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타이거 - 독기 넘치는 미소녀 액션 폭력!
오랜만에 독기가 넘치는 작품을 발견했습니다. 인물도, 설정도, 묘사도, 다 그냥 막 나가고 있는데 그게 아주 재밌어요. 장르적 재미로 꽉 차 있습니다. 저는 이런 만화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림도 눈이 즐겁다 싶을 정도로 훌륭해서, 장르의 틀 안에서 부족한 게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이 작품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이전에, 한 가지 주의할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고 싶어요. 사실 레진코믹스만 해당되는 건 아니고, 한국 창작물의 심의라는 건 개인적으로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아요. 19금 타이틀을 떡하니 붙이고 있는데 도대체 왜 19금인지 알 수가 없는 경우가 많죠. 반면에 ‘SM타이거’는 19금 등급을 먹을 만합니다.
19금적인 작품이라 꼭 19세 이상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꽤 잔인한 건 분명 사실이에요. 물론 잔인함에 초점을 맞춘 작품은 아니니까, 묘사가 역겨울 정도로 적나라하지는 않지만, 딱히 일부러 외면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쪽에 약한 분들은 조심할 필요가 있겠어요. 특히 작품 초반에 나오는 문제의 여동생 씬은 본격적인 고어가 아닌 이상 무감각한 편인 저로서도 다소 거북했습니다.
수위 문제만 넘어가면, 이제 풍부한 장르적 재미가 독자들을 반깁니다. 프롤로그를 보면 오해할 수도 있어요. 예쁘장한 고양이상의, 나이스 바디까지 갖춘 미모의 여고생이 일진들을 때려눕히고 있거든요. 큰 틀에서 보면 그런 이야기는 맞는데, 스케일이 훨씬 큽니다.
이야기는 주인공 상미가 - 프롤로그에 나온 고양이상의 여자애 맞습니다 - 끔찍한 재난으로 마지막 남은 가족, 여동생까지 잃으면서 시작됩니다. 통상적인 의미의 재난과는 종류가 차이 나지만, 그 주범을 생각하면 이건 일반인 입장에서는 태풍이나 지진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사실 상미도 태생을 보면 일반인과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좀 곤란하지요. 순수한 여고생이 생전 처음 무술을 배워 여동생의 복수에 성공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잖아요. 개연성도 없을 것 같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숨겨진 과거가 있지만, 트라우마 때문에 폭력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는 쪽이 훨씬 낫죠.
하여튼 귀여운 여동생은 죽습니다. 아주 처참한 방식으로요. 사실 저는 여동생이 조금 더 오래 버티거나, 아니면 작품이 끝날 때까지 주인공의 버팀목으로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5화도 안 되어 죽어버려서 꽤 놀랐습니다. 그리고 상미를 죽인 악당, 아마도 이 만화의 최종보스인데, 태윤이란 친구는 최종보스의 법칙에 충실합니다. 상미에게 어떤 흥미를 느끼고, 죽이지도 않고 그냥 가버리거든요. 직접적으로 시비가 붙은 건 여동생 쪽이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합리적이긴 합니다.
그 결과 상미는 각성합니다. 앞서 언급했듯 상미도 평범한 학생은 아니에요. 일진한테 뺨을 맞으며 수치를 당할 때만 해도, 어떤 내적인 제약이 있었을 뿐 그 움직임이 훤히 보인다고 했을 정도니까요. 이제 상미는 복수를 위해 여동생을 죽인 태윤을 찾아 나섭니다. 유일한 단서는 태윤의 몸에 새겨져 있단 ‘극락’이란 단어인데, 학교 일진을 족친 결과 극락이란 인천 바닥에서 싸움을 열라 잘하는 일진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호칭이고, 더 나아가 미래의 조직폭력배 꿈나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전형적인 학원 폭력물 설정처럼 느껴지실 텐데, 스케일이 그것보다 훨씬 커요. 평범한 일진들이 아닙니다. 이 일진 클럽 위에 진짜 어른들이 활동하는 폭력배들이 있고, 또 그 뒤를 봐주는 재벌그룹이 있다는 그럴듯한 구실이 있긴 한데, 이건 그냥 요식적인 설정에 불과합니다. 극락 어쩌고 하는 이 일진 친구들은, 상당수 구성원의 얼굴이 무서운 노안인 만큼 청소년 깡패의 차원을 아득히 뛰어넘거든요. 굳이 비유하자면 멕시코의 마약 갱단에 무공 고수들이 끼어있는 정도? 최소한 인천에서만큼은 이들은 공권력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행동하지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다는 테마파크에 수십, 수백 명의 고등학생들이 떼로 몰려 사방을 헤집고 다니며 패싸움을 벌이고, 나중에는 그 보스(?)들끼리 호랑이 우리 위로 올라가서 피 튀기는 혈전을 벌여도, 인천에서 이것은 ‘자연재해’와 같기 때문에 경찰이 일절 개입하지 않습니다. 한편 극락(중간보스) 중 하나는 주인공 상미를 공격하는 김에 부하들을 잔뜩 끌고와서 겸사겸사 상미네 학교까지 때려 부숴요.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폭탄으로 교문을 날려버리고 망치와 몽둥이로 학교 건물을 마구 파손합니다.
우두머리는 전기톱을 들고 설치고요. 흡사 전쟁을 방불케 하죠. 물론 인천에서는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인천이 이렇게 무서운 곳이었다니!) 상미와 극락들이 싸우다 보면 팔이 날아가고 목이 잘리고 폭탄이 터지고, 이런 건 얘깃거리도 안 되는 편이죠.
이야기의 구조는 아주 단순합니다. 소위 ‘도장깨기’라고 하죠. 설정이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극락이라는 엄선된 고수들 위에 또 ‘극락왕’이라는, 최고의 고수가 있는데다, 이 깡패 친구들은 다 같이 몰려와서 상미를 때려잡는 대신에 약한 순서로(?) 극락을 하나씩 해치워서 마침내 극락왕에게 도달하라며 그녀를 자극합니다. 물론 상미는 마다하지 않고 강자들을 하나씩 쳐부수며 복수를 향해 성큼성큼 전진합니다.
너무 전형적인 설정이 아니냐고요? 그게 바로 이 작품의 매력이에요. 앞서 언급했듯 장르적 재미로 꽉 차 있는 작품이거든요. 복수의 주인공이 끝내주게 예쁜 여고생이라는 것만 봐도 그렇잖아요. 스타일리시한 전투 묘사, 명도가 옅은 채색은 독특한 분위기를 뽐내고, 장르 법칙에 충실한 악당들은 - 최종보스 태윤은 말할 것도 없고, 초반에 박살난 악당들이 상미의 조언자가 된다든지- 뛰어난 그림체와 함께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있어 포스를 풍깁니다.
상미의 성장과 함께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박살내는 쾌감 또한 강력하지요. 분명 전형적이지만 이렇게 재밌는 작품은 ‘전형적’인 게 아니라 ‘모범적’이라고 불러야 될 거예요.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한 번 시작하면 순식간에 완결을 보거나, 코인 부족을 안타까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