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웹툰 속 새로운 남성들, 남성성의 해체인가 새로운 알파메일의 등장인가

한국콘텐츠진흥원 | 2020-01-06 16:08

웹툰 속 새로운 남성들, 

남성성의 해체인가 

새로운 알파메일의 등장인가


‘좋은’ 남성 캐릭터를 제시하는 일도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다만 삶을 확장하는 가능성의 관점에서, 

내가 좀 더 보고 싶은 것은 

젠더를 넘나드는 캐릭터와 서사의 실험이다.


글 박희정




우리는 인간을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나누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성별에 따라 주어진 역할이 다르며, 따라야 할 규범 역시 다르다. 이 세계에서는 연애 역시 일종의 역할놀이다. 사회가 승인하는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가진 존재만이, 자신이 주인공인 로맨스를 상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뚱뚱한 여성은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에서 일탈한 존재이므로 여성이 아닌 것으로 취급된다. 뽀글머리를 한 ‘아줌마’ 역시 그렇다. 여성이 아니므로, 그녀들은 욕망의 대상으로 상상되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성애 로맨스 서사들은 그 사회가 바라는 남성성과 여성성, 그리고 그것들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텍스트로서의 가치가 있다. 이는 단순히 구조의 반영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구조와 길항하는 여성들의 다채로운 욕망을 드러내는 것도 포함한다. 그렇다면 최근 여성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웹툰 속 남성 캐릭터들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나쁜 남자 신화와 남성성


2015년, 남성잡지 <맥심>이 일으킨 논란을 기억하는가?

<맥심>은 9월호에 여성을 살해한 남자를 연상시키는 화보를 내걸면서 큰 비난을 받았다. “여자들은 나쁜 남자를 좋아하잖아? 이게 진짜 나쁜 남자야. 좋아 죽겠지?” 화보에 덧붙여진 이 글에는 여성이 가진 로맨스 판타지에 대한 조롱과 여성이 욕망하는 남성이 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

분노가 동시에 드러난다. ‘나쁜 남자’는 여성 독자를 염두에 둔 로맨스 서사들에서 실제로 많은 지분을 차지해왔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나쁜 남자’에 대한 욕망은 고통과 고난에 대한 욕망이 아니다. 남주인공이 가진 ‘나쁜’ 속성들은 연애를 더 극적으로 만드는 장치일 수도 있고, ‘나만이 그를 길들일 수 있다’는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한 포석일 수도 있다. 욕망하는 대상의 내용이나 욕망의 이유 모두 다양하지만, 여성들이 원하는 이 ‘나쁜 남자’들은 사회적으로 선망 받는 남성으로서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주인공을 사랑한다.


성별 사회가 제시하는 젠더 규범은 마치 자연적인 것처럼 이야기된다. 그러나 이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다움을 충족하고 우월한 수컷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남성은 소수이다. 나머지 대다수를 차지한 남성들에게, 욕망의 대상에 머물지 않고 욕망하는 주체가 되려는 여성들은 위협으로 다가온다. <맥심>의 화보는 훼손된 남성성을 여성에 대한 물리적 폭력을 상상하는 것으로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이고 공격적인 태도가 우리 사회의 남성성을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연인에게 살해당하며, 공권력과 언론은 마치 이별이 살인의 이유가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룬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미의 세포들>의 유바비, <내 ID는 강남미인>의 도경석과 같이 여성과 수평적이고 따스한 관계를 맺는 남성 캐릭터들이 얻고 있는 높은 인기는 눈에 띈다. 두 작품은 젠더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지점들을 품고 있다.



유바비와 도경석, 새 시대의 자상한 남자들


먼저 <유미의 세포들> 이야기부터 해보자. 이 작품은 남성 작가의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여성의 심리를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아냈다. 이것이 이야깃거리가 된다는 것은 여성과 남성은 마음이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젠더 이분법이다.


이동건 작가는 이와 관련해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도 처음에는 남자의 마음과 여자의 마음이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국은 어떻게 표현하느냐 차이인 것 같아요. (중략) 연애가 아니더라도 친구, 회사, 학원처럼 주변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서 ‘그건 어떤 의미일까?’라는 생각을 자주 하면서 터득한 거예요.” 


