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웹툰의 여성 서사

한국콘텐츠진흥원 | 2020-01-06 16:31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웹툰의 여성 서사


여성 창작자가 페미니즘을 접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성차별적 구조 안에서 파악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글 위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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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심청> (글 seri, 그림 비완. 저스툰 연재)


2018년도 여성 서사의 승리였다.

지난 11월 3일 만화의 날 열린 ‘오늘의 우리 만화’ 시상식에 선정된 작품 목록을 보자. 8년여의 장기 연재 동안 여성으로서의 일상과 노동에 관해 이야기한 <어쿠스틱 라이프>와 고전 <심청전>을 현대적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그녀의 심청>처럼 명백히 여성 서사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을 확인할 수 있다. 


2017년 시상식에서는 한국 가부장제의 문제를 며느리의 시선에서 다룬 <며느라기>, 여성이 겪어야 하는 가정 폭력을 가감 없이 고백한 <단지>, 태권도를 배우며 좀 더 단단한 자아를 만들어가는 여성이 등장하는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이 선정됐었다. 2016년엔 20대 여성이 겪는 여러 사회적 부조리를 응축해낸 <혼자를 기르는 법>, 한 평범한 여성이 짝사랑과 연애의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가는 이야기인 <유미의 세포들>, 제목부터 여중생의 입장에서 그려낸 성장 서사인 <여중생 A>가 한국의 현재를 반영하는 작품으로 선정됐다. 2014년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도 수상작에 <먹는 존재>가 이름을 올려 이런 분위기의 실마리를 예감케 했다. 즉, 길게 보면 5년 이내, 최소 지난 3년 동안 한국 웹툰에 성공적인 여성 서사가 많이 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가지 방향을 유추할 수 있다. 그 시기의 사회적 변동이 동시대 매체로서의 웹툰에 반영되었다는 것, 그리고 웹툰계 자체적으로 이러한 서사가 발아할 어떤 계기가 있었다는 것.


페미니즘 담론을 흡수한 여성 창작자들


먼저 첫 번째 가정. 2015년을 전후해 사회적 변동이 있었고, 그것이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이미 페미니즘 비평에서는 익숙한 이야기다. 문화연구자 손희정은 책 <페미니즘 리부트>에서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개념을 두 가지 실용적인 이유에서 고안해냈다고 밝힌다.


첫째는 ‘기존의 페미니즘 문화 운동과 2015년에 일어난 운동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과 접속의 지점을 포착’하기 위해서이며, 둘째는 ‘페미니즘 리부트의 정치적 경제적 조건들을 예민하게 인식하고 그것의 문화적인 성격, 그리고 대중문화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2015년 2월 문화평론가 김태훈의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 칼럼이 기폭제가 된 여성들의 분노와 메갈리아 사이트의 등장은 여성들이 경험을 나누고 담론화하는 역할을 하며 페미니즘 이슈를 그 어느 때보다 대중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조경숙, 박희정이 참여한 <코믹스 페미니즘: 웹툰 시대 여성만화 연구> 역시 페미니즘 리부트 개념을 끌어들여 기존의 여성 만화와 2015년 이후의 여성 만화를 구분한다. 해당 연구에 따르면 무엇보다 ‘일하는 여성 청년’ 캐릭터(<열정호구>, <혼자를 기르는 법>)와 외모 차별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껍데기>, <화장 지워주는 남자>), 그리고 성폭력 담론(<아, 지갑 놓고 나왔다>)이 2015년 이후부터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더 많은 실증적인 요소들이 있다. 손희정은 앞의 책에서 2016년 파퓰러 페미니즘의 중요한 거점으로 트위터를 꼽는다. 이들 여성 서사의 창작자 중 상당수는 자신들이 트위터를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한 넷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혼자를 기르는 법>의 김정연 작가는 2017년 초에 열린 단행본 출간 기념 콘서트에서 트위터를 중심으로 한 대중적 페미니즘의 흐름의 영향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엄청. 어렸을 때부터 선들을 넘나드는 아이였기 때문에 ‘여자 애가 왜’, ‘딸이니까’ 하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 늘 그런 것들에 많이 억눌려 있던 터라 ‘이것에 내가 화를 내도 되는 거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자마자 확 폭발한 것 같다.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2010년 데뷔해 꾸준히 자신의 일상을 그려오면서도 조금씩 그 안에서, 사회적 구조 속 여성의 위치라는 부분을 더 세밀하게 인식하고 그려온 <어쿠스틱 라이프>의 난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그는 “전에는 일상에 숨은 성차별을 보면 뭔가 불편하다고 막연히 느끼면서도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 아무래도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몸에 밴 채 성장하니까. 그런데 3년 전쯤부터 트위터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접하고 공부하면서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 약을 먹은 것처럼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거다”라고 자신의 변화를 설명한다. 여성 창작자가 페미니즘을 접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성차별적 구조 안에서 파악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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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20대 여성의 삶을 그린 <혼자를 기르는 법> (글 그림 김정연. 다음웹툰 연재)


<혼자를 기르는 법>이 특별한 건, 과거 ‘일상툰’을 중심으로 한 개인의 이야기가 단순히 개별적 개성을 지닌 ‘나’에 대한 것이었던 것과 달리 20대라는 세대적 측면과 여성이라는 젠더적 측면, 그리고 서울이라는 공간적 측면이 교차하는 지점으로서의 ‘나’를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주인공 시다는 사회적 맥락과 분리된 개별화된 개인도, 혹은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보편화한 개인도 아닌, 지금 이곳에서의 동시대성과 특수성을 경험하는 존재가 된다. 여성 서사로서의 <혼자를 기르는 법>이 특정 세대 여성들을 대표하는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건 그래서다. 마찬가지로 <어쿠스틱 라이프>에서 난다 작가는 아이에 대한 사랑과 육아 과정을 묘사하되 여성에게 강제적으로 부과되는 모성애 신화를 한 발 떨어져 바라보고 그런 변화의 모습 역시 솔직하게 담아낸다.


