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만화 VS 만화 시즌 2] #07. 천 하루 동안의 밤, 그 이후 : 『양영순의 천일야화』

툰가1호 | 2016-08-16 08:32

 

 

2004년, 양영순은 이제 막 정착하기 시작한 웹툰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에 몇백년이 넘은 고전을 들고 찾아왔다. ‘아라비안 나이트’를 각색한 『천일야화』다. 기대보다는 우려가 컸다. 이미 써먹을 대로 써먹은 고전이라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소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들누드』, 『아색기가』를 통해 양영순은 짧은 극화에서 이미 입지를 견고히 했다. 하지만 서사만화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이후 『영점프』에서 장편 『철견무적』을 선보였지만 긴 흐름을 유지하지 못하고 연재가 중단됐기 때문이다. (『철견무적』의 떡밥은 10년이 지나 『덴마』에서 회수한다) 이후 『천일야화』로 서사만화를 재시도한다고 하니, 의심이 오죽했을까. 그런 의심을 날려버리려는 듯 그는 오랜 기간 꼼꼼하게 공을 들여 새로운 전략을 짰다. 원작의 특성 상 짧은 이야기가 이어지는 액자식 구성은 작가의 장점을 살리며 호흡을 이어가기에 수월했다. 너무 익숙한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신밧드의 모험’ 같은 이야기는 모두 버렸다. 원작의 소재만을 취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 아예 새로 쓴 이야기도 있다. 그대로 가져온 것은 여주인공의 이름 ‘세라자드’ 뿐이다. 이렇게 ‘양영순의 『천일야화』’가 탄생됐다.

 

 

『양영순의 천일야화』 - 양영순, 김영사 연재처인 파란닷컴의 엔타민은 현재 사라졌다. 단행본을 구입해서 보시길.
『양영순의 천일야화』 - 양영순, 김영사
연재처인 파란닷컴의 엔타민은 현재 사라졌다.  대신 올레마켓에서 유료로 볼 수 있다! 단행본도 나와있다.

 

 

왕비의 부정에 대한 배신감에 살육을 멈추지 않는 왕. 왕이 무자비해질수록 왕을 제거할 신하들의 음모도 같이 고개를 든다. 몇 남지 않은 온건파의 수장의 딸인 세라자드가 자원하여 왕의 침소에 든다. 하룻밤을 보낸 여자는 반드시 처형하는 왕은 세라자드의 이야기에 빠져 처형을 미루게 된다. “천사가 말했다. 오 마리아여, 신이 그대에게 그의 말씀(kalima)을 선포하신다.” 코란 3장 45절이다. 신이 마리아에게 말씀을 선포하듯, 세라자드는 왕에게 천 하루 동안의 밤을 선사한다.

 

『천일야화』의 세라자드는 이야기술법이라는 정신치료에 가까운 방법으로 왕에게 접근한다. 왕은 술법을 통해 이야기 속 등장인물에 적극적으로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세라자드는 이를 이용하여 왕이 처한 상황을 각색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다마스커스의 상인), 남녀 간의 사랑(물고기섬의 마인), 약자와 강자(살로메와 흡혈귀), 선악의 양면(검은 칼리프)을 지나 마지막 테마인 화해와 용서(마라이카의 갑옷)로 모든 이야기가 끝난다. 그녀의 이야기를 통과하며 첫 등장부터 피비린내를 풍겼던 왕은 점차 마음의 상처를 추스르게 된다.

 

 

결국은 ‘사랑’이 주제다
『양영순의 천일야화』 - 양영순, 김영사
결국은 ‘사랑’이 주제다

 

 

사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하나의 주제를 떠나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야기 속 세계에는 마인과 인간이 공존한다. 재미있는 점은 마인과 인간의 피가 반씩 섞인 인물은 대개 이중적인 모습을 띤다는 것이다. <마라이카의 갑옷>편의 쌍둥이, <검은 칼리프>의 주나이드가 그렇다. 주나이드가 가진 복잡성은 왕이 지닌 그것과 같다. 주나이드는 시간마법을 통해, 왕은 이야기요법을 통해 자신의 과오를 깨닫는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일인물인 슬픈 이야기가 어쩌면 『천일야화』가 보여주려는 진짜 결말일지도 모른다.