이동건 작가의 말은 여성성, 남성성이 사회적 구성물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이원화된 젠더 사회는 우리의 앎을 제한한다. 우리가 여성과 남성에 대해 보다 잘 알게 되는 것은 젠더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상대를 인식하고 관계 맺을 때이다. 그러한 연애는 남녀 모두에게 억압적이지 않으면서 서로의 성장을 견인해냄을 <유미의 세포들>은 보여준다. 바비에 대한 여성들의 지지는 이 시대의 수많은 여성들이 이러한 관계 맺기를 욕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바비의 특별함은 작중에서 타인을 관찰하는 섬세한 눈으로 표현된다.


그는 유미의 마음이나 처지를 말하지 않아도 곧잘 눈치채곤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결코 유미의 행동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비가 차별화되는 근본적인 지점은 다른 데에 있다. 바비는 처음부터 섬세한 관찰자는 아니었다. 그는 눈치가 없어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잘못과 실패를 인정하고 관계를 맺는 방식의 변화를 수용하면서 바비는 성장했다. 어쩌면 현실 세계에서 재벌보다 찾기 어려운 남자일지 모르겠다. 한국 남성들은 보통 좌절감을 다루기 어려워한다. 바비처럼 자신을 성찰하기보다는 타자를 혐오하는 방식을 택하기 쉽다.


그러나 바비가 만화 속에서 드물게 등장한 대단히 새로운 남성상인 것은 아니다. 특히 순정만화라고 불린 ‘여성 독자’ 를 위한 만화에 한정해서 본다면, 다정하고 섬세하며 여성과 소통하는 법을 아는 남성들을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씩씩한 여성 캐릭터의 대명사 캔디만 해도 거친 반항아 테리우스가 아니라 부와 명예, 지성과 다정함을 함께 가진 앨버트와 연인이 되는 것으로 서사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바비는 ‘마초적’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지극히 ‘남성적’이다. 성별 사회에서 남성다움의 가치는 그가 가진 사회적 자본에 의해 좌우된다. 바비는 잘 생겼다. 왜소하거나 뚱뚱하지 않고 건강하다. 똑똑하며, 유능한 직장인이다. 그는 로맨스물의 주인공이 될 자격을 결코 의심받지 않는다. 유미 역시 사회가 승인하는 여성성에서 벗어나는 인물이 아니다. 이 둘의 관계는 젠더 규범과 긴장 관계를 일으키려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유미는 연애 경험도 있는 30대의 여성이지만 성적인 행동에 있어선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바비 역시 조심스럽긴 마찬가지이지만 첫 키스나 첫 섹스를 시작하는 것은 바비의 몫이었다.


<유미의 세포들> (글 그림 이동건. 네이버웹툰 연재)의 유바비는 항상 주인공 유미를 배려해주는 자상한 남자지만, 기존의 남성성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유미의 세포들> (글 그림 이동건. 네이버웹툰 연재)의 유바비는 항상 주인공 유미를 배려해주는 자상한 남자지만, 기존의 남성성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내 ID는 강남미인> (글 그림 기맹기. 네이버웹툰 연재)의 도경석은 본인은 잘생겼지만 타인의 외모에 대한 편견은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내 ID는 강남미인> (글 그림 기맹기. 네이버웹툰 연재)의 도경석은 본인은 잘생겼지만 타인의 외모에 대한 편견은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내 ID는 강남미인>은 여성성에서 일탈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남성의 가치가 그가 가진 사회적 자본에 좌우된다면, 여성은 남성의 성애적 대상으로서의 가치로만 평가받는다. 여성은 젊고 아름다워야 한다. 미래는 못생겼었고, 성형을 한 후에는 ‘성형 티가 팍팍 나는 얼굴’이 되었다. 미래는 또래 남성들에게 조롱의 대상이다. 작가는 이러한 여주인공을 의도적으로 선택해 젠더라는 지배구조와 그로 인해 상처받은 여성들의 삶을 고발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의 전체적인 틀은 전통적인 로맨스물의 문법을 따른다. 이 두 의도는 충돌을 일으킨다. 작가는 구조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면서, 구조에서 우위를 점한 남성을 욕망하는 독자의 판타지를 거스르지 않는 줄타기를 해야 한다.


