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연재시작일: 2014.04.10
1. 작품 소개<br/><br/>유쾌, 상쾌, 통쾌! 아웅다웅 친구에서 알콩달콩 연인으로! <br/>학원 로맨스의 정수, 이상원 작가의 ‘백로와 까마귀’!<br/><br/><br/>성적이면 성적 모두 완벽한 완벽한 남자 백성하의 유일한 결점, 바로 지랄 같은 성격 되시겠다! 성하의 그 성격 고스란히 받아내는 비련의 여주인공 금사랑.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잖아. 백로, 제발 저리 가라고!<br/><br/><br/>좋아한다, 결혼한다. <br/>내 입으로 그런 말 하는 게 쪽팔리고, 낯간지러웠지만 그딴 허깨비 같은 고백이 까마귀의 마음을 얻는 지름길이라면 ‘딱 한 번’은 해줄 터였다. <br/>“너, 그냥 나랑 살래?”<br/>검은 눈동자를 중심으로 물기가 어린다. <br/>몇 번이나 말을 하려고 했지만 숨이 막힌 듯 번번이 입술만 뻐끔거리던 애가 간신히 고개를 끄떡인다. <br/>나는 까마귀 이마에 내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가 떼며 속삭였다.<br/>“나랑……. 결혼하자는 거야. 알아?”<br/><br/><br/>2. 작가 소개<br/><br/>이상원<br/><br/>2000년 ‘에덴의 초상’으로 데뷔.<br/>백로와 까마귀’, ‘런’, ‘비밀의 아내’, ‘전부 사랑이야’,<br/>극악순정’, ‘사랑은 폭풍처럼’ 등<br/>다양한 사랑 이야기를 선보였으며,<br/>현재 ‘단미그린비(http://www.kromans.com)’에서<br/>활동하고 있다.<br/><br/><br/>3. 미리 보기<br/><br/>부엌으로 들어가는데 뭔가를 바리바리 싸던 엄마가 나를 보더니 활짝 웃는다. <br/>“성하, 연초엔 온다고 했지?”<br/>“왜?<br/>나는 공포에 가까운 눈으로 보따리를 쳐다보았다. <br/>“왜긴! 혼자 자취하는데 제대로 챙겨 먹겠어? 전 부친 거랑 시골서 올라온 곶감 좀 쌌으니 갖다 주고 와.”<br/>당연했지만 엄마는 아직 나와 백사가 끝났다는 걸 모른다. 전화가 안 왔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백사가 부모님이 계신 미국으로 갔다는 내 거짓말을 믿은 탓이다. <br/>여전히 엄마에게 진실을 털어놓을 용기가 없었던 나는 퉁명스럽게 입을 뗐다. <br/>“걘 이런 거 안 먹어.”<br/>“먹든 안 먹든 갖다 주고 와! 지난번 추석 때 과일이랑 술을 한 보따리 보냈는데 그냥 넘어가면 안 돼.” <br/>완강한 대거리에 나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주 비관적인 방향으로 작동하는 뇌구조는 괜히 개겼다가 나중에 덤탱이 쓰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br/>만약 내가 싫다고 하면 엄마는 직접 백사의 오피스텔로 찾아가겠지. 그럼 나와 백사가 찢어진 걸 알게 될 테고 내 남은 겨울방학은 그야말로 지옥이 될 것이다. <br/>엄마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컨디션 문제였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니지만 할 건 해야 된다는 아빠의 등쌀에 엄마는 요 며칠 힘든 나날을 보냈다. 전을 부치는 것부터 시작해 식혜 만들랴, 방앗간에 가서 떡 뽑아 오랴 내가 봐도 몸이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br/>“알았으니까 그만해.”<br/>따가운 시선을 뒤로하며 나는 도망치듯 2층으로 올라갔다.<br/><br/>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고, 나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분명 백사가 보기 싫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니 말이다. <br/>우울한 눈으로 보따리를 내려다보았다. 라면 박스 크기도 안 되는 보따리였지만 지금은 그 어떤 보물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게 없었으면 백사가 자취를 하고 있는 오피스텔로 갈 용기는 내지 못했을 테지. 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라고. 