 

세라자드의 이야기 술법이 끝난 후 현실로 돌아오자, 신처럼 보였던 세라자드는 갑자기 평범한 인간이자 수동적인 여성으로 변신한다. 폭군을 품던 성녀는 왕의 상처가 아물자 제 역할이 사라져 버렸다. 연재 당시 많은 독자가 지적한 불친절한 엔딩은 여기서 출발한다. 인간으로 격하된 성녀에게 주어진 행동패턴은 많지 않다. 유일하게 왕의 순수를 두둔하며 적극적으로 치료에 나서는 인물이 극의 정점에서 실종됐다. 세라자드는 자신의 연인, 아버지, 나라를 모두 잃은 상처를 치료받지 못했다. 그저 왕을 부연설명 하는 상징적 인물 중 하나일 뿐이다. 물론 극의 결말에서 잃은 것에 대한 보상은 받는다. 허나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은 행복한 눈물인지, 성녀의 미소인지, 혹은 못 다한 매듭의 말미인지 알 수 없다.

 

 

우려 속에서 시작했지만『천일야화』는 작품성을 인정받고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 양영순의 작품 연대기에도 하나의 기점이라는 것이다.『천일야화』이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고 가장 많은 변화를 보여준 것은 연출이다.

웹툰의 특성상,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길이는 제한이 없다. 이는 필름이 움직이는 방식과 동일하다. 반면 출판 만화의 시선은 왼쪽 상단에서 오른쪽 하단까지 역S자로 움직인다. 두 페이지씩 흐름도 끊어진다. 『누들누드』나 『아색기가』는 출판만화였음에도 불구, 연속되는 필름처럼 이어지는 연출을 시도했다. 웹툰 연출에 적극적으로 도입했을 법도 한데, 특이하게도 『천일야화』로 넘어오며 그 방식을 과감히 버린다.

 

 

전작 『누들누드』, 『아색기가』는 행동으로 상황을 설명하는 슬랩스틱이 강했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동작이 이어지는 영화 필름같은 연출을 활용했다.
전작 『누들누드』, 『아색기가』는 행동으로 상황을 설명하는 슬랩스틱이 강했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동작이 이어지는 영화같은 연출을 활용했다.

 

 

대신 생략을 한다. 컷의 크기는 커졌고 컷과 컷 사이의 여백도 넓어졌다. 정해진 쪽수 안에서 컷을 세분화하는 작업이 웹에서는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컷 사이의 여백을 추론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여백이 많은 수록, 독자가 들어갈 공간은 많아진다. 왕이 세라자드의 이야기를 통해 자기의 모습을 추론하듯 독자는 컷 사이의 여백을 추론해낸다. 물론 이런 기법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이후 『플루타크 영웅전』에선 전혀 효과가 없었다. 결국 연출이 컨셉과 부합했던 것이다.

 

 

스크롤 방식의 연출은 여백을 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물고기섬의 마인' 중에서
두 개의 장면이지만, 하나의 컷을 편의상 두개로 나눈 것이다. 스크롤 방식의 연출은 여백을 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양영순의 천일야화』 중 '물고기섬의 마인' 에서

 

안타깝게도 웹툰 방식의 컷 연출은 『천일야화』 이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스크롤 방식을 단행본으로 옮기는 과정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이후 작업은 모두 단행본을 염두에 둔 출판만화의 그것으로 돌아간 듯하다. 대신 이후 작품에선 컷 안을 인물과 배경으로 꽉 채우는 방식을 버렸다. 컷 안에서 여백을 활용하는 것이다.

 

양영순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꼽히는 종교적인 색채 역시 『천일야화』에서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원작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인지, 작가는 각색 과정에서 코란을 읽었다고 한다. 그 영향인지 전작 『철견무적』에서 언뜻 보인 종교적인 색채는 『천일야화』를 기점으로 이후 『라미레코드』, 『덴마』 등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최근작『덴마』의 휴재 소식으로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고 있을 양영순의 팬이라면 『천일야화』를 보며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갖기를 추천한다. 짧은 웹툰 역사에 이런 대작을 만나보는 경험,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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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에이코믹스 http://acomics.webtoonguide.com/archives/23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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