작품 속에서 미래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 남성이 욕망하는 여성이 된다. 첫 번째는 특별한 취향을 가진 남성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연우영 선배가 미래를 좋아하는 것은 미래의 ‘강남미인’ 형 얼굴이 정말로 예쁘다고 생각해서다. 두 번째로는 도경석이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다른 잣대를 가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미래가 예뻐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예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아서 좋아한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크다.


연우영과의 관계에서 미래는 ‘운 좋은 소수자’다. 평등한 듯 보이나 시혜적이다. 미래는 권력을 가진 남성에게 선택당한 여성으로만 머물며, 이때 미래의 가치는 여전히 외모에 달려

있다. 도경석과의 관계에서는, 미래와 경석 모두 시스템에 맞서는 ‘저항자’이다. 미래를 억압하는 구조는 도경석의 삶에서도 문제로 작용한다. 작가는 도경석에게 특별한 전사를 부여한다. 경석은 오래전 집을 나간 어머니가 가부장제와 남성폭력의 희생자였음을 알게 된다. 경석은 아버지의 말만 듣고 어머니가 자기 욕망을 위해 자식을 버린 줄로만 알고 그녀를 미워한다. 그는 미래를 통해서 어머니의 진실을 알게 된다(‘누가’ 말하는가는 이토록 중요한 문제다. 한 사회에서 ‘지식’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이 생산되는 과정이 페미니즘의 주된 관심사가 되는 이유다).


도경석이 ‘다른 남자’가 된 이유를 설득하기 위해 작가가 부여한 전사는 이것만이 아니다. 도경석은 성장 과정에서 남성 문화의 아웃사이더로 존재해왔다. 또한 경석의 어머니는 어린 경석에게 그가 이 사회 구조 안에서 특권적 위치를 점했음을 일깨우며, 타인을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성찰해야 함을 알려준다. 마치 기존 문화와의 단절 없이 이러한 남성 캐릭터는 상상되지 않는다는 작가의 웅변이 들리는 듯하다.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하라 


그러나 ‘알파메일’(우두머리 수컷)과의 연애를 통해서만이 도달하게 되는 여성의 성장은 늘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여성 서사의 관점에서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판타지가 주는 쾌감일까? 그 효용성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투쟁의 길만을 걸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좋은’ 남성 캐릭터를 제시하는 일도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다만 삶을 확장하는 가능성의 관점에서, 내가 좀 더 보고 싶은 것은 젠더를 넘나드는 캐릭터와 서사의 실험이다.


<먹는 존재>의 유양과 박병의 관계는 그런 면에서 신선하고 흥미롭다. 유양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 구조에 비판적이고 냉소적이다. 그의 애인 박병은 마치 유양이 혐오하는 가부장제적 남성성을 소거하는 방식으로 탄생시킨 캐릭터 같다. 그는 여리고 착하며 따스하고 부드럽다. 그는 ‘추남’으로 설명되는데, 외양은 구체적으로 재현되지 않는다. 사실, 그의 외양은 ‘남성’으로 인지된다고도 할 수 없다. 영리하며 의도적인 선택이다. 그의 외양이 특정한 모습으로 재현되었을 때는, 이미 거기에 여러 가지 선입관이 들러붙고 만다.


그 순간 생각은 멈추고, 주어진 규칙을 답습하게 된다. 이 둘의 관계는 기존의 젠더 규범의 틀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해체되어 유양과 박병 안에 다양하게 재조립되어 있다. 유양과 박병은 우리에게 젠더란 무엇인지를 되묻게 한다. 박병은 ‘알파메일’이 아니지만, 충분히 매력적이다. 애초에 사람의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양하기 때문이다. 제한되어 있는 것은, 다만 우리의 상상력일 뿐이다. ◆




박희정 | <주간경향> ‘만화로 보는 세상’의 필진이며, <코믹스 페미니즘: 웹툰 시대 여성만화연구>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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