왜 왔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보따리가 있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엄마가 시켜 할 수 없이 온 거라면 믿지 않을 수 없으리라. <br/>나는 무겁게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살면서 한 번쯤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스스로를 질책했다. <br/>무슨 말이냐고? 왜 이렇게 찝찝한지는, 그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br/>백사와 얼굴 맞대고 투닥거린 지 햇수로 6년. 아니, 해가 바뀌었으니 벌써 7년이지. 자의든 타의든 녀석과의 연결고리는 짧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끝났어!’라는 말도 없이 쫑이 나다니…….<br/>‘너 나랑 친해?’라고 백사가 물으면 나는 물론 고개를 저을 것이다.<br/>‘나랑 같이 다니는 동안 미운 정이라도 들었냐?’라고 물어도 역시 강력하게 부정할 것이다. 하지만 끝났는데 끝났다는 말도 없이 끝내는 것은 역시 아닌 것 같았다. 실감도 안 났고 그러다 보니 자꾸만 잡생각이 났다.<br/>‘끝난 거 맞나? 그럼 이게 끝난 게 아니고 뭐가 끝난 거겠어? 근데 내 착각이면? 마음을 푹 놓게 했다가 갑자기 끝난 거 아니라고 하면?’<br/>온갖 의심이 난무하며 신경발작 직전까지 사람을 몰아붙이는 것이다. <br/>그래, 차라리 잘됐어. <br/>집을 나올 때와 달리 어느덧 28번 버스에 오르는 내 걸음에는 힘이 실렸다.<br/>오늘 백사 얼굴을 보고 ‘우린 끝났어.’라는 말을 들으면 이 께름칙함은 깨끗이 사라질 것이다. 나는 신호등마다 걸려 멈춰 서는 버스에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어서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br/>하지만 막상 백사 집 앞에 서자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마음이라니! <br/>벨을 누르기 위해 몇 번이나 손을 재촉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멍청하게 초인종만 쳐다보기를 몇 분. 짐을 갖고 승강기 앞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또 몇 분. <br/>용기를 짜내 초인종을 누르기까지 몇십 년은 걸린 것 같다. <br/>딩동, 딩동.<br/>초조하게 입술을 자근자근 씹는데 안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기척이 들렸다. <br/>벌컥, 문이 열렸다. <br/>고개를 숙인 나는 연습한 말을 기계적으로 읊으며 보따리를 내밀었다.<br/>“이거 우리 엄마가 갖다 주래…….”<br/>한데 이게 웬일?<br/>반쯤 열린 문 사이로 조곤조곤 얘기하는 사람은 성하가 아니었다. <br/>“사랑이구나. 근데 어쩌지? 성하 지금 많이 아픈데.”<br/>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더 예뻐진 이수아가 난처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br/>목에 닭뼈가 걸린 것처럼 숨이 콱 막혔다. <br/>가슴은 이쯤에서 얼른 가라고 말하는데 입 안에서는 다른 말들이 아우성을 쳤다. <br/>아파요? 어디가? 아니, 그보다 왜 언니가 여?어요? 정말 백사랑 사귀어요? 백사가 진짜 사귀재요? 백사야, 너 진짜 이 언니랑 사귀니?<br/>그러나 끝내 한마디도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br/>“성하 지금 약 먹고 자는데. 깨려면 시간 좀 걸릴 거야.”<br/>미안하다는 듯 선수 치는 이수아 앞에서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빙 돌려서 말했지만 핵심은 이만 돌아가달라는 것이다. <br/>그럼에도 나는 구질구질하게 묻고 있었다. <br/>“아파요?”<br/>아팠기 때문에 나한테 전화를 못 했다는 쪽으로 머리가 재빨리 회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했던 기대는 단어 하나에 무참히 깨졌다. <br/>“독감. 스키장에서 무리하더니 결국 걸렸어.”<br/>스키장! 물론 백사가 거길 혼자 갔다고 생각할 수 없다. 분명 눈앞의 이 언니와 같이 갔겠지. 내가 전화통 앞을 서성거리고 있을 때 녀석은 이 언니와 스키장에서 논 것이고, 이것보다 둘이 사귀고 있다는 걸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둘이 사귀니까 한쪽이 아프자 다른 한쪽이 와서 돌봐주는 관계로까지 발전했지. <br/>“그거 뭐야?”<br/>이수아의 시선이 머문 곳은 보따리였다. 