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지만 익숙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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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만 익숙한 2
YES 24
작품소개
연재시작일: 2016.06.15
1. 작품 소개<br/><br/>“나는 널 사랑했고 너도 날 사랑했는데,<br/>우리는 지금 왜 이런 곳에 있는 거니.”<br/><br/><br/>7년 전 뜨겁게 사랑했던 가비와 을녕. 하지만 이제 그는 가비에게 잊혀진 과거가 되고 말았다. 서울에 돌아와야 했던 이유였던 그녀를 놓칠 수 없었기에 을녕은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는데…….<br/><br/><br/>중요한 건 사랑하는 지금이다.<br/>오늘도 나는,<br/>우리는,<br/>태양에서 세 번째 돌 위에서 사랑을 한다.<br/><br/><br/>2. 작가 소개<br/><br/>심윤서<br/><br/>프란체스카.<br/>염소자리.<br/>토성의 영향을 받는 사람.<br/>아마추어 정원사<br/>반려견 ‘쎄비’와 ‘설이’와 함께 어설픈 시골살이 중.<br/><br/>▣ 출간작<br/><br/>로스트<br/>메리크리스마스<br/>당신은 가벼운 남자<br/>사랑 그 이름만으로<br/>우애수<br/>허니비 모놀로그<br/>난다의 일기<br/>러브 고 라운드<br/>낯설지만 익숙한<br/><br/><br/>3. 미리 보기<br/><br/>“어쩐 일이세요. 여기까지.”<br/>주문한 에스프레소를 들고 을녕이 다가가자 모친의 미간에 습자지가 구겨지듯 얇은 주름이 잡혔다.<br/>“밥은 먹고 다니는 거니?”<br/>“그게 궁금해서는 아니실 테고요.”<br/>에스프레소 잔을 내려놓고 을녕이 자리에 앉았다.<br/>“뭐, 자기 관리는 자기가 하는 거니까. 자기 몸 하나 관리 못 하는 사람이 경영을 한다는 건 자격 미달이지. 그래서…… 고군분투하고 있다고?”<br/>“어머니의 의붓아들 덕분에요. 아들 교육은 장난 아니게 시키셨습니다?”<br/>모친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br/>모친의 미소를 바라보며 씁쓸한 커피를 삼켰다. 어릴 시절 본구와 싸울 때마다 모친은 언제나 본구 편이었다. 모친은 몰래 위로해주는 법도 없었다. 절벽 위에서 새끼를 몰아대는 암사자처럼 냉정했다. 본구가 계단에서 밀쳐 다리가 부러진 그날이었는지 모르겠다. 모친이 자신이 아니라 의붓 형에게 달려간 순간,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단절감을 느꼈다.<br/>“농담할 기운이 남은 걸 보니 아직까지는 괜찮은가 보구나.”<br/>“뭐, 그럭저럭요.”<br/>“만족하는 거니?”<br/>“……?”<br/>에스프레소 잔을 내려놓던 을녕의 손이 멈칫했다. 부드러운 모친의 목소리 안쪽에서 서늘한 울림을 느꼈다.<br/>“난, 아직 배가 고픈데. 뭘 좀 먹으러 갈까?”<br/>“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br/>을녕의 질문에 모친은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창 밖을 내다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br/>“노인네가 시시하게 알츠하이머라는구나.”<br/>“……!”<br/>천 년은 거뜬하게 살 것처럼 당당하던 늙은 여우도 결국 이렇게 무너지는 건가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고작 백 년도 못 살 거면서, 그것도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내지도 못할 거면서 왜 그렇게까지 표독스럽게 굴었을까.<br/>“신나지가 않아. 재미없게 돼버렸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상대로 무얼 하겠니. 내게 저질렀던 일들도 결국에는 모두 잊어버리겠지.”<br/>“…….”<br/>절대 무너질 거 같지 않았던 대상이 어이없게 무너져 내려서 모친은 허무하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 한들 을녕에겐 관심 밖의 일이다.<br/>“관심 없습니다.”<br/>“관심 가지는 게 좋을 거야. 곧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테니까.”<br/>“재미있는 일이라뇨?”<br/>“오늘 노인네가 당신이 가지고 있던 전환 사채를 서을녕 앞으로 모두 증여하는 데 사인을 했거든.”<br/>“무슨 뜻입니까?”<br/>모친의 말에 갑작스러운 편두통이 일었다.<br/>“주식으로 전환하면 네가 GL화학의 대주주가 되는 거고, 팔면 엄청난 시세 차익을 얻는 거지.”