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칼럼] 웹툰 후레자식 청소년 보호법 위반 고소 사건, 혐의없음 결과를 보고 느낀 소고
청소년 보호법 위반으로 고소를 당했던 김칸비 작가/황영찬 작가의 네이버 웹툰 ‘후레자식’이 2016년 9월 30일 날짜로 혐의없음 결과를 받았다.
해당 사건은 2016년 7월경에 다음 아고라 청원 페이지를 통해 ‘평범한 아빠의 네이버 고소 이유? 웹툰 전체 이용가의 진실’이란 글이 올라오면서 중학생과 초등학생 자녀를 키우는 평범한 아빠라고 자신을 소개한 학부모 독자가 웹툰 후레자식을 고소한 것이다.
정확히는, 해당 웹툰이 살인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한다며 살인 피해자와 여성에 대한 비하, 노인 멸시를 하고 있고 전체 이용가인데도 장기밀매, 원조교제 등의 자극적인 내용이 나온다고 해서 해당 웹툰을 그린 작가는 물론이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장, 한국만화가협회장, 네이버까지 해당 웹툰의 심의/배포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고소장을 접수한 것이다.
해당 웹툰이 살인마 아버지와 함께 살인을 저지르던 아들이 이후 아버지와 맞서며 비정상적인 환경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라고 해서 네이버측 관계자는 성장 드마라로 장르를 판단해 전체 이용가로 설정했다고 했는데 살인마, 살인 등의 요소가 주요 태그로 나온 시점에서 전체연령가로 설정한 건 무리수가 따른 결정이었고 언젠가 심의에 대한 태클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해당 웹툰이 살인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인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보는 독자가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살인 미화물이라 판단을 내리면 그 시점에서 수위 조절과 심의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와 달리 독자의 왜곡된 해석이 나와서 작가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만, 그게 사회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차용한 작품이 가진 태생적 한계다.
독자의 연령, 성향에 따라 감상도 반응도 천차만별인데 독자 반응이 작가 의도와 다르게 나올 수 있는 건 당연한 것이고, 작가는 항상 그런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독자가 작품을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해석해도, 그 독자를 품지는 못할지언정 왜 그런 반응이 나오는지에 대해선 최소한의 이해를 해야 한다는 소리다.
그건 자신의 작품을 대중에게 공개하고 그걸 판매해 먹고 사는 상업 작가로서의 의무다.
언젠가 부딪쳐야 할 문제였고, 그 문제를 피하기 위해 대상 연령 설정이라도 확실하게 했어야 했다.
모두가 볼 수 있는 전체 연령가로 설정했기 때문에 이 사단이 난 것으로 그 부분에 있어 작가나 플랫폼이 안이하게 생각한 게 아닐까 싶다.
심의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대다수가 내부적으로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이게 왜 그렇게 논란이 된 건가?’라는 반응을 보이는데 그건 잘못된 거다.
창작하고, 서비스하는 사람들은 ‘일이 그렇게 될 줄 알아야’하고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게 미리미리 잘 관리해야 한다.
작품을 만들고 서비스하는 걸로 장땡이 아니라 보는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신경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내 생각에 전연령이 될 것 같아도, 세상의 상식이 18금이 맞다고 본다면 거기에 따라야 한다. 대중에게 서비스되는 작품으로선 당연한 이치다.
해당 웹툰은 현재 만 18세 미만 관람불가로 설정되어 있는데 처음부터 그렇게 연령 제한을 걸어두었다면 이런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미성년자 독자가 어떠한 루트로 해당 작품을 보고 학부보 독자가 항의를 했다면, 본 작품은 18세 미만 관람불가 웹툰으로 미성년자 독자가 그것을 본 것은 불법이고 학부모의 자녀 관리 소흘 문제라고 역으로 타박할 수 있었으리라 본다.
해당 웹툰의 창작/심의한 모든 사람을 고소 고발한 것도 대단한 무리수로 진작 ‘혐의없음’ 결과가 나올 줄 알았다.
만약 전체 이용가 판정을 내린 네이버만 고소했다면 또 모를까, 해당 웹툰의 작가까지 고소해서 작가와 작품까지 제재를 가하려 한 것은 명백히 창작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며 독자의 권리를 넘어선 월권행위다.
고소인은 청원의 목적이 아이들에게 보호 장치 없이 너무 쉽게 보는 웹툰 시스템을 바꾸어 보고 싶다고 했는데 결국 그렇게 다 고소하면서 웹툰의 바람직한 성장 대안을 찾고자 한다는 주장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지극히 감정적인 대응이자 업악인데 억압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해주고, 어디까지 규제해야 하는지는 예전부터 쭉 이어져 온 문제고. 창작물을 만들고 판매하는 장르 시장에서는 절대 피해갈 수 없는 문제다.
그 문제는 충분한 논의를 거쳐 시간을 들여 천천히 해결해야 할 문제지. 지금 당장 싹을 제거해 버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규제 강화는 필연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그렇게 해서 열린 지옥도를 이미 90년대 만화 시장이 체험했다.
1997년 청보법이 발효되면서 한국 만화 시장이 입은 피해를 생각해 보면 빈말로도 규제 강화에는 찬성할 수가 없다.
무조건 창작의 자유를 주장하며 감성적인 호소를 하는 거나, 무조건 규제 강화를 주장하면서 억압하려고 하는 건 어느 쪽도 대안이 될 수 없다.
작가와 플랫폼이 동급/심의에 대해서 좀 더 신중하게 고민하고 생각해 결정을 내리고, 나 자신의 상식이 아닌 대중의 상식을 고려하면서,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이 행여나 있다면 생걱없이 OK하고 넘어갈 게 아니라 작가와 플랫폼이 서로 상의를 하면서 자체 모니터링을 강화하는 게 차선책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