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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비로소 할 수 있는 일 - 웹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조경숙
| 2020-06-30 22:31
대입을 준비하던 고등학교 시절, 조금이라도 쉴라치면 선생님은 "지금 네 경쟁자는 공부하고 있다는 걸 명심해."라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그 말을 수없이 들어서 그랬을까, 대입 이후에도 '끊임없이 앞서나가는 경쟁자'의 이미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경쟁자를 생각하다 보면 나 역시 최선을 다해 발버둥 치며 살고 있어도 늘 멈춰 있는 것만 같이 느껴지곤 했다. 이런 기분을 다른 직장인들도 가졌는지, 잡코리아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직장인들 가운데 95.7%가 자기 계발이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자기 계발이 필요한 이유로 가장 많이 꼽은 건 '직무 전문성이 부족해서'(58.7%)다. 현업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직장인들조차도 왜 반수 이상이나 자신을 부족하다고 느끼는 걸까.

웹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썸네일 이미지 (이미지 출처: 다음 웹툰)
달리고 있어도 멈춰있는 것만 같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는, 쉼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더라도 스스로 일상에 제동을 걸기 쉽지 않다. 그런데 비록 만화 속이지만, 그 어려운 걸 진짜로 해낸 사람이 있다. 웹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의 주인공 이여름이다. 평범하게 회사를 출퇴근하고 연애를 이어오던 여름의 일상이 달라진 건 한순간이다. 본래 여름은 연애에서도, 직장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꾹꾹 눌러 참아왔다. 이별을 통보하는 애인의 말을 그저 묵묵부답 받아들이고, 부당한 업무지시가 떨어져도 인내하고 양보한다. 그런 여름의 인내심이 끊어진 건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찾아온 어머니의 죽음 이후다. 홀로 두 아이를 꿋꿋하게 키워왔던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이후, 여름은 돌연 자신의 태도를 바꾼다. 그동안 참아왔던 말을 드디어 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여름은 '말'을 한다. 대중교통에서 여름에 무례하게 행동한 이를 쫓아가 다그치고, 부당한 업무지시를 내리는 상사에게 목소리를 높여 따진다. 예전 같았으면 그저 참고 묵인했을 일에 대해 여름은 더 참지 않는다. 자신이 사과받아야 할 내용에 대해 집요하게 사과를 얻어내고, 여름이 할 수 있는 응징으로 복수한다. 그런 이후 여름은 결심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으면서도, 여름은 월급노동을 하지 않는다뿐이지 뭐든 척척 해낸다. 제일 먼저 여름이 한 일은 회사 근처에 얻은 비싼 원룸을 정리하고, 살고 싶은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무작정 집을 얻고 음식을 구비한다. 발 닿는 대로 실컷 걸어갔다가, 자고 싶은 만큼 자기도 한다. 마을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오고, 두문불출하며 보고 싶은 만큼 영화를 보기도 한다. 여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망부석처럼 그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사회의 기본적인 성장 문법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의 욕망대로 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름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든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영위한다.
아는 이 한 명 없는 외딴곳에서 새롭게 시작한 삶이지만, 여름의 주위엔 뜻밖의 인연들이 모여든다. 평일 낮에도 매일같이 교복을 입고 도서관에 출석하는 봄이, 매일같이 만나지만 이름과 달리 말을 거의 하지 못하는 대범, 매번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한국과 미국을 떠돌아야 했던 재훈, 누구의 강아지인지 모른 채 방치되어있던 강아지 칠십일까지. 이들은 모두 여름이 이전처럼 계속 회사에 다녔더라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인연이다. 학생은 학교에, 직장인은 일터에 있어야 할 정해진 시간 규율 속에 이들은 모두 다소 비켜 서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여름의 곁으로 모여드는 건, 여름과 같은 시간을 공유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여름이 이들 가운데 '말문이 터진' 유일한 이면서도,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하기를 힘들어할 뿐 아니라, 새벽녘이 오면 우울함에 빠지는 대범조차도 여름 옆에서는 행복해한다.
그런데 이들은 왜 말하지 못할까. 아니, 정말 그들은 말을 못 하는가. 봄이나 재훈, 대범 등은 모두 나름의 항변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말은 그 주변으로 수용되지 못하고 자꾸만 퉁겨진다. 사람들은 다른 이의 말을 곡해하고, 자기들 멋대로 받아들이며, 나아가 상대의 말을 그 뜻대로 이해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의구심을 비추는 도구로써 활용하기까지 한다.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만 믿는 이들 앞에서 봄이나 재훈, 대범의 말하기는 힘을 잃는다. 그러나 이들과 같은 시간 속에 사는 여름만큼은 이들의 말하기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대화를 나눈다.
웹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는 얼핏 보면 '힐링 물'인 것만 같지만(그리고 확실히 힐링 되기도 하지만) 이 스토리텔링은 힐링 그 너머를 향하고 있다. 이 만화는 시랜드 참사나 세월호 사건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만 했던 교훈, 우리가 지녀야만 했던 태도에 대해 말한다. 비단 정답을 말해주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 사회가 마주하지 못했던 우리의 민낯조차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우리 사회는 왜 그 사회적 참사들과 그 고통을 제대로 포용하지 못했던가. 이 질문들을 쫓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던 여름은 지금 누구보다도 숨 가쁘게 달려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