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신도림>, 장르적 관습이란 엔진을 달고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땅 위를 질주하는 쾌속 서사

한국콘텐츠진흥원 | 2020-01-06 16:18


<신도림>, 장르적 관습이란 엔진을 달고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땅 위를 질주하는 쾌속 서사


글 괴벨 





강자의 입장에서 즐기는 서사

오세형 작가의 <신도림>은 목적이 매우 명확한 웹툰이다. 파죽지세로 쾌속 진격하는 통쾌한 서사를, 강자의 입장에서 즐기는 것이 그것이다. 이 통쾌함을 위해 작가는 특유의 숙달된 기술력으로 강렬한 색감과 구도, 과장된 동세, 대담한 레이아웃을 연출하여 시각적인 박진감을 극대화한다. 강자의 입장에서 즐기는 서사란, 다시 말해 평범한 약자의 차근한 성장을 인내하지 않는 서사이다. 주인공의 정체성은 성장하지 않는다. 능력도 이미 최상위권이다. 다만 그 잠재력을 아직 다 못 끌어냈을 뿐이다. 독자들은 주인공의 크고 작은 성패를 조마조마하게 가늠해보는 대신, 퍽 낙관적인 마음으로 소위, ‘포텐(potential, 잠재력)이 언제 터질지’ 기대하며 본다. 이것이 흔하게 회자되는 ‘사이다’ 서사의 한 방식이다.


물론 전통적인 장르물에도 <록키>처럼 주인공만의 값진 승리를 이야기하는 서사는 많았다. 이 승리를 최대한 시원하게 맛보기 위해, 전통 장르물의 작법은 주인공을 가장 밑바닥 지옥으로 끌어내렸다. 지옥과 승리, 이 사이의 낙차는 크면 클수록 좋다. 미리 준비된 시원한 물 한 잔의 가치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 독자를 탈수 상태로 만든다. 주인공은 주인공만을 위해 고안된 맞춤형 지옥에서 불굴의 의지로 기어 나와 승리를 거머쥠으로써 독자의 갈급함을 해소한다. 창작물에서 얻을 수 있는 대리만족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 유행하는 사이다 류에는 그러한 지옥이 없다. 독자들은 더는 긴 탈수 상태를 견디지 않는다. 약간의 목마름에도 펑펑 사이다를 터뜨려야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핵심은, 이미 많은 수의 독자들이 대리만족하고 싶은 서사는 성장을 통한 어려운 승리가 아니라, 쉬운 승리라는 것이다.


주인공이 어려운 변화 없이 승리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그냥 세계가 변하면 된다. 예컨대 ‘이고깽(이계에서 고등학생이 깽판을 부리는 판타지 장르의 총칭)’ 주인공은 성적 중심의 경쟁 사회에서 낙오하다시피 한 고등학생이지만, 이(異)계에 가서 쉽게 주류에 편입된다. 드래곤이 쓰는 언어가 한국어라거나, 평소 즐겨 하던 게임 속의 아바타가 된다거나 하는 식의 비(非)일상계 질서는 마침 주인공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인공에게 맞춤화된 비일상계에서, 평범하던 주인공은 자연히 최상위의 권위자가 된다. <신도림> 역시 마찬가지다. <신도림>에서 설정된 비일상계는 핵전쟁으로 망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이다. 작가는 거대하게 판을 때려 엎고, 비일상계를 원래의 일상 세계 위에 포개어 세팅한 뒤 시작한다. 이 포개짐은 기존의 세계에서 외면당하던 가치가 제고될 때의 ‘낯설게 하기’를 극대화하는 기법이 된다.


이렇게 기존의 공고한 장벽으로서 새로운 세대들의 진출을 가로막아오던 질서, 즉 학연, 지연, 경제력, 지위, 명예, 연령에 부여되던 권위가 모조리 붕괴한 이 세계에서는 오로지 강한 육체와 싸움의 기술만이 질서가 된다. 거기에 일부 청소년들은 방사능 부작용으로 신체적으로 18세에 성장이 멈춰져 더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 방사능에 의해 면역된 것은 물론, 가지고 있던 능력까지 증폭되는 부작용을 겪는다. 원래 청소년 국가대표 야구 선수였던 주인공 천둥은 방망이로 총알도 되받아칠 수 있는 초능력자가 된다. 이런 아이들은 키즈(Kiz)라고 불린다. 이들 키즈의 세계에선 과거 ‘스펙’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청소년 야구, 족구, 당구, 태권도, 판치기, 헬스, 재봉, 미용 기술자가 유리해진다. 6년이 지났다지만 부모나 이전의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비추는 아이들도 없다. 그들은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임모탄 조처럼 씩씩하게, 위화감 없이 새 세계에 착 달라붙어 있다. 기존 관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통해, 새 세계의 진정한 원주민이 된다. 즉, 신인류이다