<br/>“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알츠하이머라면서요.”<br/>“변호사의 입회하였고 주치의의 소견서도 있어. 법적으로 완벽한 증여야.”<br/>“구 회장과 그 누이들이 가만히 있을 거 같습니까? 구본구는요?”<br/>을녕의 물음에 모친은 모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br/>“가끔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구 회장, 아니, 그 집안에서 원하는 게 뭔지. 돈이에요? 아니면 며느리로서의 인정입니까? 아니면 회장 사모님으로서 누리고 싶은 특권인가요?” <br/>진심으로 궁금했다. 잔인했던 노인네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건지, 한때 모친을 버렸던 구 회장에게 앙갚음을 하려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아들인 을녕의 입지를 위해 암투를 벌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br/>그렇다기에 모친은 노인네에게 더할 수 없는, 신장까지 갖다 바친 며느리였고, 남편에겐 여전히 헌신적이었고, 을녕에겐 건조했다.<br/>“내가 원하는 건, 뺏긴 걸 되찾는 것뿐이야.”<br/>“그게 뭐든 간에 제발 어머니 인생에서 저는 빼주세요.”<br/>“네가 내 아들인 이상 그럴 순 없지 않겠니? 세상에서 제일 잔인한 건 핏줄이니까. 조만간 노인네가 널 찾을 거야. 준비하고 있어.”<br/>모친은 할 말을 다 끝냈다는 듯 클러치 백을 집어 들었다.<br/>“어머니는 언제까지 절 비참하게 만드실 거예요. 왜 그렇게 역겨운 곳으로 저를 끌고 가려고 하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마음 편히 살게 내버려두세요.”<br/>“난 널 알아…….”<br/>“제가 싫다잖습니까! 제가 필요 없다구요!”<br/>을녕은 어금니를 앙다물고 모친의 말을 잘라냈다.<br/>“과연 그럴까?”<br/>“차라리…… 차라리 절 고아원에 보내고 구 회장에게는 어머니 혼자 가는 편이 더 나았어요.”<br/>모친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걸 지켜보며 을녕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br/>젠장.<br/>악몽 같은 현실은 언제나 되풀이되고 만다.<br/><br/>◇ ◆ ◇<br/><br/>철컹거리며 음산하게 차고 문이 닫히고 시동이 꺼지자 주차장 구석에 숨어 있던 갑이 운전석 쪽으로 한 걸음 나섰다.<br/>“헉, 깜짝이야.”<br/>정말 놀랐는지 운전석에 앉아 있던 을녕이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소리쳤다.<br/>“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br/>“이 시간 아니면 얼굴을 볼 수가 없으니까요.”<br/>운전석으로 다가가 을녕을 내려다보며 팔짱을 꼈다. 요 며칠간 요리조리 갑을 피해 다니는 을녕 때문에 약이 오른 상태였다.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어정쩡한 관계를 더 이상 끌고 싶지 않았다.<br/>“하아. 오늘은 너무 피곤하다. 뭔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하자. 네가 아무리 섹시해도 지금은 받아줄 수가 없어요.”<br/>이 남자가 어디서 수작질인지 모르겠다.<br/>“미안하지만 다음은 없어요.”<br/>을녕의 눈가에 생긴 다크서클 정도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새벽에 들어왔다 새벽에 나가는 을녕을 만나기 위해 연준이 잠든 걸 확인하고 졸음을 참으며 겨우 기다렸다. 올빼미처럼 잠이 없는 연준이지만 오늘은 은하와의 여행으로 피곤한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br/>“그래…… 뭔데?”<br/>차에서 내린 을녕이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어둑한 조명 때문인지 을녕의 뺨에 깊은 그림자가 생겼다. 갑은 그 그림자를 외면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싶었다.<br/>“내용증명서를 보셨으면 아시겠지만…….”<br/>회사에서도 면담 신청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대표님이 너무 바쁘셔서 시간을 낼 수 없다는 비서의 대답뿐이었다. 참다못한 갑은 을녕 앞으로 내용증명서까지 보냈다. 그랬는데도 을녕은 묵묵부답이었다.<br/>“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 합법적으로 계약하고 입주했을 뿐이야. 