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의 역사» - 찌질함:욕망과 현실의 괴리
«찌질의 역사» - 찌질함:욕망과 현실의 괴리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언급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한 개인의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사람은 누구나 ‘했던 대로’ 행동하며 ‘살던 대로’ 살게 된다. 그 와중에 반성하기도 하고 조심하기도 하지만, 다른 시간에서 다른 상황이 오면 또 같은 방식으로 선택하고 만다. 이처럼 개인의 역사도 반복된다고 할 때, ‘찌질의 역사’라는 제목은 우리의, 특히 남자들의 ‘찌질한’ 모습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다.
그런데 이런 ‘찌질함’은 어디에서 오고 왜 반복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욕망과 현실의 괴리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욕망은 각자 다르지만 동시에 사회적이기도 하다. 잘생겨지고 싶다든지, 키가 크고 싶다든지, 더 좋은 능력을 갖추고 싶다든지, 예쁜 여자와 연애를 하고 싶다든지 하는 욕망은 타인을, 나아가 사회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즉 평범한 사람들보다 나은 어떤 특성이 사회적으로 선망되기 때문에 그 특성이 사회 구성원에 의해 욕망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 다 알고 있듯 현실은 나에게 좌절을 주기 일쑤다. 나의 현실은 어설프고 미숙하며 일천하다. 나의 특성은 남들보다 우월하지 않고, 나라는 존재는 사회적으로 선망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나의 욕망을 달성할 수가 없고, 따라서 그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욕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바로 이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우리는 찌질해진다. 나의 현실과 인간관계에서 나의 욕망을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실현할 수 없는 욕망으로 우리는 찌질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욕망은 언제나 현실과 괴리되기 때문에, 나아가 현실과 괴리되지 않는 욕망은 존재하지 않기에 이 찌질함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다.

▲ 멋진 남자도, 솔직한 아이도 되지 못하는 우리는 그저 ‘찌질해질’ 뿐이다.
그것은 더 나이를 먹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선택이 조금 더 복잡해지고, 조금 더 많은 것을 알았고, 조금 더 지켜야 할 것이 많을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고, 그 때마다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민기는 이제 가을이 자신의 곁을 6년간 지켜준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 무엇이 최선의 행동인지도 알고, 무엇을 지켜야 하며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도 안다. 그러나 모를 때는 모르기 때문에, 알 때는 알기 때문에 욕망과 현실의 괴리가 생긴다. 그래서 민기는 보미와 모호한 관계를 유지하다 결국 이별을 택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행동의 책임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 ‘다시 돌아가는 것’과 ‘한 번도 떠나지 않았음’은 엄연히 다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책임이다. 나의 행동과 그로 인해 벌어진 결과에 책임지는 것. 내가 비겁했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찌질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정말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이들이 부족하고 미숙하며 일천하기 때문에, 그리고 따라서 누구나 찌질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의 찌질함을 외면하는가, 아니면 그것이 나의 모습임을 인정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각오와 반성을 다지는가이다. 설령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더라도 말이다. 나의 미숙함을 그대로 인정하는 용기가 있다면, 적어도 그것이 찌질해 보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실수하더라도 책임지고자 한다면, 적어도 찌질하지는 않다.
이 만화는, 내가 찌질했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찌질할 것임을 말하는 만화다. 그리고 그 찌질함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를 말하는 만화다. 이제 영국으로 떠나는 민기는, 이제 자신이 그다지 성장하지 않았음을 안다. 민기는 이제 책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까? 다음번만큼은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