일부러 과장되게 웃은 나는 재빨리 여자에게 짐을 안겼다. <br/>“전하고 곶감인데 엄마가 싸주셨어요.”<br/>“어머니가?”<br/>이수아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나는 얼른 변명처럼 둘러댔다. <br/>“성하가 지난번 추석 때 뭘 좀 보냈거든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이건 그냥 답례예요.”<br/>“알았어. 성하 깨면 전해줄게. 어머니께는 잘 먹겠다고 말씀드려.”<br/>“그럼 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br/>나는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혔다.<br/>“그래, 사랑이 너두. 담에 기회 되면 아귀찜 먹으러 가자.”<br/>어설프게 고개를 끄떡이는데 문이 닫혔다.<br/>나는 기계적으로 걸음을 뗐다. 언제 어떻게 승강기에 탔는지 인식할 수 없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3층을 지나고 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젠장, 아쉬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br/>이제야말로 만세삼창을 부르며 해방을 축하해야 하는데 꼴사납게도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손으로 감싼 채 끅끅거리고 있었다. 이제 곧 승강기의 문이 열릴 거라는 사실도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없었다. <br/>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머릿속이 온통 백사로 가득했다. <br/>그뿐인가? 심장 부위를 손으로 누르자 어찌나 무시무시한 격통이 이는지 숨을 쉴 수 없었다. 다시는 백사를 못 볼 거라고 상상하니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식은땀까지 흐른다. <br/>어떡하지? 나 이제 어떡해?<br/>어쩔 줄 몰라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데 의아한 음성이 들렸다. <br/>“너 사랑이 아냐?” <br/>퉁퉁 부은 얼굴을 들었다. <br/>놀랍게도 나를 내려다보는 것은 성하와 꼭 닮은 얼굴이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다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깨닫고는 저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br/>백성훈. 성하의 형!<br/>비웃음이 들린다. <br/>바보같이, 뭘 기대했어? 걔가 널 ?아 내려오기라도 할 줄 알았어? <br/>강한 손이 어깨를 움켜쥔다. <br/>“왜 울어? 성하가 또 괴롭혔어? 에잇, 한동안 잠잠한가 싶더니 또 발작했나 보네. 야, 맘고생 그만하고 이참에 그냥 끝내! 그 새낀 한번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 안 그럼 절대 그 성질 못 고친다.”<br/>성훈이 성질을 냈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동생 험담을 하는 것으로 내 기분을 풀어주려는 의도 같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라고! 성하 욕 같은 것은 듣고 싶지 않다. <br/>나는 어눌하지만 진심으로 말했다. <br/>“성하 욕하지 말아요. 걘…….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br/>“사랑아?”<br/>걱정스러운 목소리에 꾹꾹 눌렀던 뭔가가 펑 하고 터졌다. <br/>커다란 품에 쓰러지듯 안긴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렸다.<br/>“흐윽, 오빠 나 어떡해요? 이제 나 어떡해요!”<br/>“어어? 진짜 심각한가 보네? 왜? 뭣 때문에 싸웠는데?” <br/>성훈이 정면으로 눈을 맞췄다. <br/>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대성통곡을 했다. 당황한 성훈이 괜찮을 거라며 어깨를 토닥여주었지만 위로가 될 리 없다. 그저 너무 혼란스럽고, 혹시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은 아닌지 그걸 깨닫게 될까 봐 불안했다. <br/>아니, 두 번 다시 성하와 아옹거리며 웃고 우는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이 나를 제일 두렵게 했다. 