더 좋은 것은 이러한 웹툰의 동시대적 민감성을 통해 다시 대중에게 유의미한 현재적 관점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시 트위터를 통한 여러 여성의 목소리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는 그동안 이미 여러 채널로 터져 나오던 여성들의 명절 스트레스를 단순히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런 며느리 노릇이 가부장제 안에서 어떻게 정당화되고 여성 안에서 내면화되는지 그려내며, 동 세대 여성들에게 강한 공감과 깨달음을 안겼다. 역시 기혼 여성인 미깡 작가는결혼을 고민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하면 좋습니까?>에서도 단순히 결혼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는 사람과함께 하는 방식이 왜 결혼밖에 없는지 심층적인 질문을 남긴다.


두 작가 모두 기혼자이면서도 생활동반자법 같은 결혼 외의 선택지를 지지한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나’의 경험을 ‘우리’의 경험으로 인식하거나 상상할 수 있고 함께 나눈다는 건 그런 거다.


웹툰 시장 내 백래시와 그에 대한 대항으로서의 여성 서사와 연대 두 번째 가정은 어떨까. 웹툰 시장에서 여성 서사에 대한 창작 욕구가 생길 내부적 동기 역시 유추할 수 있다. 손희정은 수전 팔루디의 <백래시> 해제에서 2017년의 미투 운동 등을 예로 들며 이를 ‘페미니즘-백래시-리부트’의 양상으로 도식화했다. 가령 한국 사회에서는 앞의 김태훈 칼럼이나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이 여성들이 자신의 불평등한 위치를 자각하고 서술하고 공유하는 계기가 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웹툰 작가, 특히 여성 작가들이 작가로서 경험한 백래시의 경험으로 <클로저스> 성우 사태를 이야기할 수 있다.


2016년 7월 페이스북 ‘메갈리아4’ 페이지에서 페이스북 코리아의 부당한 조치에 대한 소송 자금 마련을 위해 판매한 티셔츠를 김자연 성우가 트위터에 구매를 인증하자, 일부 사용자들이 김자연 성우가 ‘메갈리아 인증’을 했다며 그의 목소리를 게임 <클로저스>에서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김자연 성우와 넥슨의 계약은 해지됐다. 이 사태에서 상당수 웹툰 작가들은 서브컬처 종사자로서 부당한 계약해지를 당한 김자연 성우를 위해 연대 의사를 표했고, 이들에 대해 남성 중심 서브컬처 유저들은 커뮤니티와 나무위키 등을 중심으로 공격을 가했다. 당시 “메갈리즘에 찬동하는 작가들을 거부합니다”라는 구호와 함께 벌어진 검열 캠페인 ‘예스컷’ 운동은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미움이 작품 자율성 침해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움직임에 대항해 싸우던 여성 작가들은 극심한 사이버 불링을 당했으며, <아메리카노 엑소더스>의 박지은 작가 같은 경우는 별점 테러를 받기도 했다. 이후 뚜렷한 자기 생각을 가지고 여성의 경험을 그려내는 여성 작가들한테는 ‘메갈 작가’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러한 백래시의 경험이 여성 창작자들을 각성시켰을까? 미깡 작가는 “나도 이번 작품을 하면서 ‘메갈 작가’, ‘메갈 만화’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내 경우에는 전투력이 상승한다. 다만 엄청나게 공격을 받는 작가라면 실질적인 위협이나 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충분히 위축될 수 있을 것 같다. 지지하는 사람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함께 싸워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성의 실제 임신과 그 경험을 솔직하게, 하지만 사회적 통념과 다르게 그려냈다는 것만으로 <아기 낳는 만화> 같은 작품도 연재 초기부터 ‘메갈 만화’ 같은 악플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수신지 작가는 <아기 낳는 만화> 단행본을 위한 추천사를 써주기도 했다.


이처럼 백래시 이후 악의적인 여성혐오가 웹툰이라는 미디어를 둘러싸는 상황에서 여성 작가들이, 혹은 여성 서사의 작가들이 서로의 존재에 기대고 용기를 얻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즉 사회적 변동을 통해 여성 작가들이 젠더 정치 관점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동시에, 웹툰 내 백래시를 통해 여성 창작자들이 서브컬처 시장 내에서의 차별적 경험을 공유하고, 그에 지지 않고 싸우는 과정을 통해 더 많은 여성 서사물이 등장할 수 있었다.


올해도 여성 서사의 승리라고 앞서 이야기했다. 사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해마다 좋은 작품이 나오고, <유미의 세포들>이 네이버에서 요일별 수위를 다투거나, <계룡선녀전>이나 <내 ID는 강남미인>이 드라마로 제작되는 등 상업적으로도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선 여전히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거나 여성에 대한 혐오적인 편견을 재생산하는 작품들이 시장 안에서 승리하고 있다. 물론 스포츠처럼 승패로 결정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한계도 있다. 여전히 이성애적 로맨스 안에서 ‘개념남’을 통해 여성의 자율성을 보장받으려 하거나(<내 ID는 강남미인>, <유미의 세포들>), 가부장제를 비판하되 그 바깥에 대해 아직 상상하지는 못한다는(<며느라기>) 비판에서는 이들 여성 서사조차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오랜 여성혐오의 경험과 백래시의 이중적 부담 안에서 어떤 전진이 가능하다면, 가능한 작은 승리의 기록을 쌓는 방법 뿐일 것이다. 우선, 그리고 여전히 우리에겐 더 많은 여성 서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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