싫으면 위약금을 내든가. 참고로 난 2년치 임대료를 일시불로 내고 계약서를 썼어.”<br/>“억지 부리지 마요.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br/>“나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법률적으로도 하자가 없어. 억지는 가비, 네가 부리는 거지.”<br/>“서을녕 씨!”<br/>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br/>“나는 잠자리가 필요하고 넌, 돈이 필요하고.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관계 아닌가?”<br/>하, 잠자리? 돈? 관계? <br/>을녕이 선택한 단어들이 갑의 참을성에 금을 내기 시작했다.<br/>“선정적인 단어로 교묘하게 내 이성을 자극하지 마요.”<br/>“뭐가? 잠자리란 단어가?”<br/>“서을녕 씨, 논지는 그게 아니잖아요. 이런 시답잖은 말꼬리 잡기로 당신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어요?”<br/>“동감이야. 시간 낭비는 지금까지도 지나치게 충분하니까.”<br/>을녕의 목소리가 까슬하게 갈라졌다.<br/>“서을녕 씨.”<br/>“가비야, 나는…….”<br/>“쉿! 잠시만요.”<br/>갑이 입술에 검지를 대고 귀를 기울였다. 느린 발소리와 함께 갑의 이름을 부르는 연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머즈보다 청력이 더 좋은 연준이었다.<br/>“계단으로 내려오는 거 같아요.”<br/>갑은 주차장의 조명 스위치를 내리고 을녕의 차 뒤쪽으로 쪼그리고 앉아 몸을 숨겼다.<br/>“뭐해요. 이쪽으로 와요.”<br/>갑이 속삭이며 소리쳤다.<br/>“내가 왜?”<br/>을녕도 입술로만 소리쳤다.<br/>“제발요.”<br/>갑의 간청에 을녕도 갑의 옆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다음 순간 계단실로 연결된 문이 열리고 연준이 나타났다.<br/>“갑아, 연갑.”<br/>연준이 스위치를 켜는 순간 갑은 질끈 눈을 감았다. 갑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제발 이 상황이 무사히 지나간다면 을녕이 이 집에서 200년을 살아도 상관없을 듯싶었다.<br/>제발!<br/>얼마쯤 지났을까,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 눈을 뜨니 연준이 아직 식지 않은 보닛의 온도를 체크하듯 손바닥을 대고 있었다. 위층의 발소리를 들으려는 듯 고개를 들어 잠시 집중하다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고개를 갸웃했다.<br/>“어디 갔지?”<br/>연준은 스위치를 내리고 어슬렁거리며 사라졌다.<br/>후우.<br/>다리가 풀려 갑이 털썩 주저앉았다.<br/>“내가 부끄러워?”<br/>귓가에 을녕의 숨결이 닿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을녕의 가슴에 거의 안겨 있는 자세였다.<br/>“오빠한테 이 시간, 이 상황을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일 뿐이에요.”<br/>너무 가까웠다. 허벅지와 어깨로 전해지는 을녕의 체온과 머릿속을 혼미하게 만드는 을녕의 향기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부자연스러운 호흡을 원망했다.<br/>“오, 오늘은…… 그만하죠.”<br/>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 갑의 손목을 을녕이 낚아채 다시 주저앉혔다.<br/>“그만하자니까요.”<br/>“가비야.”<br/>을녕이 속삭이듯 갑의 이름을 불렀다. 저렇게 ‘가비야’ 하고 부르면 눈을 감게 된다. 손목을 빼내려고 힘을 주던 갑이 을녕의 목소리에 잠시 머뭇거렸다.<br/>“이곳에서 처음으로 편안한 잠을 잤어.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게.”<br/>“…….”<br/>“의붓아버지의 집, 학교 기숙사, 호텔, 낯선 도시에서 잠깐씩 렌트했던 집, 그리고 다시 호텔. 생각해보니 홈리스야, 나는.”<br/>갑은 오래전 을녕이 살았던 오피스텔을 떠올렸다. 을녕은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단 30분이라도 오피스텔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향초를 피우고 음악을 들으며 갑은 리포트를 썼고 을녕은 책을 읽거나 논문 자료를 준비하거나 했다.<br/>“기억나니? 여의도의 오피스텔.”<br/>“…….”<br/>“좋아했던 곳이지만 그곳에서도 편안하게 잠을 자진 못했어.”