마치 방향을 잃은 배가 망망대해를 떠도는 기분이랄까. 도무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br/>“안 되겠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br/>성훈이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br/>오피스텔을 나가는 순간까지 나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1. 작품 소개유쾌, 상쾌, 통쾌! 아웅다웅 친구에서 알콩달콩 연인으로! 학원 로맨스의 정수, 이상원 작가의 ‘백로와 까마귀’!성적이면 성적 모두 완벽한 완벽한 남자 백성하의 유일한 결점, 바로 지랄 같은 성격 되시겠다! 성하의 그 성격 고스란히 받아내는 비련의 여주인공 금사랑.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잖아. 백로, 제발 저리 가라고!좋아한다, 결혼한다. 내 입으로 그런 말 하는 게 쪽팔리고, 낯간지러웠지만 그딴 허깨비 같은 고백이 까마귀의 마음을 얻는 지름길이라면 ‘딱 한 번’은 해줄 터였다. “너, 그냥 나랑 살래?”검은 눈동자를 중심으로 물기가 어린다. 몇 번이나 말을 하려고 했지만 숨이 막힌 듯 번번이 입술만 뻐끔거리던 애가 간신히 고개를 끄떡인다. 나는 까마귀 이마에 내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가 떼며 속삭였다.“나랑……. 결혼하자는 거야. 알아?”2. 작가 소개이상원2000년 ‘에덴의 초상’으로 데뷔.백로와 까마귀’, ‘런’, ‘비밀의 아내’, ‘전부 사랑이야’,극악순정’, ‘사랑은 폭풍처럼’ 등다양한 사랑 이야기를 선보였으며,현재 ‘단미그린비(http://www.kromans.com)’에서활동하고 있다.3. 미리 보기부엌으로 들어가는데 뭔가를 바리바리 싸던 엄마가 나를 보더니 활짝 웃는다. “성하, 연초엔 온다고 했지?”“왜?나는 공포에 가까운 눈으로 보따리를 쳐다보았다. “왜긴! 혼자 자취하는데 제대로 챙겨 먹겠어? 전 부친 거랑 시골서 올라온 곶감 좀 쌌으니 갖다 주고 와.”당연했지만 엄마는 아직 나와 백사가 끝났다는 걸 모른다. 전화가 안 왔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백사가 부모님이 계신 미국으로 갔다는 내 거짓말을 믿은 탓이다. 여전히 엄마에게 진실을 털어놓을 용기가 없었던 나는 퉁명스럽게 입을 뗐다. “걘 이런 거 안 먹어.”“먹든 안 먹든 갖다 주고 와! 지난번 추석 때 과일이랑 술을 한 보따리 보냈는데 그냥 넘어가면 안 돼.” 완강한 대거리에 나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주 비관적인 방향으로 작동하는 뇌구조는 괜히 개겼다가 나중에 덤탱이 쓰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만약 내가 싫다고 하면 엄마는 직접 백사의 오피스텔로 찾아가겠지. 그럼 나와 백사가 찢어진 걸 알게 될 테고 내 남은 겨울방학은 그야말로 지옥이 될 것이다. 엄마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컨디션 문제였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니지만 할 건 해야 된다는 아빠의 등쌀에 엄마는 요 며칠 힘든 나날을 보냈다. 전을 부치는 것부터 시작해 식혜 만들랴, 방앗간에 가서 떡 뽑아 오랴 내가 봐도 몸이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알았으니까 그만해.”따가운 시선을 뒤로하며 나는 도망치듯 2층으로 올라갔다.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고, 나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분명 백사가 보기 싫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니 말이다. 우울한 눈으로 보따리를 내려다보았다. 라면 박스 크기도 안 되는 보따리였지만 지금은 그 어떤 보물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게 없었으면 백사가 자취를 하고 있는 오피스텔로 갈 용기는 내지 못했을 테지. 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라고. 왜 왔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보따리가 있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엄마가 시켜 할 수 없이 온 거라면 믿지 않을 수 없으리라. 