릭해서 읽고 내용이 없으면 악플이라도 달고, 어떤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대표작 한 개 말고 적어도 몇 가지는 더 댈 수 있도록 조금 더 깊이 파보자는 얘길 하고 싶다. 작가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건 물론 아니다. 우리가 좀 더 즐겁고 윤택하기 위해서. 덕질은 삶을 촉촉하게 적셔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