<br/>을녕이 갑의 손목을 놓고 대신 뒤통수를 감쌌다. <br/>갑은 을녕이 머리를 자신의 가슴 쪽으로 당기는데도 멍하니 함께했던 그 공간을 생각했다. 잿빛 커튼. 빨간색 로고가 예뻤던 머그잔. 가끔 라면을 끓여 먹던 갈색 유리 냄비. <br/>그리고…….<br/>“네가 잠시 다녀가고 나면 그뿐, 더 이상 내게 의미 있는 공간은 아니었어. 네가 있어야 완벽해지는 공간이었어. 그런데, 여긴…… 웃풍도 심하고 낡고 썰렁하고 욕실에서 락스 냄새도 심하게 나는데…… 무엇보다 네 오빠가 여기 있는데…… 당연히 내가 있어야 할 곳처럼 편해. 미친 듯이 잠이 와. 너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다는 생각을 했어.”<br/>갑의 관자놀이에 을녕의 메마른 입술이 스치듯 닿았다. <br/>“그러니까…… 쫓아내지 마. 여기 말고는 갈 데가 없어.”<br/>하아.<br/>깊게 한숨을 내쉬는 갑의 입술을 온전히 감싸며 을녕은 제발, 이라고 속삭였다. 1. 작품 소개“나는 널 사랑했고 너도 날 사랑했는데,우리는 지금 왜 이런 곳에 있는 거니.”7년 전 뜨겁게 사랑했던 가비와 을녕. 하지만 이제 그는 가비에게 잊혀진 과거가 되고 말았다. 서울에 돌아와야 했던 이유였던 그녀를 놓칠 수 없었기에 을녕은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는데…….중요한 건 사랑하는 지금이다.오늘도 나는,우리는,태양에서 세 번째 돌 위에서 사랑을 한다.2. 작가 소개심윤서프란체스카.염소자리.토성의 영향을 받는 사람.아마추어 정원사반려견 ‘쎄비’와 ‘설이’와 함께 어설픈 시골살이 중.▣ 출간작로스트메리크리스마스당신은 가벼운 남자사랑 그 이름만으로우애수허니비 모놀로그난다의 일기러브 고 라운드낯설지만 익숙한3. 미리 보기“어쩐 일이세요. 여기까지.”주문한 에스프레소를 들고 을녕이 다가가자 모친의 미간에 습자지가 구겨지듯 얇은 주름이 잡혔다.“밥은 먹고 다니는 거니?”“그게 궁금해서는 아니실 테고요.”에스프레소 잔을 내려놓고 을녕이 자리에 앉았다.“뭐, 자기 관리는 자기가 하는 거니까. 자기 몸 하나 관리 못 하는 사람이 경영을 한다는 건 자격 미달이지. 그래서…… 고군분투하고 있다고?”“어머니의 의붓아들 덕분에요. 아들 교육은 장난 아니게 시키셨습니다?”모친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모친의 미소를 바라보며 씁쓸한 커피를 삼켰다. 어릴 시절 본구와 싸울 때마다 모친은 언제나 본구 편이었다. 모친은 몰래 위로해주는 법도 없었다. 절벽 위에서 새끼를 몰아대는 암사자처럼 냉정했다. 본구가 계단에서 밀쳐 다리가 부러진 그날이었는지 모르겠다. 모친이 자신이 아니라 의붓 형에게 달려간 순간,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단절감을 느꼈다.“농담할 기운이 남은 걸 보니 아직까지는 괜찮은가 보구나.”“뭐, 그럭저럭요.”“만족하는 거니?”“……?”에스프레소 잔을 내려놓던 을녕의 손이 멈칫했다. 부드러운 모친의 목소리 안쪽에서 서늘한 울림을 느꼈다.“난, 아직 배가 고픈데. 뭘 좀 먹으러 갈까?”“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을녕의 질문에 모친은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창 밖을 내다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노인네가 시시하게 알츠하이머라는구나.”“……!”천 년은 거뜬하게 살 것처럼 당당하던 늙은 여우도 결국 이렇게 무너지는 건가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고작 백 년도 못 살 거면서, 그것도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내지도 못할 거면서 왜 그렇게까지 표독스럽게 굴었을까.“신나지가 않아. 재미없게 돼버렸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상대로 무얼 하겠니. 내게 저질렀던 일들도 결국에는 모두 잊어버리겠지.”“…….”절대 무너질 거 같지 않았던 대상이 어이없게 무너져 내려서 모친은 허무하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 한들 을녕에겐 관심 밖의 일이다.“관심 없습니다.”“관심 가지는 게 좋을 거야. 곧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테니까.”“재미있는 일이라뇨?”“오늘 노인네가 당신이 가지고 있던 전환 사채를 서을녕 앞으로 모두 증여하는 데 사인을 했거든.”“무슨 뜻입니까?”모친의 말에 갑작스러운 편두통이 일었다.“주식으로 전환하면 네가 GL화학의 대주주가 되는 거고, 팔면 엄청난 시세 차익을 얻는 거지.”“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알츠하이머라면서요.”“변호사의 입회하였고 주치의의 소견서도 있어. 법적으로 완벽한 증여야.”