나는 무겁게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살면서 한 번쯤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스스로를 질책했다. 무슨 말이냐고? 왜 이렇게 찝찝한지는, 그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백사와 얼굴 맞대고 투닥거린 지 햇수로 6년. 아니, 해가 바뀌었으니 벌써 7년이지. 자의든 타의든 녀석과의 연결고리는 짧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끝났어!’라는 말도 없이 쫑이 나다니…….‘너 나랑 친해?’라고 백사가 물으면 나는 물론 고개를 저을 것이다.‘나랑 같이 다니는 동안 미운 정이라도 들었냐?’라고 물어도 역시 강력하게 부정할 것이다. 하지만 끝났는데 끝났다는 말도 없이 끝내는 것은 역시 아닌 것 같았다. 실감도 안 났고 그러다 보니 자꾸만 잡생각이 났다.‘끝난 거 맞나? 그럼 이게 끝난 게 아니고 뭐가 끝난 거겠어? 근데 내 착각이면? 마음을 푹 놓게 했다가 갑자기 끝난 거 아니라고 하면?’온갖 의심이 난무하며 신경발작 직전까지 사람을 몰아붙이는 것이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집을 나올 때와 달리 어느덧 28번 버스에 오르는 내 걸음에는 힘이 실렸다.오늘 백사 얼굴을 보고 ‘우린 끝났어.’라는 말을 들으면 이 께름칙함은 깨끗이 사라질 것이다. 나는 신호등마다 걸려 멈춰 서는 버스에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어서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막상 백사 집 앞에 서자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마음이라니! 벨을 누르기 위해 몇 번이나 손을 재촉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멍청하게 초인종만 쳐다보기를 몇 분. 짐을 갖고 승강기 앞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또 몇 분. 용기를 짜내 초인종을 누르기까지 몇십 년은 걸린 것 같다. 딩동, 딩동.초조하게 입술을 자근자근 씹는데 안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기척이 들렸다. 벌컥, 문이 열렸다. 고개를 숙인 나는 연습한 말을 기계적으로 읊으며 보따리를 내밀었다.“이거 우리 엄마가 갖다 주래…….”한데 이게 웬일?반쯤 열린 문 사이로 조곤조곤 얘기하는 사람은 성하가 아니었다. “사랑이구나. 근데 어쩌지? 성하 지금 많이 아픈데.”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더 예뻐진 이수아가 난처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목에 닭뼈가 걸린 것처럼 숨이 콱 막혔다. 가슴은 이쯤에서 얼른 가라고 말하는데 입 안에서는 다른 말들이 아우성을 쳤다. 아파요? 어디가? 아니, 그보다 왜 언니가 여?어요? 정말 백사랑 사귀어요? 백사가 진짜 사귀재요? 백사야, 너 진짜 이 언니랑 사귀니?그러나 끝내 한마디도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성하 지금 약 먹고 자는데. 깨려면 시간 좀 걸릴 거야.”미안하다는 듯 선수 치는 이수아 앞에서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빙 돌려서 말했지만 핵심은 이만 돌아가달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구질구질하게 묻고 있었다. “아파요?”아팠기 때문에 나한테 전화를 못 했다는 쪽으로 머리가 재빨리 회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했던 기대는 단어 하나에 무참히 깨졌다. “독감. 스키장에서 무리하더니 결국 걸렸어.”스키장! 물론 백사가 거길 혼자 갔다고 생각할 수 없다. 분명 눈앞의 이 언니와 같이 갔겠지. 내가 전화통 앞을 서성거리고 있을 때 녀석은 이 언니와 스키장에서 논 것이고, 이것보다 둘이 사귀고 있다는 걸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둘이 사귀니까 한쪽이 아프자 다른 한쪽이 와서 돌봐주는 관계로까지 발전했지. “그거 뭐야?”이수아의 시선이 머문 곳은 보따리였다. 일부러 과장되게 웃은 나는 재빨리 여자에게 짐을 안겼다. “전하고 곶감인데 엄마가 싸주셨어요.”“어머니가?”