거침없는 취향 지향과 압도적 기술력


신도림


의도된 단절, 이것은 기성세대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것이다. <신도림>의 가장 핵심적인 설정은 신인류인 청소년에게 누구든 판결할 힘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주인공 천둥과 동료들은 그야말로 약육강식에 최적화된 채로,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가치에 따라 행동한다. 기성세대가 중요하게 여겼던 시스템은 의도적으로 무시된다. 모두가 억압 없이 평등한 권리를 누리게 하겠다고 기성세대가 추가해 온 여러 시스템은 너무나도 복잡해진 나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 배제와 불평등의 근거가 될 뿐이었다. 그래서 천둥은 무조건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새로운 룰대로만 행동한다. 천둥과 동료들이 반복적으로 던지는 대사가 있다.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내뱉는 대사는 “강한 놈들이 간다”이다. 강한 놈들이 가도 안 될 것 같다면? 그땐 “더 강한 놈들이 간다”. 어른들의 권위에 도전하지만, 또래의 나약함도 용서하지 않는다. 권선징악의 서사조차도 희미해진다. 과거에 유행하던 니힐리스트 주인공들과 바탕은 비슷하지만, 천둥은 허무나 차가운 냉소로 외면하지 않는다. 뜨겁게 날뛰는 니힐리스트 안티 히어로에 가깝다. 하여 이신인류의 캐릭터 디자인은 일본 만화인 <데빌맨>, <마징가 제트>, <요괴소년 호야> 등을 떠올리게 한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일본 소년만화에서 볼 수 있었던 위악적인 표정의 열혈계열이다. 악마의 힘을 빌린다거나, 남의 배려를 받기보다는 스스로 강함을 추구하는 안티 히어로적인 가치관도 공유한다.


하지만 또한 색감에서는 서양의 누아르풍 그래픽 노블을 지향한다. 그래서 액션 컷은 만화적 연출인 동시에 빈티지풍의 그래픽디자인이기도 하다. 디자인을 위해서 작가는 타이포나 말풍선처럼, 기존의 만화에서는 개념적 요소였던 것을 적극적으로 시각 요소로 끌어들인다. 이처럼, 기존 장르물의 관습과 문법의 대거 도입과 숙달된 작화와 연출 실력은 이 만화가 스타일리시한 액션 장르로서,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감각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런 클리셰들이 작품의 단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장치라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트렌디한 설정에 장르적 관습을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지금까지의 패턴들을 조립하여 뚝딱 쓸 수 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 강한 주인공이 승리하는 서사, 스토리의 방향이 이렇듯 단순하면, 지루해지지 않기 위한 많은 설정과 세계관, 장치, 보조 플롯, 인물들이 필요하게 된다. 이런 것들을 오케스트라 지휘하듯 조화롭게 다뤄야만 하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다. <신도림>의 경우 얼핏 주인공이 거침없이 쉽게 승리하는 서사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다. 주인공은 전통적인 방식의 고난을 겪고 있다. 단지 고난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쾌감보다 커지지 않기 위해, 주인공의 가치관, 성격, 치트키로 깔아 놓은 잠재력 등으로 위장되어 있을 뿐이다. 전통적으로는 이계로의 부름을 받을 때 거부하던 주인공이, 강력한 계기가 생겨야만 결심하게 되는 단계가 있다. 그런데 독자들은 이 패턴을 지겨워한다. 어차피 독자들은 주인공이 행동하게 될 걸 다안다. 그래서 주인공에게 시원시원한 ‘돌직구’ 성격을 부여하여, 결심 단계까지의 플롯을 신속하게 처리해버리는 것이다.


모든 만화가 같은 목적을 갖고 있을 필요는 없다. 각자의 취향이 다르다는 것과는 별개로, 그 목적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 얼마나 퀄리티가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신도림>은 추구하려는 목적을 탄탄한 작화와 트렌디한 스토리텔링으로서 충분히 달성한다. 이 거침없는 취향 지향과 그를위해 구사된 기술력은 압도적이다. 이 작품을 즐기는 독자들은 자신들의 감각과 욕망을 수준 높게 다뤄주는 이 서비스에 크게 만족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괴벨 | 술 사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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