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경쟁하지 않는 이야기들의 매력 - 피프툰 <여름의 기억>
조경숙
| 2020-08-31 22:44
젓갈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구운 명란을 살짝 얹어 차가운 녹찻물에 말아 마시는 건 좋아한다. 여름 별미랄까. 좋아하긴 하지만 명란을 어떻게 요리해야 맛있게 구워지는지 잘 몰랐는데 집에 있는 에어프라이어로도 간편하게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피프툰에서 연재하는 <여름의 맛>을 보고 안 사실이다.

피프툰 <여름의 맛>(모밀 작가) 중(이미지 출처: 피프툰 인스타그램)
피프툰은 웹툰 서비스이지만 네이버웹툰이나 다음 웹툰과 같은 만화 플랫폼과 다르다. 사이트에서는 정기적으로 갱신되는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만화를 볼 수 있다. 웹툰이 업데이트되었다는 알람은 매주 이메일 함을 통해 도착한다. 작가 이슬아가 이메일 뉴스레터를 기반으로 에세이를 연재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열다섯 명의 작가가 매월 같은 주제를 중심으로 단편 만화를 발표하는데, 8월인 이번 달의 연재 주제는 '여름의 기억'이다.
여름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건 지금 같은 시기에 다소 사치스러운 일일까. 알다시피 이번 여름은 지난 수십 년을 합친 것보다도 더욱 가혹하다.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간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유례없는 비상 재난 상황이고, 기후 위기로 인해 유난히 길어진 장마와 그로 인한 수해, 연이어 올라오는 태풍까지. 재난 문자가 쉴 틈 없이 울리는 이번 여름은, 여름의 맛을 즐길 틈새도 주지 않고 잔인하게 지나가고 있다. 아니, 즐기다니 무슨 말인가. 사실상 생존만으로도 다행인 시국이다.
그런데도 '여름'을 말하는, 그리고 그중에서도 여름의 '기억'을 꺼내는 피프툰의 방식은 꽤 흥미롭다. 비상시국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모두 2020년의 여름을 잊고 있었으니까. 우리가 지금 누리지 못하고 있지만, 예년에는 당연한 것처럼 지내 온 이 계절의 이야기 속을 파고들다 보면 어딘가 정겹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연재에는 아이와 함께 기혼 여성의 여름이라던가, 유년기 시절 겪었던 오싹한 체험에 대한 이야기, 살인사건이 일어난 여름 바닷가에 살던 아이의 경험, 15년 전 담근 매실주를 맛보는 30대의 여성 등 여름을 대하는 다양한 주체들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여름'이라는 계절이 사람으로 눈앞에 나타난 판타지 만화도 있다. 그들이 꺼내놓는 건 우리가 익히 겪어왔던 여름이지만 그 이야기 속을 부유하는 캐릭터들은 한치도 같지 않고 서로 다른 시각과 위치 속에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 피프툰만이 가지는 특색이다.

피프툰 <여름의 기억>(쩡찌 작가) 중(이미지 출처: 피프툰 인스타그램)
그런가 하면, 피프툰에서는 조회수로 경쟁하고 서로 순위를 매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 서비스에서만큼은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만화를 누릴 수 있다. 지금까지 서로 다른 작가가 같은 주제로 연재하는 기획 연재물은 많았지만, 기획 연재만화들이 건건이 다 연결되기는 어려웠는데 피프툰에서만큼은 연재작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서사가 연결되거나 캐릭터가 같이 등장해서 그런 건 아니다. SNS를 기반으로 연재해왔던 작가들의 저력인지, 이들 만화는 대개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공통종서를 기반으로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어떠한 연결도 기대하기 어려운 시절, 우리에게 남은 건 오로지 화상회의뿐 인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매주 피프툰이 보내주는 편지는 연결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꿈꾸게 한다. 피프툰의 실험이 지속 가능하게 이어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