이수아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나는 얼른 변명처럼 둘러댔다. “성하가 지난번 추석 때 뭘 좀 보냈거든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이건 그냥 답례예요.”“알았어. 성하 깨면 전해줄게. 어머니께는 잘 먹겠다고 말씀드려.”“그럼 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나는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혔다.“그래, 사랑이 너두. 담에 기회 되면 아귀찜 먹으러 가자.”어설프게 고개를 끄떡이는데 문이 닫혔다.나는 기계적으로 걸음을 뗐다. 언제 어떻게 승강기에 탔는지 인식할 수 없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3층을 지나고 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젠장, 아쉬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이제야말로 만세삼창을 부르며 해방을 축하해야 하는데 꼴사납게도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손으로 감싼 채 끅끅거리고 있었다. 이제 곧 승강기의 문이 열릴 거라는 사실도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머릿속이 온통 백사로 가득했다. 그뿐인가? 심장 부위를 손으로 누르자 어찌나 무시무시한 격통이 이는지 숨을 쉴 수 없었다. 다시는 백사를 못 볼 거라고 상상하니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식은땀까지 흐른다. 어떡하지? 나 이제 어떡해?어쩔 줄 몰라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데 의아한 음성이 들렸다. “너 사랑이 아냐?” 퉁퉁 부은 얼굴을 들었다. 놀랍게도 나를 내려다보는 것은 성하와 꼭 닮은 얼굴이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다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깨닫고는 저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백성훈. 성하의 형!비웃음이 들린다. 바보같이, 뭘 기대했어? 걔가 널 ?아 내려오기라도 할 줄 알았어? 강한 손이 어깨를 움켜쥔다. “왜 울어? 성하가 또 괴롭혔어? 에잇, 한동안 잠잠한가 싶더니 또 발작했나 보네. 야, 맘고생 그만하고 이참에 그냥 끝내! 그 새낀 한번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 안 그럼 절대 그 성질 못 고친다.”성훈이 성질을 냈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동생 험담을 하는 것으로 내 기분을 풀어주려는 의도 같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라고! 성하 욕 같은 것은 듣고 싶지 않다. 나는 어눌하지만 진심으로 말했다. “성하 욕하지 말아요. 걘…….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사랑아?”걱정스러운 목소리에 꾹꾹 눌렀던 뭔가가 펑 하고 터졌다. 커다란 품에 쓰러지듯 안긴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렸다.“흐윽, 오빠 나 어떡해요? 이제 나 어떡해요!”“어어? 진짜 심각한가 보네? 왜? 뭣 때문에 싸웠는데?” 성훈이 정면으로 눈을 맞췄다.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대성통곡을 했다. 당황한 성훈이 괜찮을 거라며 어깨를 토닥여주었지만 위로가 될 리 없다. 그저 너무 혼란스럽고, 혹시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은 아닌지 그걸 깨닫게 될까 봐 불안했다. 아니, 두 번 다시 성하와 아옹거리며 웃고 우는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이 나를 제일 두렵게 했다. 마치 방향을 잃은 배가 망망대해를 떠도는 기분이랄까. 도무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안 되겠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성훈이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오피스텔을 나가는 순간까지 나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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