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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소리 - 담백한 영웅이 펼치는 명품 시대극

경리단 | 2016-06-11 02:23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아니, 불가능한 도전에 가깝다.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계속된 변화 없이 단단하게 굳어있는 세계관을 뒤엎는 것은 개인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이나 중근세의 조선시대나 다르지 않다. 2015년에 갑자기 자본주의를 전복시키고 그보다 나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중세의 조선에서 왕을 폐위시킨들 민주주의를 전파할 수 있을까?

 

시대의 부당함에 저항하지 말라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혁명적인 격변의 주춧돌이 되어줄 점진적인 변화를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시대의 한계를 받아들이되, 그 안에서 발버둥치는 평범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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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소리’ 는 그런 이야기다. 17세기 명말, 혼란스러운 조선시대를 살아가는 심씨 부녀(父女)의 이야기다. 장님 심학규와 효녀 심청이 부녀지간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전문학 ‘심청전’ 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 같다. 시대의 고통을 무고한 민초들이 온몸으로 맞는 것도 비슷하지만, ‘바람소리’ 의 심씨 부녀는 결코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부당한 고난에 피하거나 숨지 않는다. 심봉사는 눈이 보이지 않지만 장정 열 명쯤은 거뜬히 해치우는 무서운 검의 고수이며, 심청이도 아버지에게 무술을 배운 덕분에 제 한 몸은 지킬 줄 안다.

 

심봉사와 심청은 (본문의 표현을 일부 빌리자면)‘서로 의지하여 몸이 다하도록 오래오래 살아가려는 것’ 뿐이었지만 물론 쉬운 바람이 아니다. 가족끼리 무탈하게 장수하는 것이 어디 좀 어려운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그런데, 하물며 조선시대에 말이다.

 

결국 심청은 귀족가문의 여식 대신에 명나라의 공녀 대신 반강제로 끌려가게 되고, 심봉사는 딸을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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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봉사가 딸을 찾아 싸우는 과정은 매우 인상적이다. 폭력과 유혈이 난무하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바람소리’ 는 ‘조선시대판 테이큰’ 이라는 평을 듣는 데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다르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현실이 다르다. 심봉사가 심청을 만나기 위해 다니며 접하는 인간군상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잔인하기까지 하다. 과거의 조선시대보다는 차라리 가상의 중국 대륙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적자생존의 무협세계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심봉사가 100명의 사람을 만나면 1명이나 그에게 순수한 도움을 줄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가진 것 하나 없는 비천한 신분의 장님이, 거대 귀족의 행사에 의해 납치되어, 약소국이 강대국에 바치는 ‘조공’ 이 되어버린 딸을 찾겠다고 나서는데, 조선 팔도의 어느 누가 협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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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심봉사는 개의치 않는다. 실망하지도 않는 것 같다. 현실의 생리(生理)를 워낙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는 그저 앞길을 가로막는 검은 머리의 짐승들을 베어 죽이고 다음 목적을 향해 묵묵히 나아간다. 딱히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 같지도 않다. 사람백정이 되어 피를 보는 데 망설임도 없다. 단 한 가지 두려움이 있다면 딸을 찾지 못하는 것뿐.

 

이 적나라한 약육강식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것은 인물들의 대사이다. 단순히 상황에 딱 맞아떨어지는 재치 넘치고 센스 있는 대사로 여길 수도 있겠고, 실제로 이 작품의 대사 센스는 필자가 여태껏 봐온 모든 창작물을 통 털어 손꼽히는 수준이지만, 조금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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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납치된 딸을 돌려받겠다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목표에도, 수많은 이들이 심봉사를 적대시한다. 그가 딸을 찾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경우도 있고, 단순히 그의 목숨과 재산을 노리는 경우도 있다. 체제가 붕괴된 곳에서는 마주하는 이의 십중팔구가 적이다. 그들은 심봉사를 해치기 전에 조롱의 의미로, 혹은 그와 협상하기 위해,  때로는 제압당한 상태에서 그를 회유할 의도로 온갖 감언이설과 궤변을 늘어놓는다.

 

심봉사는 시큰둥하다. 덤덤하다. 그러면서도 한마디도 지지 않는다. 궤변에는 궤변으로 답하고, 감언이설은 그 허실(虛失)을 단숨에 꿰뚫어 보며, 가능한 한 후환을 남기지 않는다. 현실의 부당함, 짐승 같은 인간들의 속내를 드러내는 말들에도 격정하지 않는다. 이 또한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리라. 물 흐르듯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심봉사는 그저 역지사지, 그에게 강요하려던 일을 상대에게 돌려주고, 죗값을 받아낼 뿐이다. 현실의 비루함을 부정하지 않고, 바꾸려 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목적을 관철한다. 여태껏 필자가 감상한 많고 많은 ‘로드액션 복수물’ 중에서 가장 담백하지만 동시에 가장 강렬하다. 필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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