“구 회장과 그 누이들이 가만히 있을 거 같습니까? 구본구는요?”을녕의 물음에 모친은 모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가끔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구 회장, 아니, 그 집안에서 원하는 게 뭔지. 돈이에요? 아니면 며느리로서의 인정입니까? 아니면 회장 사모님으로서 누리고 싶은 특권인가요?” 진심으로 궁금했다. 잔인했던 노인네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건지, 한때 모친을 버렸던 구 회장에게 앙갚음을 하려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아들인 을녕의 입지를 위해 암투를 벌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기에 모친은 노인네에게 더할 수 없는, 신장까지 갖다 바친 며느리였고, 남편에겐 여전히 헌신적이었고, 을녕에겐 건조했다.“내가 원하는 건, 뺏긴 걸 되찾는 것뿐이야.”“그게 뭐든 간에 제발 어머니 인생에서 저는 빼주세요.”“네가 내 아들인 이상 그럴 순 없지 않겠니? 세상에서 제일 잔인한 건 핏줄이니까. 조만간 노인네가 널 찾을 거야. 준비하고 있어.”모친은 할 말을 다 끝냈다는 듯 클러치 백을 집어 들었다.“어머니는 언제까지 절 비참하게 만드실 거예요. 왜 그렇게 역겨운 곳으로 저를 끌고 가려고 하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마음 편히 살게 내버려두세요.”“난 널 알아…….”“제가 싫다잖습니까! 제가 필요 없다구요!”을녕은 어금니를 앙다물고 모친의 말을 잘라냈다.“과연 그럴까?”“차라리…… 차라리 절 고아원에 보내고 구 회장에게는 어머니 혼자 가는 편이 더 나았어요.”모친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걸 지켜보며 을녕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젠장.악몽 같은 현실은 언제나 되풀이되고 만다.◇ ◆ ◇철컹거리며 음산하게 차고 문이 닫히고 시동이 꺼지자 주차장 구석에 숨어 있던 갑이 운전석 쪽으로 한 걸음 나섰다.“헉, 깜짝이야.”정말 놀랐는지 운전석에 앉아 있던 을녕이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소리쳤다.“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이 시간 아니면 얼굴을 볼 수가 없으니까요.”운전석으로 다가가 을녕을 내려다보며 팔짱을 꼈다. 요 며칠간 요리조리 갑을 피해 다니는 을녕 때문에 약이 오른 상태였다.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어정쩡한 관계를 더 이상 끌고 싶지 않았다.“하아. 오늘은 너무 피곤하다. 뭔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하자. 네가 아무리 섹시해도 지금은 받아줄 수가 없어요.”이 남자가 어디서 수작질인지 모르겠다.“미안하지만 다음은 없어요.”을녕의 눈가에 생긴 다크서클 정도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새벽에 들어왔다 새벽에 나가는 을녕을 만나기 위해 연준이 잠든 걸 확인하고 졸음을 참으며 겨우 기다렸다. 올빼미처럼 잠이 없는 연준이지만 오늘은 은하와의 여행으로 피곤한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그래…… 뭔데?”차에서 내린 을녕이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어둑한 조명 때문인지 을녕의 뺨에 깊은 그림자가 생겼다. 갑은 그 그림자를 외면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싶었다.“내용증명서를 보셨으면 아시겠지만…….”회사에서도 면담 신청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대표님이 너무 바쁘셔서 시간을 낼 수 없다는 비서의 대답뿐이었다. 참다못한 갑은 을녕 앞으로 내용증명서까지 보냈다. 그랬는데도 을녕은 묵묵부답이었다.“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 합법적으로 계약하고 입주했을 뿐이야. 싫으면 위약금을 내든가. 참고로 난 2년치 임대료를 일시불로 내고 계약서를 썼어.”“억지 부리지 마요.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나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법률적으로도 하자가 없어. 억지는 가비, 네가 부리는 거지.”“서을녕 씨!”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나는 잠자리가 필요하고 넌, 돈이 필요하고.