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괴에 사로잡힌 소설가, 교고쿠 나츠히코
일본의 오니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도깨비만을 뜻하지 않는다. 영화 <음양사>를 본 사람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사랑을 잃어버린 여인이 술수에 넘어가 한을 갖게 되고, 마침내 살아있는 요괴가 되어버리는 것을. 원망이나 분노, 슬픔의 도가 지나치면, 살아있는 그대로 뿔이 나고 입이 찢어지며 요괴가 되어버린다. 죽은 후에 귀신이 되는 것도, 처음부터 오니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인간이었지만 이제는 오니다. 원래 오니였던 존재도 있고, 산 사람이 오니가 되기도 하고, 사물이 시간이 흘러 오니가 되기도 한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 <광골의 꿈> 등 '교고쿠도 시리즈'의 우부메와 망량, 광골 등은 모두 요괴의 이름이다. 소설에는 그 요괴들과 얽힌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하지만 묘하다. '교고쿠도 시리즈'는 오히려 전통적인 추리소설에 가깝다. 요상한 사건이 있고, 사건의 트릭을 '안락의자형 탐정'과 흡사한 추젠지 아키히코가 풀어낸다. 추젠지는 헌책방 교고쿠도의 주인이자 음양사이지만 주문이나 술법이 아닌 논리적 분석을 통해 사건을 풀어낸다. 인간의 기억을 시각화하는 능력이 있는 탐정이 친구이지만 그가 하는 일이 많지는 않다. '교고쿠도 시리즈'는 추젠지의 추리와 그의 입을 빌린 교고쿠의 요설들로 페이지를 채워간다.
"원래 이 세상에는 있어야 할 것만 존재하고, 일어나야 할 일만 일어나는 거야. 우리들이 알고 있는 아주 작은 상식이니 경험이니 하는 것의 범주에서 우주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상식에 벗어난 일이나 경험한 적이 없는 사건을 만나면 모두 입을 모아 저것 참 이상하다는 둥, 그것 참 기이하다는 둥 하면서 법석을 떨게 되는 것이지. 자신들의 내력도 성립 과정도 생각한 적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나?" 그러니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당연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당연한 걸세. 되어야 하는 대로 되고 있을 뿐이야. 이 세상에 이상한 일 따윈 아무것도 없어." 그것은 바로 본격 미스터리의 화두이기도 하다. 아무리 이상하고 기괴한 사건일지라도, 아무리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거기에는 뭔가 해답이 있기 마련이다. 초자연적 존재인 요괴와 과학적 추리를 절대시하는 본격 추리의 연금술이 가능한 이유는 그것이다.
캐릭터의 매력이나 기묘한 사건의 전개 등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도 탁월하지만, 개인적으로 교고쿠 나츠히코의 작품에 끌리는 이유는 '요괴'에 있다. 소설 속의 사람들은 요괴를 보건, 요괴 때문에건 어디론가 빨려들어가 미망에 사로잡힌다. 요괴란 대체 무엇일까. 교고쿠 나츠히코는 초자연적인 무엇을 전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거기에 현혹되는 어리석음을 경계한다. '망량은 사람에게 들러붙는 게 아니네. 그러니 떨어뜨릴 수 없어. 현혹되는 것은 사람 쪽이지. 망량은 경계적인 존재이고, 따라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네. 그리고 섣불리 손을 대면 현혹당하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경계를 기웃거리게 되지만 정말로 현혹되면 오니가 되어버린다. 교고쿠 나츠히코는 그 경계에서 서성거리는, 혹은 넘어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교고쿠 나츠히코는 '괴'라는 잡지의 책임편집을 맡는 등 '요괴전문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즉 교코쿠의 관심은 '요괴'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나오키상 수상작은 더욱 더 요괴 자체에 접근한 소설 <후 항간에 떠도는 기묘한 이야기>다. 요괴는 인간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인간이 아닌 그 무엇, 인간 사회에서 내동댕이쳐진 누군가다. 나 역시 그들에게 이끌린다. 그들은 왜 자신의 내부에 있는, 혹은 세계의 근원에 있는 심연을 들여다보고 만 것일까. 교고쿠 나츠히코는 지독한 요설로 인간과 세계 그리고 요괴의 이야기를 질기게 늘어놓는다. 실용적인 지식은 아니지만, 항간에 떠다니는 잡설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맨얼굴을 보게 해준다. 요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인간의 벌거벗은, 아니 세계의 추한 모습 그 자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