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관계 아닌가?”하, 잠자리? 돈? 관계? 을녕이 선택한 단어들이 갑의 참을성에 금을 내기 시작했다.“선정적인 단어로 교묘하게 내 이성을 자극하지 마요.”“뭐가? 잠자리란 단어가?”“서을녕 씨, 논지는 그게 아니잖아요. 이런 시답잖은 말꼬리 잡기로 당신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어요?”“동감이야. 시간 낭비는 지금까지도 지나치게 충분하니까.”을녕의 목소리가 까슬하게 갈라졌다.“서을녕 씨.”“가비야, 나는…….”“쉿! 잠시만요.”갑이 입술에 검지를 대고 귀를 기울였다. 느린 발소리와 함께 갑의 이름을 부르는 연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머즈보다 청력이 더 좋은 연준이었다.“계단으로 내려오는 거 같아요.”갑은 주차장의 조명 스위치를 내리고 을녕의 차 뒤쪽으로 쪼그리고 앉아 몸을 숨겼다.“뭐해요. 이쪽으로 와요.”갑이 속삭이며 소리쳤다.“내가 왜?”을녕도 입술로만 소리쳤다.“제발요.”갑의 간청에 을녕도 갑의 옆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다음 순간 계단실로 연결된 문이 열리고 연준이 나타났다.“갑아, 연갑.”연준이 스위치를 켜는 순간 갑은 질끈 눈을 감았다. 갑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제발 이 상황이 무사히 지나간다면 을녕이 이 집에서 200년을 살아도 상관없을 듯싶었다.제발!얼마쯤 지났을까,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 눈을 뜨니 연준이 아직 식지 않은 보닛의 온도를 체크하듯 손바닥을 대고 있었다. 위층의 발소리를 들으려는 듯 고개를 들어 잠시 집중하다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고개를 갸웃했다.“어디 갔지?”연준은 스위치를 내리고 어슬렁거리며 사라졌다.후우.다리가 풀려 갑이 털썩 주저앉았다.“내가 부끄러워?”귓가에 을녕의 숨결이 닿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을녕의 가슴에 거의 안겨 있는 자세였다.“오빠한테 이 시간, 이 상황을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일 뿐이에요.”너무 가까웠다. 허벅지와 어깨로 전해지는 을녕의 체온과 머릿속을 혼미하게 만드는 을녕의 향기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부자연스러운 호흡을 원망했다.“오, 오늘은…… 그만하죠.”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 갑의 손목을 을녕이 낚아채 다시 주저앉혔다.“그만하자니까요.”“가비야.”을녕이 속삭이듯 갑의 이름을 불렀다. 저렇게 ‘가비야’ 하고 부르면 눈을 감게 된다. 손목을 빼내려고 힘을 주던 갑이 을녕의 목소리에 잠시 머뭇거렸다.“이곳에서 처음으로 편안한 잠을 잤어.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게.”“…….”“의붓아버지의 집, 학교 기숙사, 호텔, 낯선 도시에서 잠깐씩 렌트했던 집, 그리고 다시 호텔. 생각해보니 홈리스야, 나는.”갑은 오래전 을녕이 살았던 오피스텔을 떠올렸다. 을녕은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단 30분이라도 오피스텔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향초를 피우고 음악을 들으며 갑은 리포트를 썼고 을녕은 책을 읽거나 논문 자료를 준비하거나 했다.“기억나니? 여의도의 오피스텔.”“…….”“좋아했던 곳이지만 그곳에서도 편안하게 잠을 자진 못했어.”을녕이 갑의 손목을 놓고 대신 뒤통수를 감쌌다. 갑은 을녕이 머리를 자신의 가슴 쪽으로 당기는데도 멍하니 함께했던 그 공간을 생각했다. 잿빛 커튼. 빨간색 로고가 예뻤던 머그잔. 가끔 라면을 끓여 먹던 갈색 유리 냄비. 그리고…….“네가 잠시 다녀가고 나면 그뿐, 더 이상 내게 의미 있는 공간은 아니었어. 네가 있어야 완벽해지는 공간이었어. 그런데, 여긴…… 웃풍도 심하고 낡고 썰렁하고 욕실에서 락스 냄새도 심하게 나는데…… 무엇보다 네 오빠가 여기 있는데…… 당연히 내가 있어야 할 곳처럼 편해. 미친 듯이 잠이 와. 너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다는 생각을 했어.”갑의 관자놀이에 을녕의 메마른 입술이 스치듯 닿았다. “그러니까…… 쫓아내지 마. 여기 말고는 갈 데가 없어.”하아.깊게 한숨을 내쉬는 갑의 입술을 온전히 감싸며 을녕은 제발, 이라고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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